132화. 그림의 힘
어느새 겨울이 바짝 다가왔다.
YJ예술고등학교에서는 신입생 선발을 마쳤고, 이제 직원 채용도 거의 확정을 내린 상태였다.
민수는 거의 계속 교무실에 상주하면서 이미 검토를 마친 커리큘럼을 몇 번이고 살펴보았다.
가장 최근에 전달된 이력서를 확인하고 있는데 민수가 잡담을 걸어왔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이력서만 검토하시는 거 보니까 나는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강호의 기연이 또 이렇게 닿아서…… 좋은 낙하산 탔네요.”
“에이, 낙하산이라뇨. 하하. 그런데 내년에는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원할 수도 있겠어요.”
“왜요? 아, 학교 성과가 있을 테니까요?”
처음 MMS 미술학원에 갔을 때는 그냥 멋쟁이 화가로만 보였던 민수였다.
지금은 단정하고 평범한 정장 차림이라 그런지 베테랑 사무원처럼도 보였다.
“그것도 있는데, 지난번 독도의 날 때 대통령님이랑 약속한 게 있거든요. 미술가 재정지원을 확대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우리도 좀 편해질 테고, 학생이나 선생님들 입장에서도 좋을 테니까요.”
“와…… 그때 대통령도 만나셨어요?”
훈장 수여식에 다녀온 건 알려졌지만 그렇게 독대까지 한 건 조상철 같은 독종들이나 알고 있는 정보였다.
아직 재정이 확실히 오른 것도 아니라서 굳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예술가가 오히려 개성 있어 보이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난할 수만은 없죠. 좋은 일 했네요. 흥미만 있다면 다들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 좋은 예술가도 많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MMS 원생이 줄고 나서 그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 학생을 뽑을 땐 최대한 미술에 간절함이 있어 보이는 지원자 위주로 선발했다고 했지.
이전까지만 해도 그 모든 걸 실력으로 가름했지만, 지금의 민수는 달랐다.
지망생들의 그림은 나보다도 더 많이 봐왔을 민수라면 그 학생의 간절함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내 일도 늦출 순 없었다.
다시 지원자 포트폴리오로 눈길을 돌렸다.
몇 장쯤 살펴봤을 때 눈에 띄는 이력서를 발견했다.
“미술치료 상담사?”
‘김선’이라는 이름의 지원자였다.
예술고등학교, 미술대학 등 화가로서 평이한 이력들 아래로 최근 이력들이 눈에 띄었다.
우울증 환자, 학교 폭력 피해자 등등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온 경력이었다.
아직은 미술 상담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선의 희망 직종은 여전히 미술치료사였다.
“미술치료사도 지원했어요?”
“네, 그러네요. 그런데 미술치료사면 그림으로 치료해주는 상담사 아닌가요? 학교에 미술치료사가 있기도 한가요?”
경력상 학교 소속이었던 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우울증 환자들을 상담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상담을 해준다는 것일까?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는 당연히 생각해왔다.
그래서 미술치료라는 데에 잠시 흥미를 가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미술관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나 유효한 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을 보다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얻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모든 내담자가 미술에 관심이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림으로 치료해주는 것도 맞는데, 그 이전에 내담자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죠. 그럼 미술치료사는 그 그림을 보고 내담자의 심리상태를 알아보는 거예요. 원래 모든 미술치료사가 직접 그림까지 그려주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분은 그랬나 보네요. 미술대학까지 나왔으니까 그런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이력서를 보던 민수가 덧붙였다.
핵심은 내담자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림을 더 발전시켜나가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미술 활동이란 원래 감상자와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화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림을 그리는 게 활동의 주요 일과인 학생들에게라면 누구에게보다 효율적인 상담 기법이 될 것 같았다.
“이력서를 봐서는 우리 예술고등학교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이분 한번 뵀으면 좋겠어요.”
내가 제안하자 민수는 이력서를 챙기며 대답했다.
“그럼 연락 한번 해보죠. 미술 관련해서 이것저것 다 검토해본 줄 알았는데 미술치료는 생각도 못했네요.”
민수는 이력서에 적힌 번호를 확인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앉아 웹 문자로 면접 일정을 통보해주었다.
***
실제로 만나본 김선은 어딘가 식물 같은 인상이었다.
유약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또 강단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화가로서의 이력이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아서 별 기대 안 했는데. 면접이라도 불러주시니 좋네요.”
그녀는 면접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소소한 이야기들을 먼저 주도하기 시작했다.
상담사로 일한 기간이 있기 때문인지 1대1 대화 자체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학력을 보면 미술 자체에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왜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신 거예요?”
어차피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만으로 직원을 뽑을 생각이었다면 면접 같은 건 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중요한 건 김선이 YJ에 얼마나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내밀한 대화를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미술치료를 받아봤거든요. 초등학생 때 주기적으로 미술치료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미술이 즐거워졌어요. 그래서 꽤 그렸고, 솔직히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좋아요.”
김선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당연하게 개인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조금 지쳤는데, 그제야 왜 내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지가 떠오르더라구요. 미술치료였죠. 그때엔 옛날 상처를 다 극복한 상태였는데, 나도 이젠 누리기만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같은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요.”
“아…… 오히려 미술치료를 위해서 미술을 공부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잊고 계셨을 뿐.”
내 말을 곰곰이 곱씹던 김선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맞아요. 저는 계속 저를 치료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 직업이 치료였지만 아픈 과거를 완전히 없었던 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미술치료는 의학 같은 게 아니라서.”
나는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상처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랬더니 김선 스스로도 그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뒤늦게 설명했다.
“학창시절에 일이 있었어요. 지속적으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했죠. 한 학년 위 언니들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 언니들도 그렇고 반 친구들도 그렇고…… 제 눈엔 모두가 악마 같았죠. 당시엔 학교폭력 나쁘다, 나쁘다, 말만 하고 지금만큼 대처가 적극적이지 못했거든요. 또래 친구 한 명 만 있었어도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당시에 제 마음을 잘 알아주는 상담사 한 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이후로도 김선은 학교에서의 상담과 미술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미술치료사로서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미술치료 직종을 신청하셨던데, 왜 굳이 학교에서 그 일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오히려 일반 내담자들 입장에선 외부 상담소가 더 접근이 좋을 텐데……”
“확실히 그렇긴 하죠. 하지만 내담자를 기다리기보다는 상담사가 직접 찾아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희 상담소로 찾아오는 것도 용기일 텐데, 그 용기를 강요한 뒤에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김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꼭 미술치료 센터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강해졌다.
방금 진행한 면접을 통해 김선에 대한 확신도 얻었다.
김선은 학생의 그림을 단지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학생 자체를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의 시작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학생과 그림을 얼마나 성의 있게 봐줄지만 생각해보아도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더군다나 김선이라면 화가로서 학생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기법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기 일쑤였다.
김선은 진솔한 그림들을 유도해본 경험이 많을 테니 그러한 난관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희 학교에 꼭 필요한 화가님이시네요.”
내가 일어나 악수를 건네자 김선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바로 내년 1기 입학생들은 총 300명이었다.
아무리 관심을 기울여 돌봐도 학교폭력의 위험은 계속될 것이었다.
어딜 가나 조상철처럼 사람을 쉽게 물어뜯으려는 사람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이 생기면 생길수록 김선 같은 직원이 필요해졌다.
“두 달 뒤에 입학식이 있을 예정인데, 방금 김선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프로젝트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어요. 바로 출근하셔서 그 프로젝트를 준비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미술치료라니.
가장 특별하면서도 마음 따뜻한 입학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두식 차장도 그렇게 안 봤는데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었다.
상철은 예준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사설 한 편을 작성했다.
심증이 아무리 확실해도 제대로 팩트 체크가 되지 않은 사안으로 보도기사를 낼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용은 당연히 화가 윤예준의 실체에 대한 추측성 기사였다.
제법 설득력 있는 논조로 작성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몇 주째 게시 승인이 나지를 않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용 확인도 안 하고 재깍재깍 게시해줬던 편집부장이 상철의 사설을 두고 아주 민감하게 굴었다.
장두식의 입김 때문이었다.
“야, 임마. 소설 쓰냐? 소설 써?! 왜 굳이 확실하지도 않은 사안으로 윤느님한테 맞서려고 하느냐고!”
독도 프로젝트가 끝난 뒤 FC 내부에서 윤예준에게 붙여준 별명이 윤느님이었다.
인기가 많은 그에게는 어떤 도전도 하지 말라는 뜻에서 붙인 별명이었다.
“전에 이일섭 때도 똑같이 말씀하셨죠! 근데 어떻게 됐어요? 제가 그걸로 이달의 기자상 받았잖아요.”
이일섭 관련해서 기사를 쓰겠다고 했을 때 두식과 편집부장은 상철을 뜯어말렸다.
그래서 팩트로 확인한 윤예준 스승설을 타이틀로 달고 은근슬쩍 내용을 끼워 팔아서 게시가 가능했다.
기사 대충 검토하는 편집부장을 속여넘겨서 말이다.
기사가 난 뒤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 장두식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중에 이일섭의 인정이 있은 후에야 조금 잦아들었다.
이런 식으로 날뛰어서는 안 된다며 자존심을 세우려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상철도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장두식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퇴근한 시각, 상철은 편집부장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부장의 모니터 하단엔 그의 회사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확실한 사안에 왜들 그렇게 답답하게 구는 거야?’
사람들이 연예인 마약이나 병역 기피보다도 더 싫어하는 게 바로 대중 기만이었다.
윤예준이 사실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라는 걸 알면 완전히 난리가 날 거라는 뜻이었다.
바로 부장의 아이디로 로그인해 승인 반려 상태인 자신의 사설을 승인처리로 바꿔두었다.
‘내가 내 얼굴, 내 이름 달고 글 쓰겠다는데 말이야……’
여태 제법 괜찮은 기사들을 많이 써오긴 했어도 결국은 이일섭 기사만 한 특종은 더 건지지 못했다.
분명 두식은 그만한 건 몇 개면 문화부장 확정이라고 했지.
이번 기사는 이일섭 기사보다도 더 큰 건이었다.
이 기사 하나만으로도 바로 진급이 확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화부장 자리가 머지않았다.
상철은 부장의 컴퓨터를 끄고 조용히 회사를 나갔다.
다음 날, FC코리아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예상은 했다.
장두식에게 크게 깨질 준비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장두식은 상철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갔다.
아무도 상철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부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밤늦게 기사를 접한 다른 신문사에서 상철의 사설을 죄다 스크랩해갔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오히려 상철의 사설이 다시 삭제되었다.
<미,감> 때문이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미,감>에서는 상철의 사설이 승인된 지 10분 만에 반박 기사를 게시했고, 여론을 대결 구도로 붙잡아두었다.
예준도 발 빠르게 나서서 자신의 실력이 의심되거든 3월 2일에 있을 YJ 입학식에 참여하라고 맞섰다.
“에이, 뭐야. 이것 때문에 다들 그렇게 쫄아 있는 거예요? 백프로 제 기사가 맞으니까 쫄지 마세요. 어차피 입학식 때 까발려지겠고만.”
그 말을 들은 장두식이 참다못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야. 입학식이 두 달 남았다, 두 달! 니 기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우린 두 달간 여론 폭격 처맞게 생겼는데, 뭐? 쫄지 마? 니 기사만 기사고 다른 기자들 기사는 똥이야?”
“아니 그게……”
“나가! 더 이상 너 같은 폭탄 덩어리 안고는 일 못하겠으니까 나가라고 새끼야! 해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