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외로운 섬 하나 (3)
윤예종에서 근무해줄 선생님을 선발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나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보다는 수많은 예술관을 포용할 수 있는 ‘삶’을 선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을 탈락시키고 있다는 생각만 강해질 뿐이었다.
힘들긴 했어도 걱정은 걱정이라 시간 날 때마다 지원자 이력서를 공유받아 확인하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그때그때 이력서를 전달받는 형식으로 살폈기 때문에 지원자 메일과 기타 협력 오퍼 메일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꼼꼼하게 살펴보던 중 어느 메일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익숙한 태극무늬 정부 마크가 제목 말머리로 붙어 있는 메일이었다.
10.25 독도의 날 기념 ‘내 손 안의 독도’ 캠페인에 협력해달라는 메일이었다.
‘지난번에 뉴스에서 봤던 그 내용이구나.’
독도 관련 한일 다툼은 갈수록 과열되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에서는 물리적인 다툼이 다분히 예상됐기 때문에 평화를 호소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무조건적으로 평화만 외쳤다간 폭력배 앞에 피해자가 될 뿐이었으니.
-이번 캠페인에 윤예준 화가님이 참여해주신다면 화가님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보장해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협력하고 싶으신 아티스트가 있다면 얼마든지 함께 요청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독도는 한국 땅이다’라는 구호만 유지된다면 나의 예술적 시도에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필요한 걸 모두 지원해준다니.
수백억대의 재료를 요구한다면 그들로서도 지원이 힘들겠지만, 그 정도 지원까지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새로운 걸 얼마든지 시도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영토 분쟁 이슈이기도 하니 세계적으로 알릴 예술작품이라는 것.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네.’
이상을 버리고 결국 현실적인 선택을 한 많은 예술가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예술만 해도 배부른 세상이 오지 않는 한 모든 예술가가 행복해질 일은 없었다.
그럼 예술만 해도 배부른 세상을 오게 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살기 좋아진 세상에도 가난은 여전히 있었지.’
1875년부터 프랑스 경제가 악화되었고 보불전쟁 이후엔 상황이 훨씬 심각해졌다.
미술에 매우 관대한 프랑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눈치가 다 보일 정도였다.
당장 직접 두 팔 걷어붙이고 밀가루를 뭉치지 않는 한 빵 한 조각 먹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런 불황을 겪으면서도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나 대신 인상주의를 발전시켜주신 위대한 모네 선생은 불황을 피해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평소에 모네의 그림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가 유독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그가 붓을 꺾어 버릴까 봐 매 순간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틈만 나면 그의 화실을 찾아가 작업 중인 그림을 보며 내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가 내게 팔을 벌리면 부끄러움을 덜어내듯 내 돈을 주저 없이 빌려주었고 오랜 기간 갚지 않아도 한 마디 닦달도 붙이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보다는 조금 못난 수준이었지만.
하루는 게르부아의 동료 화가 폴 뒤랑리엘, 동생 외젠과 함께 모네 모르게 일을 하나 꾸몄다.
불황을 맞아 도무지 팔릴 생각을 않는 모네의 그림을 몰래 사주기로 말이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모네의 자존심이 굉장히 상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들키면 안 됐고, 그의 그림 10점을 모두 500프랑씩 주고 사들였다.
결과적으로 그 뒷공모는 모네에게 들켜버렸는데, 모네는 분해하기는커녕 굉장히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철이긴 할 테지만 지독한 가난을 맛보고 나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시리게 꺾여버렸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함께 일을 꾸린 우리는 모네에게 우리의 선한 의도가 전해진 것으로 여겨 뿌듯해했다.
하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걸 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모네의 그림을 좋아했을 뿐이고, 불황을 맞아 그의 그림을 싸게 사들인 것이었다.
들어보니 모네는 내가 죽은 뒤 그 보답이랍시고 <올랭피아>를 박물관에 소장시켜야 한다는 운동도 했다던데.
좋은 그림을 좋게 봐준 내 당연한 감상에 고마워하는 모네도 모네지만 그 덕에 그가 끝까지 그림을 놓지 않아 준 데에도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어떤 모네는 그림을 포기했겠지.’
전생보다 영향력이 훨씬 큰 지금이라면 가난한 미술가들을 위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답신 버튼을 누르고 캠페인 수락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일이 잘 진행되었을 때 대통령과 독대를 시켜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
정부 측에서는 예준에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답신과 함께 정부 관광앱이라는 어플리케이션 링크를 보내주었다.
한류에 편승해서 외국인들이 독도에 관심을 가지게끔 하기 위한 이전의 시도로써, 참고용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내가 한국 정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플리케이션 위젯 디자인부터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극무늬 정부 마크가 그대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 마크 자체는 굉장히 디자인적으로 훌륭했지만, 아무리 훌륭한들 모든 디자인을 그걸로 통일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준은 YJ로고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정부 관광앱 메인 배너엔 독도 전경과 멋진 붓글씨로 ‘독도’, ‘동해’라고 적혀 있었다.
관광을 위해 한국에 와서 이 어플리케이션을 깔았을 외국인들의 시선은 분명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해서 아직 영토 다툼이 불식되지 못한 거겠지만.
‘음……?’
배너를 클릭해 독도 관련 홍보 프로젝트를 보던 중 홀로그램 소개 영상을 발견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계 기업과의 협업으로 추진된 첨단 전시 프로젝트 현장 영상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알게 된 한 미술가가 떠올랐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이다?’
AI기술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어린 일류 예술가라는 샬롯의 소개가 있었다.
꽤 좋은 인상을 남겼던지 내게 먼저 합작 기회를 희망한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AI예술이라니,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미술이라 나도 관심이 갔던 차였다.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호응이 좋은 것 같네.’
굉장한 기술력만을 바탕으로 진행한 전시회라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아이다라면 그 모든 걸 보완하고 세계인에게 최고의 시각효과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다와 협작하는 방향으로 기획서를 작성해 정부 메일로 전송했다.
기획도 참신하고 한국의 기술력을 동시에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답신이 왔다.
그대로 추진해보라는 뜻이었다.
아마 아이다에게도 연락이 취해졌겠지.
아무리 잘 나가는 그녀라고 해도, 이 윤예준이가 정부 배지를 달고 협력 제안을 해올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었다.
***
다음 날 정부에서 검고 거대한 차량을 보내왔다.
내가 직접 독도에 가봐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승용차처럼 생겼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덩치가 컸고 버스처럼 바퀴 간격이 넓었다.
그래서 운전기사가 안내해준 대로 맨 뒷좌석에 앉으면 전면 유리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전기사는 주행 중 문득 차로 몇 시간을 달린 후 배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들어서 오래 걸리는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결과적으로 독도에 대한 홍보물이 되어야 했다.
독도를 직접 보고 그 아름다움을 한국적으로 그려내는 게 중요했다.
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단 울릉도로 출발했다.
인터넷에서는 잘 표현된 멋진 독도의 모습만 봤다.
한국의 최고 동단에 있다는 설명까지 겹치니 상당히 아름다운 곳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거친 풍랑이 울릉도에도 도착하기 전에 배를 막아섰다.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울릉도에는 도착할 수 있었지만, 독도까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겠다고 했다.
“여기서 며칠 묵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날씨 변수가 가장 많은 섬답네요.”
그렇게 해서 울릉도에 도착한 즉시 숙소로 들어와야만 했다.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니.
전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건가.
숙소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로 내다보이는 바다를 다시 한번 내다보면서 그 정부 관계자의 말에 공감하게 됐다.
바람에 놓게 선 파도가 정박된 배에 부딪혀 어지럽게 부서졌다.
아직 독도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그 풍랑 너머에 독도가 있을 것이었다.
그 독도를 두고 한일 양국이 소리 없이 다투고 있지 않던가.
이 풍경은 그 다툼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전생에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프랑스 남북 전쟁 때 발발한 해전이 딱 이런 날에 벌어졌다.
남군과 북군은 그 전투에서 바다 주도권을 꼭 잡아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바로 동해의 독도처럼.
바다에서의 주도권을 놓치면 전쟁 천재라 불리는 나폴레옹도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지 않았던가.
며칠 뒤 날씨는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며칠간 지속됐던 흐린 날씨가 한순간에 돌변한 것이었다.
머지않은 곳에 있는 독도가 울릉도에서도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윤예준 화가님! 오랜만에 뵙네요!”
독도 선착장에 내리는 순간 누군가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날이 맑아지자마자 출발한 것 같은데도 이미 독도엔 사람이 몇몇 도착해 있었다.
아이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제 제안이 갑작스러워서 당황하셨을 텐데. 이렇게 일찍 와 주셨네요.”
“어우, 아니에요. 저한테 작품할 기회 주신 게 너무 감사하죠.”
아마 포항에서 바로 독도로 출발해온 모양이었다.
그럼 배가 뜰 수 있을 때 바로 배에 올랐다는 뜻인데.
정부 제안서가 도착하자마자 한국으로 왔어야 가능한 속도였다.
갑자기 맑아진 날씨였으니 갑자기 흐려질 수도 있었다.
나와 아이다는 지체할 것 없이 선착장 근처를 배회하며 대화를 나눴다.
멀리 울릉도가 조금 내다보이는 걸 제외하면 독도 근처로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마치 푸른 사막 같았다.
“어떤 작품을 만들지는 생각해보신 게 있나요?”
“아뇨. 이제 막 도착했으니 생각해봐야죠.”
작은 섬일수록 바다와의 조화가 뛰어났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접근해오는 동안 본 독도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독도는 파도가 수천 년간 이리저리 부딪쳐 찌그러뜨려 놓은 암석처럼 생겼다.
바다와의 배치에 집중하며 그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다가 들고 있는 가방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 끝났나 보네. 일단 선착장으로 돌아가 볼까요?”
“네.”
뭐가 끝났다는 거지?
배 출발 시간은 아직 한참 남은 상태였다.
뭔가 알람을 설정해놓은 듯했는데,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선착장에 다 도착할 때쯤 작은 드론 한 대가 선착장 끄트머리에 있는 기계장치 옆으로 내려앉았다.
근처를 감상할 때 하늘을 떠도는 걸 가끔 봤다.
아이다는 드론을 들어 올리더니 날개를 접기 시작했다.
“군에서 띄워놓은 건 줄 알았는데. 아이다 씨 거였군요.”
“네. 저는 그림을 이걸로 그리거든요. 구상이 막 끝났어요.”
아이다는 자신이 발명했다는 드론과 그 기계장치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론이 이 근처를 몇 바퀴 돌며 독도를 촬영하면, 컴퓨터는 그걸 바탕으로 가장 절묘한 구도와 색채를 파악해 스케치를 완성해갔다.
많이 그리면 많이 그릴수록 그 프로그램의 퀄리티가 올라간다는데, 내 상식으로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이 하나의 시스템을 중심으로 지금도 계속 명작들을 분석하고 있어요. 계속 데이터가 쌓이고 있는 거죠. 기대되지 않아요? 이 시스템이 독도를 어떻게 그려줄지!”
아이다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의 기계장치를 내려다봤다.
기계장치는 최종 결과물을 출력하는 프린터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나도 아이다처럼 조금 흥분되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계가 그림을 그려준다니.
데이터가 쌓일수록 퀄리티가 올라간다니.
수학적으로는 상식인지 몰라도 그게 예술에 적용될 리 없었다.
그런데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카메라가 처음 보급됐을 때의 화가들이 이런 감정이었을까?
나는 아이다의 장치가 필름이 회전하는 동작음을 낼 때마다 흠칫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우. 완성됐나 본데요! 한번 볼까요?”
앞서 아이다의 가방에서 들려왔던 알림과 같은 소리가 프린터에서 흘러나왔다.
아이다는 장치 커버를 열고 그림을 확인했다.
“아……!”
그 그림을 확인하자마자 자동으로 깊은 탄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