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26화 (126/241)

126화. 외로운 섬 하나

그는 자신이 박동석 교수라고 했다.

일섭에게 자신을 만났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뭐? 박 교수? 그 양반이 해코지 안 하더냐?!”

일섭이 펄쩍 뛰며 물었다.

이런 것도 좋아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매우 좋아하고는 있었다.

사실 박 교수를 처음 보자마자 내게 반대하는 정통파의 일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인상만 봐서는 조금 애매모호했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고집이 있었다.

일섭이 싫어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박 교수에게는 웬만한 정통파들이 가지고 있는 느긋하고 게으른 인상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인상이라도 유심히 보면 분명 답은 나왔다.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엇을 보아왔는지 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아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무언가를 발견하려 애써왔는지,

아니면 허물어져 가는 건물의 붕괴 조짐을 발견하려 기민하게 감시해왔는지.

박 교수는 후자의 경우였다.

“해코지는 안 했고, 도움을 요청하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도움? 무슨 도움을 요청해?”

늦었다는 정체불명의 말을 남기고 떠나는 박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철 지난 화가로 살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우울해 보였다.

아마 나의 성공을 보고 자신이 퇴장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화가들은 무대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입장도 퇴장도 화가들에겐 없었다.

오직 삶과 죽음뿐이었다.

“도약관에 서양화가들도 몇몇 들어오는 만큼 걸출한 동양화가들이 더 많이 필요해졌는데 혹시 선생님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뭐라더냐?”

“박 교수님을 염두에 둔 뉘앙스로 한 말이어서, 일단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하셨어요.”

이미 교직에 있기도 하고 늦게나마 안목이 트인 김에 자신의 필드에서 새로운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일섭만큼은 아니지만, 동양화 쪽에서 한가락 하던 인물이니 무리였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이번 나의 활동에 감명을 받았다면 나중에 협동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으니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그거 다행이구나.”

“에이. 왜 그러세요? 옛 동료라고 하시던데, 같이 연구하면 좋잖아요?”

“아, 난 싫다.”

일섭이 진저리를 쳤다.

“대신 교직 이수 협력 학교로 YJ미술학교와 도약관을 등록시켜준다고 하셨죠. 웬만하면 이쪽으로 올 수 있게 말이에요.”

“뭐? 박 교수가 나서서 그런 제안을 했단 말이냐?”

“네.”

내게도 조금 의외인 제안이었다.

교직 관련 교육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면 자신의 학생들을 조금 양보하겠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예술계의 산학협력 같은 거였으니까.

그 파격적인 제안이 있었던 만큼 새로운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박 교수의 말에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박 교수로서는 충분히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박 교수 제자들이 대학 입학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줘야겠구나.”

“하하하. 그냥 YJ로 올 걸, 하게 말이죠?”

“그렇지.”

도약관 운영과 예술학교 준비는 아주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일 덕분에 동양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그게 돈이 된다는 인식도 생겼다.

학비도 없으니 부모들은 YJ를 지망하는 자녀를 지지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입학 문의도 폭증했지만, 채용 문의도 못지않았다.

이미 YJ로 합류한 모민수는 입학까지 기한을 정해두고 선발 제도를 점검하고 있었다.

사비를 들여 자신의 지인 강사들을 모아 창의적인 선발 방식에 대해 연일 회의하고 구상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대신 교사 채용에 전념했다.

민수만큼 복잡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선발이라면 선발이었다.

화가로서의 스펙만 보고 정원을 뽑아도 한국 최고 수준의 예술학교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뽑을 화가는 완전히 정해진 거냐?”

“아뇨. 채용안만 일단 하나 세워놓고 계속 고민 중이에요.”

간송 미술관 일이 끝났으니 지원자들이 보내온 자기소개서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전문 화가를 포기하고 생업에만 종사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붓을 완전히 놓고 산 건 아닌지 실력들은 모두 좋았다.

YJ에서 선생으로 다시 시작해 다른 미술과들과 교류하며 조금씩 작품활동을 시작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좋은 기회였기에, 놓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아마 이 지원을 위해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을 텐데…… 마음이 무거웠다.

“저희 부모님이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리셨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겠구나.”

“맞아요.”

아버지는 큐레이터로 전향해 예준을 키웠고, 어머니는 아예 자신의 그림을 바꿔버렸다.

금전이라는 현실적인 장애 요인이 없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터였다.

‘당장 화가들에게 봉급을 많이 주고 학생들에겐 학비를 면제해준다고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될까?’

단순 지원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대신할 수 없었다.

돈 걱정 안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고민들.

그것을 먼저 이해한 뒤 해결해야만 YJ가 제 역할을 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

‘시민 큐레이팅’이라는 프로그램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민제에게 더 좋은 기회였다.

화담에서 큐레이팅할 때는 굉장히 경직된 상태로만 설명에 임했었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 민제가 예준에게 도슨트를 맡겼던 것도 참 용한 일이었다.

예술계는 한편으로 너무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지 않던가.

거기 지레 겁을 먹곤 하던 민제였다.

하지만 시민 큐레이팅에서는 굳이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격이 있는 큐레이팅 기회였으니.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큰 소리로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민제는 흥미진진한 작품 해설을 준비해와 수많은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제갈사월의 작품 큐레이팅이 큰 호응을 얻었다.

민제가 그의 그림에 큰 흥미를 느꼈던 만큼 설명도 흥미롭게 전개된 것이었다.

“일전에 한국에 계실 때 큐레이터였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럼 지금은 그만두신 건가요? 계기가 뭡니까?”

“이번 프로그램에는 어떤 자세로 임하셨나요?”

많은 문화계 언론사에서 이번 전시회에 집중했다.

유명 화가들이 많이 참여하기도 했고, 규모만 놓고 보아도 굉장히 컸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계속 전시회 현장을 보도했다.

매일같이 전시회에 나와 마이크를 잡는 게 시민 큐레이터들이다 보니 스포트라이트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특히나 민제에게 더더욱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연결된 미술, 여럿이 만드는 미래’라는 모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민제는 이곳이 갑이 논하고 을이 박하는 승부의 장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만 하는 발제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

하나의 시각만을 가지고 들어왔던 관람객이 나갈 때는 수많은 시선을 얻은 채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예술작품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거잖아요? 논쟁만 하게 되면…… 논쟁에 이기기 위해 공부를 해올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은 너무 지루하죠.”

“그런 것 치고 본인께서는 공부를 엄청 해오신 것 같던데요?”

기자 한 명이 맞서서 반박하자 인터뷰 현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인기 있는 교양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오는 관람객들마다 민제의 큐레이팅에 지적인 충격을 받았다.

민화 자체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데, 민제는 그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규칙성과 사월의 의도를 능숙하게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게 공감도 되고 말이다.

종종 민담을 차용해 들려주면 어느새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앉아 민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큐레이터 자격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학예연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건가요? 아니면 그림만 그리시다가 큐레이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습니다. 집이 가난했어도 친구에게 미술품을 빌려서라도 그림을 그렸죠. 오랜 시간 턱도 없어 보였던 화가의 꿈을 놓지 못한 채 살았죠. 큐레이터는 그 과정에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림에 대한 미련이 저를 큐레이터로 만든 거예요. 물론 그 일도 즐겁게 했습니다만.”

인터뷰를 위해 모인 기자들과 구경 나온 시민들이 낮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조금 숙연해졌다가도 곧 민제를 뒤늦게 축하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 서 있던 제갈사월도 함께 박수를 쳤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이다.

“아드님이신 윤예준 화가가 굉장히 유명한데, 혹시 아드님의 영향을 받은 건 없으신가요?”

“많이 받았죠. 원래 전 정론에만 집착하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예준이와 그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뒤부터는 많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과 더 즐겁게 대화해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들어준 게 예준이였죠.”

곧 인터뷰가 끝났다.

사월은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인파 틈에 우뚝 선 민제를 가만 내다보았다.

사월도 지금은 꽤 이름을 알린 재미화가였지만, 어렸을 땐 민제처럼 찢어지게 가난했다.

민제의 그 멋진 그림들은 그의 천재성에서 나온 것인 줄 알았다.

사월이 그를 ‘재야의 숨은 고수’라고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천재성을 가지고 어떻게 여태 숨어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민제의 말을 듣고 이젠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제는 오랜 시간 쌓아온 열정을 지금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바로 천재성이라고 하는 건가?’

누구도 봐주지 않는 그림을 몇십 년간 끈질기게 놓지 않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그런 건 보통 열정으론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사월이 가장 잘 알지 않던가.

“인터뷰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방송사 놈들 뒤에서 슬쩍 보니 카메라 엄청 잘 받으시던데요? 동안 외모에다가 키까지 훤칠하셔서.”

“아하하. 과찬이세요. 동안은 화가님이 더 동안이시죠.”

“쯧…… 저는 눈이 너무 작아요. 카메라 앞에 설 만한 인물은 못 되죠. 그래서 그림도 그렇게 못나게 그리는 것 아니겠어요?”

그 말을 들은 민제는 사월의 그림 중 탱화와의 접목을 시도한 작품 하나를 떠올렸다.

무심결에 거기 그려진 사천왕의 면면을 생각했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무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제 작품의 값어치도 몇 배는 오른 것 같아요.”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민들뿐만 아니라 미술연구자들이 민제의 큐레이팅에 주목했다.

고리타분한 미술연구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여러 문화 잡지에서 민제의 설명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시민들 중에서도 소위 ‘아는 척하고 싶은 사람들’은 지인들에게 문화 잡지에서 읽은 그 큐레이팅을 전파할 것이고……

그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사월의 그림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한국 현대 민화 특강 같은 걸 검색하면 민제의 설명과 함께 사월의 그림이 수백 개는 서치되었다.

“그럼 이제 큐레이팅할 기회도 꽤 생기겠는데요? 예정에 없던 일인데 이것 참……”

“일단 또 들어가실 만한 창고형 전시관이 더 있기는 합니다.”

“음? 누가 저를 부르던가요?”

민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 뉴욕에서 진행하는 아모리 위크에서 아모리 쇼와 뉴욕 아트워크를 할 예정이에요. 이번 시민 큐레이터에는 제가 직접 윤 화가님을 추천했지만, 그쪽에서는 먼저 윤 화가님을 원한다고 찔러오더군요.”

“와. 그거참.”

민제는 잠시 환히 웃었다가 곧 멈칫했다.

“......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는 큐레이터 자격이 없습니다. 뉴욕 아트 워크라면 굉장히 저명한 곳일 텐데, 아마 그게 문제가 될 것 같네요.”

“아......”

“제가 전직 큐레이터라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착오가 있었나 봐요. 정말 아쉽네요.”

사월은 민제의 시무룩한 표정을 가만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왜 웃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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