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25화 (125/241)

125화. 한글의 재해석 (4)

황 코디는 저번처럼 간송 미술관에서 만날 수 없겠느냐고 했다.

더 좋은 소식이 있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간송 미술관에 도착했더니, 황 코디는 한 남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셨군요! 이쪽은 100만 ‘퍼플피플’의 총무님이세요.”

“반갑습니다.”

남자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나도 따라 인사한 후 소개했다.

“윤예준입니다. 그런데 퍼플피플이 뭐죠?”

“아. 블랙퍼플 팬클럽의 이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회원 수가 100만 명이라 100만 퍼플피플이라고 부르고 있죠.”

“오, 그렇군요.”

팬 회원이 100만 명이라면 스스로를 블랙퍼플의 팬이라고 생각하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라는 게 혹시……”

이번엔 다시 황 코디가 나섰다.

“이번엔 팬덤 단체복 의뢰입니다.”

팬덤 단체복이라면, 퍼플피플의 단체복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설마 100만 벌을?”

“네, 맞습니다.”

엄청난 숫자였다.

“이번 한복 공연으로 회원이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윤예준 화가님과 간송 미술관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단체복을 의뢰하게 되었어요. 블랙퍼플 멤버들이 입은 옷과 비슷한 디자인을 입고 싶은 열망도 너무 크고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황 코디 말대로 굉장히 좋은 기회였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간송 미술관에서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던가.

‘한글 디자인을 널리 퍼뜨릴 조건이 충분해졌어.’

한글뿐만 아니라 정통 한국화단에서의 입지도 단단히 굳힐 수 있게 되었다.

간송 미술관의 해례본 이벤트를 크게 성공시켰으니까 말이다.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중간에서 기쁘게 박수를 치던 황 코디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이번에도 특별한 요구사항이 있으시겠죠?”

“아, 그거야 물론이죠.”

내가 선심을 쓰듯이 말하자 황 코디는 유쾌하게 웃었다.

“일단 기본 티셔츠 위에 여름용 조끼와 겨울용 두루마기 웃옷을 함께 만드는 거예요.”

단순 숫자로만 치면, 그럼 300만 벌을 만드는 것이었다.

“네. 투명한 걸 이용한 무대의상이었으니 레이어드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요?”

“옷에 Made by YJ라는 문구를 달 것. 그 둘만 지켜지면 돼요.”

황 코디와 퍼플피플 총무는 간단히 의견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바로 계약하죠!”

우리는 바로 휴게 공간으로 이동해 계약서를 완성시켰다.

나와 퍼플피플 사이의 계약이었다.

황코디는 계약 중재만 해주러 온 것이었다.

확정적으로 50만 벌은 기본으로 팔리는 단체티에 수익금 20%가 내 몫이었다.

***

박동석 교수는 피곤한 몸을 옮겨 연구실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예대 학장 치고 이렇게나 학술제 일정이 많은 사람은 박 교수 한 명뿐일 것이었다.

물론 학술제야 예삿일이고, 그를 스트레스받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윤예준이…… 흠잡을 곳이 없어.’

예준이 한글날 기념 이벤트를 담당하게 된 이후로 그 이름을 안 듣는 날이 없었다.

간송 미술관도 예전처럼 한산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성공인 것이었다.

박 교수는 심통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블랙퍼플 파워!”

담당 조교 학생이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연구실로 들어왔다.

“아, 교수님 계셨구나. 죄송합니다.”

“대체 그게 뭔 소리야?”

학부생부터 대학원생까지, 요즘 모두들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퍼플 파워가 어쩌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물어보면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혼비백산해서는 도망치기 바빴다.

듣기 싫은 건 둘째치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말이다.

“교수님 아이돌 잘 모르시죠?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 응원 구호예요.”

“알아. 블랙퍼플. 아이돌 그룹이잖아.”

사실 몰랐지만, 대한동양재단에서 이루어지는 일일성과보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윤예준이 잘해 내고 있다는 칭찬이었다.

그 블랙퍼플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통해서 말이다.

“그게 그 어린애들 노래 가사라는 말이야?”

“네. 지난번에 윤예준 옷 입고 춤춘 뒤로 엄청 떴거든요. 보여드릴까요?”

“아이, 됐어 나는.”

조교는 무시하고 제 휴대폰을 꺼내 블랙퍼플 무대 영상을 보여주었다.

하여튼 간에 요즘 MZ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거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이 아이돌이라느니…… 왜놈들 문화가 들어온 뒤부터는 더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곧 춤추기를 마친 블랙퍼플 멤버 하나가 윤예준의 팬이라고 말했고,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팬덤 티셔츠도 만들었는데 그 옷이 너무 멋져서 팬들뿐만 아니라……”

“아, 글쎄. 안 본다니까 그러네!”

구구절절 설명하는 조교의 말을 딱 끊고 연구실을 박차고 나갔다.

박 교수는 즉시 간송 미술관을 찾았다.

다른 교수들에게는 미리 연락을 돌려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박 교수보다도 먼저 미술관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다들 소식 접하셨습니까? 블랙퍼플인가 블루버블인가 하는 가수랑 팬들에게 옷을 만들어줬다지요?”

“듣다마다요. 이 팬덤 문화라는 게 얼마나 사회의 암적인…… 그것인데. 다른 팬덤이랑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가수한테 본드도 먹이고 그렇잖아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박 교수가 등장하자 그들은 말을 멈췄다.

“역시 박동석 학장님도 오셨군요.”

“네. 바로 가보죠. 관장님은 관장실에 있나요?”

“그렇긴 한데, 지금 들어가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다시 보니 관장실 앞에서부터 미술관 바깥까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 상태였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기 줄을 선 거죠?”

“이번에 아이돌 그룹이 잘되었으니 자신들도 사업을 따내려는 것이겠지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예술적 본질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도(道)가 무너져 아예 흙바닥에 처박혔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도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나서기가 숨어있기보다 못하다고 했고, 반대로 바른 판자 하나가 나머지 굽은 판자 모두를 반듯하게 할 수 있다고 했지요. 이를 어째야겠습니까? 도를 나서서 행해야겠습니까, 숨어서 행해야겠습니까?”

이미 답은 정해졌다.

“갑시다! 관장께서 우리를 안 만나주신다면 이사장님께 가면 되지요!”

그렇게 교수들은 이사장실로 들이닥쳤다.

이사장은 관장의 친형이기도 하니 교수들을 도와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사장실로 들어온 박 교수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버렸다.

“뭐, 뭡니까, 그 해괴한 옷차림은!”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교수들을 본 이사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들어오시기에 불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그 옷 뭡니까?”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이사장은 블랙퍼플 팬클럽의 단체티를 입고 있었다.

이번에 윤예준이 디자인했다는 옷이었다.

“이 옷 아직 못 받으셨나 보군요. 위에 회의실 올라가 보시면 여러 벌 있습니다. 가져가세요.”

“아니, 그걸 왜 입습니까! 볼썽사납게.”

이사장은 깊은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볼썽사나운 티셔츠가 저희 재단을 100년은 먹일 겁니다.”

“돈 좋지요. 하지만 대한동양재단의 지원이 언제 이사장님을 섭섭하게 했습니까? 이대로 정통 동양화를 포기하실 생각이에요?”

“포기가 아니지요. 현대 동양화는 시대적 요구요. 거기 순응하는 게 우리 동양화가들의 역사적 책임이지.”

옆에 앉아 있던 일섭이 끼어들었다.

박 교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시대적 요구라니!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데요? 해례본을 경매에 부쳐서요? 아니면, 애들 지갑 털어먹는 저급 문화에 편승해서요? 대체 무슨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겁니까, 저희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에 윤예준 화가는 다 운으로 성공한 거 아닙니까?”

교수들이 까마귀처럼 언성을 높였다.

“거…… 다들 참 못나셨습니다.”

“예?”

이사장은 본격적으로 교수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이번 윤예준 군의 NFT가 홍콩 TADs 어워드 2023 NFT 부분 최우수상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해례본을 갈가리 찢어 팔았다라…… 알아보니 알파벳 NFT도 있고 중국어, 일본어 NFT도 있더군요. 한글만 그런 게 없었어요. 한국에 그런 걸 시도할 만한 사람이 우리뿐인데 우리가 안 했으니까 그랬겠죠. 상 받는 거야 둘째로 치고, 저는 좀 뒤늦게 의심이 들더군요. 여태 우리가 열심히 한 게 맞는지.”

이사장의 그 말에 교수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냥 잘 나가는 가수 그룹에 옷 좀 가져다 바친 걸로 유세 떤다고 생각하고들 계신가 본데, 아까 팬클럽 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저한테 다 고맙다고 하더군요. 팬클럽 회원이 20만 명이 뛰었다나 뭐라나. 의류 시장에서는 생활한복 디자인이 계속 발매될 거라고 했고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해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까? 젊은이들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이걸 감히 시도나 해본 적 있습니까, 저희가? 엄두는 내봤나요?”

“그건……”

이사장은 목을 가다듬고 정리했다.

“이걸 언제부터 운이라고 불렀습니까? 최고의 시도를 해서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 그걸 우리는 보통 실력이라고 부릅니다.”

“......”

“이 중에 윤예준 군보다 실력 있는 사람만 남고 다 돌아가세요.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교수들은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박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장이 저렇게까지 감싸고 도는 것도 그랬지만, 그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나가시는 김에 관람객들 좀 보시오. 애들 천지요, 애들 천지. 뭐, 키즈카페, 이런 곳도 아니고 간송 미술관에 애들 천지라고.”

돌아 나서는 박 교수와 교수들에게 일섭이 외쳐 말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관람객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여보지 않았다.

그렇게 이사장실을 나온 교수들은 전시장 곳곳을 돌며 작품과 관람객들을 동시에 보았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많았고, 정말 부모님과 함께 찾은 아이들이 도처에 있었다.

평소라면 애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역사 기행 같은 걸 와야만 볼 수 있는 정도였는데 말이다.

“이거 참……”

박 교수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태까지 난 뭘 위해……”

똥고집을 부릴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저 동양화가 서구문화 앞에 풍전등화처럼 놓여 있어 시대의식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그걸 지키는 게 전통의 부흥이라고 확신해왔다.

확신한 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부흥과 퇴보를 혼동해 온 거야……”

구체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모종의 상실감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때였다.

“간송 미술관 관계자분 되시죠?”

윤예준이었다.

그는 박 교수에게 다가서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대한동양재단 박동석이라고 한다.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런 건 아닌데, 딱 봐도 그래 보이셔서요. 그림 보러 오셨어요?”

박 교수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윤예준의 작품이 정리된 곳도 있었고, 기존에 있던 전적과 서화들도 눈에 띄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역시 그림 하난 훌륭하군. 축하한다.”

“아…… 네.”

실제로 윤예준의 어린 모습을 보니 이사장의 말이 가슴 속에서 날카롭게 박 교수를 찔렀다.

어쩌면 간송 미술관은 박 교수의 퇴장과 윤예준의 입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건 일종의 순리처럼도 보였다.

예준은 앞으로 박 교수만큼 더 살 수 있고, 박 교수는 이제 예준만큼밖엔 더 살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박 교수는 축하한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예준은 전시실을 떠나려는 박 교수를 뒤늦게 불렀다.

“잠시만요.”

박 교수는 걸음을 멈추고 예준을 돌아보았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