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한글의 재해석 (3)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들어오니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도 관람객이 꽤 됐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생각해둔 상품을 염두에 두고 매장에 온 쇼퍼처럼 바로 <지조> 앞으로 가 섰다.
공간감을 구현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었다.
실제로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지와 먹만으로도 생동감 넘치는 입체 표현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핵심이었다.
그녀에겐 그 방법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평소에 그림을 많이 보는 사람은 아닌가 보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섭도 그녀가 눈에 띄었는지 말했다.
“일단 차림새가 편안하지가 않잖아? 미술관에 온다고 차려입은 거지. 그리고 특히 저 시선이 저 사람의 성격을 말해주는구나.”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초점을 넓게 잡고 시선을 느긋하게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평면에 표현하는 작품이니 더더욱 그랬다.
<지조>가 입체 미술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한지를 덧대어 그린 작품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는 책을 읽듯 시선을 좁게 잡고 작품의 세부적인 부분들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단기적인 목표가 제때제때 주어지는 바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홀린 듯 <지조>를 보던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기우뚱했다.
제 몸이 기울어지는 걸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다행히 작품 방향으로 넘어지지는 않는 듯했지만……
아니, 사람이 넘어지려는데 다행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이었다.
“위험해요!”
내가 외치자마자 그녀는 넘어지는 방향으로 반대편 발을 옮겨 섰다.
구둣발이었지만 중심 회복이 상당히 빨랐다.
“아, 이런……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여자는 잠에서 깬 표정으로 조금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혹시.”
미술관은 관람객들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 홍보 직원들로 연일 붐볐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도 있고, 나와의 협업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치고 작품을 먼저 보러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언뜻 보니 제안을 위해 관장실 앞에 줄을 서는 모양이었는데, 자리를 옮기면 순서를 빼앗기게 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걸로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조금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작품에 진정으로 빠져 있는 것 같았고, 일섭의 말대로 일상적인 관람객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제안하러 온 것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파급력이나 조건들도 파악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녀와 협업했을 때 작품이 굉장히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건 예상해볼 수 있었다.
“패션 회사…… 쪽에서 나오셨죠?”
“네? 아, 네네! 그런 거죠! 윤예준 화가님 맞으시죠?”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물었다.
명함엔 ‘스타일리스트’라고 적혀 있었지만, 패션 회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
***
“블랙퍼플이라는 아이돌 그룹 알고 계시지요? 그 친구들 코디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예준에게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다.
“블랙퍼플은 뭐고 아이돌은 뭐죠?”
“네?”
뜻밖에 예준을 만나 일이 잘 풀리게 될 줄 알았는데, 세상사 완전히 쉬운 일이란 없었다.
한국에 살면서 블랙퍼플을 모른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아이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엄청 유명한 예술가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황 코디는 간략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텔레비전 보면 노래 부르면서 춤도 추는 가수들 있잖아요? 그런 직업을 대부분 아이돌이라고 불러요.”
“많이 유명한가요?”
“네. 사실 모르신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이요.”
황 코디가 그렇게 말하자 예준은 눈을 반짝였다.
“곧 있으면 한글날이잖아요? 그때 저희 블랙퍼플이 한복 느낌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춰야 하는데, 아까 거기 있는 <지조>라는 그림이 너무 멋지더라구요. 그런 디자인을 착안해서 의상 협업을 할 수 없을지 제안 드리러 왔습니다.”
황 코디는 휴대폰을 꺼내 영상 플랫폼에 ‘블랙퍼플’을 검색했다.
1티어 아이돌인 만큼 천만 대 조회 수를 자랑하는 영상들이 굉장히 많았다.
‘이렇게 정석적인 영업을 하게 될 줄이야. 기분이 조금 새롭네.’
보통의 경우 ‘블랙퍼플 팀에서 왔습니다.’ 정도만 말하면 알아 모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윤예준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은 할 수 있었다.
황 코디 본인도 리틀마네라는 화가의 존재는 알더라도 윤예준의 작품들에 무엇이 있는지는 이번에야 알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관심 분야가 다른 것이었다.
“와. 진짜 유명하긴 하네요. 이 정도면 전 국민이 다 알겠는데요?”
“유명하기야 화가님이 더하죠. 그래도 저희는 저렇게 주기적으로 퍼포먼스가 가능해서, 파급력 면에서는 이점이 확실하거든요?”
“그래 보여요.”
이곳으로 오면서 윤예준에 대한 기사를 많이도 찾아봤다.
이번 프로젝트가 간송 미술관을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점까지 말이다.
그런 윤예준과 간송 미술관이라면 블랙퍼플의 파급력을 크게 반길 거라고 생각했다.
블랙퍼플만 한 아이돌들이 몇몇 더 있어서 선택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좋아요. 같이 해보죠.”
황 코디는 크게 놀랐지만, 동요하는 기색을 숨겼다.
“응? 아까 줄 많이 서 있던데, 관장이랑 이야기해보지 않아도 되겠냐?”
옆에 앉은 이일섭 화가가 놀라서 물었다.
동양화가 중에선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윤예준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화가이기도 했다.
조금 산통을 깨는 참견이기는 했지만 이미 질문은 제기되었다.
황 코디도 내심 윤예준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 사람들은 지금 해례본의 화제성 덕을 보려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보다는 차라리 제 작품성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좋죠. 그리고 이 정도면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일 것 같은데요?”
“맞아요. 가장 유명하죠. 걸그룹 중에서는……”
황 코디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결정권은 윤예준이 가지고 있었고, 일섭도 별로 관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까 그 영상을 보니까 관객들 목소리가 어린 것 같던데. 어린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나요?”
“네. 대부분 10대 팬들이 많죠.”
예준도 10대지만 정작 10대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게 일찍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이 블랙퍼플이라는 가수들의 의상을 한 번 담당하고 나면 10대들의 많은 관심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관객 나이대 이야기에 대충 예준의 생각을 눈치챈 황 코디가 첨언했다.
“이번에 도약관이랑 예술고등학교를 지으셨다고 하셨죠? 10대들에게 인지도를 올리면 그 방면으로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겠네요.”
YJ종합학교 이야기였다.
전방위로 센세이셔널하던데, 요 근래 예준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건 한글 NFT를 제외하면 학교 사업일 것이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지조>를 유심히 보시던데. 그 작품 느낌의 의상을 원하시는 거죠?”
“그럼 좋긴 한데. 가능한가요?”
예준은 대답 대신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는 한지들을 옮겨왔다.
<지조>를 만들 때 사용하려고 얻어다 둔 한지들인 듯했다.
굉장히 얇고 투명한 게 특징이었다.
“지금 한번 보여드릴게요. 코디님이랑 공감대도 형성해볼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예준은 가위를 들고 와 한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죽죽 자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그게 한복을 만들기 위한 재단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옷이 만들어지는 거야? 한지인 데다가 치수 표시도 없는데?’
곧 한복 한 벌이 만들어졌는데,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뉴욕 패션위크에서 드레스 디자인에 참여했다고 했는데, 그 패션쇼가 부럽지 않은 옷이었다.
“지금 풀도 재봉틀도 없어서 접어 만들긴 했는데, 이런 느낌이 될 것 같아요. 저번에 보니까 딱 여섯 겹부터는 완전히 불투명해지더라구요? 최소한 여섯 겹을 이용하면 그야말로 옷으로 만든 <지조>가 되겠죠. 중간중간 먹으로 그림도 그려 넣고.”
황 코디는 예준이 보여주는 옷을 보며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예준의 말대로였다.
<지조>가 옷으로 만들어졌다면 딱 그런 모습일 터였다.
여태까지는 어렴풋하기만 했는데, 역시 원작자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확실히 구체화되었다.
직접 이렇게 만들어주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맞아요! 제가 생각한 패션도 딱 이런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의상 디자인이 바로바로 나오죠?”
“<지조>는 제가 만든 작품인걸요. 옷으로 만들어도 다를 건 없어요..”
예준은 웃으며 임시로 만든 옷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도 이런 느낌으로 만들면 안 되겠네요, 확실히. 춤추기가 어려우니까.”
“네? 아뇨. 딱 저 상태면 돼요. 불편한 거야 저희 애들이 감수해야죠.”
황 코디가 다급해져서 끼어들었다.
“걱정 마세요. 애초에 저걸 그대로 가져다 입을 수도 없고, 바꾸더라도 느낌은 유지할 테니까요. 넘어지셔서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죠……”
급히 만들어도 이 정도 퀄리티였다.
활동성도 확보하고 더 열심히 만든다면 훨씬 뛰어날 것이었다.
지금의 디자인이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지금 바로 계약을……?”
“좋아요.”
황 코디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걸 실제로 꺼내게 될지는 몰랐다.
꺼내고 나니 누군가 회의실로 난입해 계약을 방해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만큼 얼떨떨했던 것이었다.
황 코디와 예준은 하나씩 계약 사항들을 맞추며 서명했다.
일반적인 계약이었고, 특이사항으로는 의상 디자인 저작권이 간송 미술관에 있으며, 회사 측에서는 간송에 저작권료를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 번 입은 의상을 나중에 또 입으면 팬들에게 욕이나 먹을 뿐이었다.
일회성 사용으로 계약하는 게 적합했다.
마지막 서명란까지 마친 예준은 볼펜을 넘겼다.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제가 더 고맙죠”
황 코디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번에 만드시는 옷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그 믿음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끝났다.
이번 음악은행에서 가장 독보적인 한복 의상은 블랙퍼플이 될 것이었다.
핑크걸즈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
예준이 보내준 복장은 음악은행 프로그램 전부터 회사 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지난번 간송 미술관에서 예준이 보여준 건 전통 한복 느낌을 온전히 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내온 건 조금 더 현대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면서도 한복 느낌을 세련되게 유지한 상태였다.
곧 홀로그램 드레스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예준의 디자인은 이미 그걸 실현해놓은 상태였다.
하얀 한복 위에 그림을 겹쳐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 옷을 본 직원들은 음악은행 녹화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 회사 아이돌이 이렇게 멋진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모두 설렘을 감추고 외부 유출을 막느라 고생이었고, 그에 따른 피로는 녹화 당일 기대감의 형태로 폭발했다.
“와! 진짜 개쩐다!”
블랙퍼플이 공연하는 동안의 대기실 분위기란 공연장 분위기와 별반 차이 없었다.
탄성 소리, 박수 소리 무엇 하나 공연 내내 멈출 줄을 몰랐다.
투명한 옷 너머로 파고드는 조명도 옷의 일부가 되었다.
조명에 따라 옷은 노랗게, 붉게 빛났다.
큰 기대를 받는 팀이었던 만큼 가장 마지막 공연 순서였고, 즉시 앨범판매, 음원 등의 점수를 합산해 1위 그룹이 결정되었다.
1위는 예외 없이 블랙퍼플이었다.
1위 소감을 마이크를 잡은 리더 ‘크림’은 조금 흥분한 모습으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음악은행 관계자 여러분 너무 고맙고, 매니저 코디 언니 오빠들 너무 고맙고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진 뒤 ‘윤예준’의 이름을 언급했다.
“윤예준 화가님, 평소에 너무 팬이었는데 옷 만들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다음에 전시 계획 있으시면 꼭 보러 갈게요!”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파워풀한 춤을 추는 블랙퍼플이 무대에서 입은 옷이었다.
디자인이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활동성도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특히나 팬덤에서 연일 윤예준을 신격화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생활한복 유행이 생겼는데, 어느 대학가를 가든 생활한복을 입은 학생들과 인플루언서로 가득했다.
황 코디는 신이 나서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아, 전화 받으시는군요! 소식 다 잘 접하고 계시죠?”
수화기 너머에서 예준이 웃었다.
-네. 이젠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겠더라구요. 가수분들이 춤을 너무 잘 추셔서.
“저희 회사에서 편집해서 올리는 영상을 거의 전 세계인들이 다 봐요. 영어부터 러시아어, 불어, 일어 등등…… 한국에서도 이렇게 유명한데 한글 댓글 찾기가 어렵다니까요?”
블랙퍼플이 여태까지 해왔던 활동들 중 가장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황 코디님이 때마침 저를 잘 찾아와주셔서요. 이렇게 시너지가 좋을 줄이야.
찾아간 사람은 많았다.
그중 황 코디를 골라준 예준의 결정이 가장 유효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아직 끝이 아니에요.”
-뭐가 더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