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23화 (123/241)

123화. 한글의 재해석 (2)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파리에 있는 나의 아틀리에였다.

그것도 한참 우키요에에 빠져 있던 당시의 아틀리에.

나처럼 우키요에에 빠진 동료들의 작품엔 일본식 그림이 그려진 부채가 소품으로 자주 등장했다.

파도나 벚꽃 등이 대표적인 우키요에 부채의 소재가 되었다.

동양에 대한 신비감과 겹쳐 그 강렬한 색채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파리의 아틀리에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저 부채는 뭔가 달라.’

대부분 먹으로만 그려졌다는 데서 오는 색채의 차이는 처음 한국화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집중하고 있는 건 그 회화법 차이가 아니었다.

바로 그림이 그려진 부채의 부챗살이었다.

‘울퉁불퉁한 부채의 부챗살이 산맥의 입체감을 실제로 살려내고 있어.’

작품 설명에는 <금강산>이라도 적혀 있었다.

부챗살의 굴곡에 맞춰 금강산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그려둔 상태였다.

나는 <금강산>이 겹겹이 겹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정말로 접어볼 수는 없었으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는데, 어차피 머릿속으로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부채라는 물체의 특성을 잘 활용했어.’

금강산 그림은 접어도 전체가 충분히 상상되었다.

접었을 때 드러나는 부분들에 금강산 흐름의 핵심을 적절히 그려두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부채 그림들이 부챗살 모양의 캔버스에 단순히 그림을 그려둔 데에 그쳤다면, 이 <금강산>을 포함한 간송 미술관엔 ‘부채예술’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뿐이었다.

‘역시. 내게 아이디어를 주는군.’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즉시 다시 회의실로 올라갔다.

입체감을 살리는 또 하나의 방식.

떠오른 이상 당장 시도해보아야만 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유명 여자 걸그룹 ‘블랙퍼플’의 전담 코디로 있는 황 코디는 방송사의 갑질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게 되었다.

‘뭐? 한글날에 맞춰서 한복 컨셉으로 무대를 꾸며달라고?’

무슨 명절도 아니고.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쪽에서는 한 달 전에 알려주기도 했고 필수도 아니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의상 컨셉을 바꾸는 데에 한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필수가 아니라고 해서 기존 기획대로 갔다가 다른 팀들이 다 한복으로 입고 나와버리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무개념 그룹에 무개념 코디라고 입방아에 오를 게 뻔했다.

사람들이 기획자 사정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와. NFT를 80억에 팔았대요.”

블랙퍼플 팀장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잘된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한숨만 더 깊어졌다.

세간에 좋은 디자이너는 많지만, 우리 회사엔 없다.

특히나 의상디자이너 중엔.

특히, 특히나 한복 디자이너 중엔 더더욱 말이다.

“옷 해줄 수 있는 디자이너 아니면 말도 마세요. 가뜩이나 심란한데.”

“음. 패션 디자이너는 아니긴 하죠.”

“그런데 누군데요?”

팀장은 감탄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윤예준이요.”

“윤예준?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느 프로에 나와요?”

“어느 프로라니? 이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방송엘 나와요? 리틀마네 모르세요?”

아, 리틀마네.

일전에 유명 영화에 참여한 것으로 한참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동양화로도 유명했고, 아무튼 그림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화가였다.

“아, 그 윤예준이요? 뭘 그렸는데요?”

“와서 봐봐요.”

황 코디는 팀장 옆에 앉아 그의 휴대폰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화면엔 NFT 작품을 80억에 팔았다는 기사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림 공장 같아. 이 작품들이 다 며칠 만에 완성됐대요.”

해례본 NFT는 언해본의 서문과 해례본의 자모 폰트를 그대로 따다가 옮긴 작품이라고 했다.

“언해본 서문이란 게 뭐예요?”

“왜 그 있잖아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하는 그거.”

어떤 노래 구절보다도 유명한 문장들이었다.

“해례본에 딱 저 디자인으로 들어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저걸 NFT로 시도할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한 거죠. 이 28자에 달린 해례만 몇 줄이고 나온 문학작품만 몇 권이겠어요? 이 단순해 보이는 작품에 그게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애국심이 불타오르지 않으세요?”

확실히 다양한 시도를 해본 윤예준이니만큼 해례본을 표현하기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아낸 것일 터였다.

하지만 황 코디는 남의 성과에 침 흘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기획이라면 반년 뒤 콘서트 의상 주문까지 다 해놓은 황 코디였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그녀의 기획이 음악 프로 갑질 때문에 뒤집어질 판국이었다.

‘망할 음악은행 녀석들. 누가 보면 내가 일을 대충하는 줄 알 거 아니야?’

물론 한글날이라면 뭔가 변수가 뛰어들 여지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그래도 한글날에 한복 무대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

디자이너 섭외나 마저 하러 돌아서려는데, 팀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내리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사람 패션 디자인도 했었네.”

“정말요?”

“네. 한국에서는 그리 시끌벅적하지는 않았는데 뉴스 기사 좀 찾아보면 금방 나와요. 뉴욕 패션위크에서 유명 디자이너랑 협업했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렇지.

패션 디자인이 얼마나 매력적인 예술인데.

윤예준이 눈독을 들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혹시 한복?”

“한복은 아니죠. 미국에서 한 패션쇼인데.”

그래도 일단 옷은 만들 줄 안다는 뜻이었다.

황 코디는 아예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윤예준을 검색했다.

80억짜리 NFT는 물론이고 새로운 한글 디자인과 한국화들에 대한 기사들도 많이 게시돼 있었다.

“NFT만 한 게 아닌가 보네요?”

“NFT만 했으면 공장이라고는 안 불렀겠죠. 기사 사진에 작품 사진 많이 실려 있으니까 한번 보세요.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던데. 전위화가는 전통화를 하더라도 충격이라니깐.”

NFT는 판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은 간송 미술관에 기증한다는 소식이 메인 이슈였다.

그중 황 코디는 특수 순저지로 그렸다는 난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조>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었다.

“와, 이거……”

굉장히 얇아서 속이 다 비치는 한지에 난을 겹겹이 그렸다.

중간중간 한글 글귀가 적혀 있기도 했다.

여러 겹의 한지로 표현했기 때문인지 입체적인 데다가 공간감도 잘 느껴졌다.

‘저걸 한글날 의상에 활용한다면……’

며칠간 죽상으로 일과를 보내던 황 코디는 드디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디자인 콜라보하려면 윤예준 화가에게 전화해야겠죠?”

“그야 그렇죠. 그런데 기사에 쓰여 있잖아요? 간송 미술관에 다 기증됐다고. 기증품이랑 콜라보라…… 될지 모르겠네요.”

황 코디는 김이 팍 새버렸다.

하지만 입체 난 그림이 첨부된 기사 페이지는 차마 끄지 못했다.

***

NFT 한 글자씩 총 80억 원 이상이라면, 해례본 디자인에 대한 값이 80억이라는 뜻이었다.

한국 NFT 사이트에서 진행한 데다가 작품을 굉장히 많이 올려 가치를 쪼개놓은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큰 성공이었다.

“이, 이럴 수가! NFT라는 게 수익이 이렇게나 많이 나는 거였나요?”

관장은 얼떨떨해서 선뜻 기뻐하지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도 했다.

물론 긍정적인 충격이었다.

NFT를 팔고 난 수익금 80억 중 3.5%에 해당하는 금액(2억8천만 원)은 내 디자인 의뢰비로 떨어졌다.

나머지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간송 미술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어차피 돈을 벌 생각으로 맡은 일도 아니었고, 이벤트의 취지는 간송 미술관을 부흥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작품 사진이 인터넷 기사로 보도되어서 오히려 간송 미술관의 관람객이 늘어났다.

원본 디자인 가치는 NFT 작품에 쏟아냈으니 다른 작품들은 재해석에 매진했다.

부채에서 얻은 입체 디자인 아이디어를 살려 한글 자모의 굴곡과 곡선 원근을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비슷한 모양을 가진 사물로 변형시켰다.

그중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로고용으로 디자인한 한글 폰트였다.

폰트 이름은 ‘나랏말싸미’로 했다.

단순 다운로드는 다른 폰트와 비슷한 가격을 내면 가능했지만, 상업적 이용을 원할 때는 따로 저작권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등록해두었다.

지난번 발리와 함께 갔던 로고 어워드의 ‘롬 하노프’도 자신의 SNS에 그 폰트에 대한 호평을 게시해주어 해외에서도 화제였다.

‘ㅑ’를 ‘3’ 모양으로, ‘ㅅ’을 ‘/’모양으로 표현하는 등 한국어 사용자가 아니면 자모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회화적인 변형을 가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영어권에서의 극찬이 조금 의외였지만, 한글의 미적인 장점을 잘 표현하기 위해 한 시도였던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나의 그림 중 하나를 들여다보던 일섭이 말했다.

<의>라는 제목을 붙여둔 작품이었다.

수평의 바닷물과 수직의 절벽 사이에 뜬 태양이 조사 ‘의’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다른 작품들도 다양한 작풍을 활용해 그런 식으로 그렸다.

일섭은 처음엔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림을 감상하러 온 다른 방문객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적군을 함께 상대할 천군만마를 보듯 했다.

내 작품의 예술성이 반대파 교수들을 상대할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꽤 성공한 편이죠?”

“그냥 성공했다 뿐이냐? 교수들은 이미 놀라 자빠져서 병원에 갔을 거다.”

일섭과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일단 작품성으로는 아쉬운 소리 들을 일은 없을 듯했다.

남은 건 대중적인 성공이었다.

국민 5천만 명 중 4999만 명이 박수를 보내준다면, 나머지 1만 명의 박수를 받지 못했다고 꼬투리를 잡을 터였다.

남은 전투는 홍보뿐이었다.

***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미치고 펄쩍 뛸 정도로 답답해진 황 코디는 아예 간송 미술관으로 찾아와보았다.

‘어떻게 좀 잘 설득하면 콜라보해 줄지도 몰라.’

기증받은 물건을 연예계와 콜라보할 수 없다는 법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도.

물론 기증한 사람의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윤예준 허락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승인을 받아오라고 해도 냉큼 받아와야지.’

물론 과장이었지만 황 코디는 지금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성북구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미술관 치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왜 전화 연결이 어려웠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윤예준 작품들 때문에 방문객이 펄쩍 뛴 것이었다.

‘미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가 보네?’

황 코디는 은근히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며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윤예준의 디자인을 따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설렜던 황 코디였다.

하지만 거기서 의외의 얼굴들을 보고는 또 김이 팍 새버렸다.

“어잇! 거기 줄 서요, 줄 서!”

경쟁 기획사 직원 하나가 외쳤다.

황 코디가 그를 알아보자마자 그도 황 코디를 알아보고 즉시 견제하는 거였다.

딱 봐도 음악은행 한복 디자인을 따내러 온 거겠지.

“거긴 이미 무대의상 디자인 끝났다고 했잖아요?”

“더 좋은 콜라보가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죠. 아무튼 뒤로, 뒤로!”

줄은 입구서부터 관장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회사 기획팀 50군데에서는 와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대기해왔는지 모르겠지만 행동력 하나만큼은 한 수 접어줘야 했다.

오전 일정을 조금 마무리한 즉시 달려온 거였는데도 이만한 인파라니 말이다.

“예, 예. 거 알겠습니다.”

황 코디는 비아냥거리며 그냥 전시실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와서 줄을 서더라도 관장실 문이 무조건 열려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저쪽 기획사에서 밀어주는 걸그룹 ‘핑크걸즈’보다는 우리 블랙퍼플이 더 유명하니……

조바심내지 않아도 됐다.

‘온 김에 그 난 그림이나 보고 가야겠다.’

난 그림은 지하 전시실에 있었다.

크고 얇은 한지 여러 점을 천장에 매달아 놓은 작품이라고 했으니 따로 공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와. 진짜 어떻게 이런 생각을……’

실제로 본 작품은 훨씬 대단했다.

종이는 컸지만 난 그림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치 험준한 산을 거닐다 발이 닿지 않는 가까운 곳에 핀 꽃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 겹겹이 겹쳐져 흐릿한 한지의 여백들은 두꺼운 눈보라처럼 공간을 채웠다.

‘가상 현실에 들어온 것 같아.’

멀리 작게 핀 난을 보다가 문득 중심을 잃었고, 그렇게 넘어지려는 순간 한 아이가 외쳤다.

“위험해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발을 지면에 단단히 붙였다.

3D 영화를 보아도 이렇게 정신을 놓지는 않는데.

실제 공간이 주는 감각은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아이를 돌아보았다.

황 코디는 놀라는 즉시 가슴이 끓어올랐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윤예준과 이일섭이었던 것이다.

‘관장실이 아니라 여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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