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종합예술 (2)
미국에 혼자 남은 민제는 시민 큐레이터 전시회 준비에 모든 시간을 쏟았다.
그곳에 전시되기로 한 모든 그림들을 철저히 조사해 평론을 적어도 다섯 편씩은 읽었다.
그동안 숙소 책상엔 민제의 필기가 1M는 쌓이게 되었다.
전시회 당일이 되었다.
오퍼에 적혀 있는 대로 뉴욕 혁신파크에 위치한 창고형 미술관으로 향했다.
작품 자체만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은 깔끔하고 단출하게 구성되었다.
‘실제로 보니 정말 대단하네.’
자료로만 보아왔던 작품들이었다.
일반적인 회화 작품들도 많았지만, 장난감 블럭으로 시도한 것들, 그리고 철재로 만든 나무형 조형물까지.
굉장히 큰 화제를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셨어요? 윤민제 화가님.”
민제의 또래로 보이는 한 한국인 남성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제갈사월 화가님?”
“네, 맞아요.”
그가 어떻게 이곳의 관계자일 수 있었는지 처음엔 몰랐지만, 큐레이팅을 준비하는 동안 알게 되었다.
그도 여기 작품을 전시하게 된 것이었다.
“<이상향을 찾아서> 때부터 팬이었는데. 왜 그동안 작품 안 내셨어요? 한참 기다려도 소식이 안 들리기에 전향하셨나 했네요. 데이비스 이스테이트에 작품을 전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놀랐어요.”
“하하…… 그림 그릴 시간이 잘 안 나더라구요. 이번 작품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사월은 민제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민제의 팬이라는 말은 사실인지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엔 사월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다.
“제 작품은 꼭 윤민제 화가님께서 큐레이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오! 저야 영광이죠.”
민제는 사월의 그림을 하나씩 보았다.
창고형 미술관이기 때문에 사람들 동선을 정확히 체크할 수는 없겠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습관을 생각해본다면 민제가 생각한 그대로의 작품 배치였다.
“제가 처음에 현대 동양화에 빠진 이유가 제갈사월 님 작품에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재미가 있네요.”
“아, 그런가요? 어떤 면에서요?”
“동양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만 있다면 작품을 분석하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어요. 모두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단, 아는 만큼만 보이죠. 그게 최대 장점이에요.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게 보인다는 거. 동양화에 정통한 사람도 계속 탐구하게 만들거든요. 깊이가 무한해요.”
이어지는 민제의 설명을 모두 들은 사월은 머리를 감싸고 탄식했다.
“오, 이런. 정말 감동적이네요. 재야의 고수에게 이런 호평을 받다니.”
사월은 작품을 많이 발표해본 프로 화가였지만 민제를 자신보다 더 높게 쳐주고 있었다.
민제는 이제 단독 작품 두 개를 발표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재야의 고수라니. 과찬이세요.”
“아니. 정말입니다. 현대 동양화로 고평가받은 화가가 얼마나 되겠어요? 저는 미국에서는 조금 성공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재미화가로서 꼭 성공해 제 화풍이 옳다는 걸 동양화단에 증명하는 게 목표예요.”
사월은 자신의 작품을 새삼 돌아보며 덧붙였다.
“해주신 말씀들 중 제게 가장 뜻깊은 평가는 모두를 비평가로 만들어준다는 점이었어요. 비평은 문화를 생산하고 거기 권위를 부여하는 예술 활동이잖아요? 그러한 재미를 비평의 본고장인 서양에서 선사할 수 있다면, 제 목표의 첫 단계를 굉장히 성공적으로 이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사명감 있으시군요.”
민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동양화, 특히 민화를 통해서는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대중적 인기를 고려했다면 가장 먼저 제외해야 할 장르가 민화였다.
하지만 사월은 민화의 매력을 놓치지 않고도 대중성, 예술성 모두를 확보하려 고민해온 것이었다.
“이번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민화라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장르인지 시민분들께 알려주세요. <사선>을 그려낸 윤 화가님의 시선이라면 어떤 큐레이팅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잘 선별할 수 있으실 거예요.”
윤 화가.
여태 예준을 부를 때만 사용되어온 호칭이었다.
‘예준이가 그랬지. 광고 같은 걸 해서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그러나 이번 시민 큐레이터 전시회는 민제의 무대였다.
사월의 뜻대로 민화의 즐거움을 알림으로써 동양화의 지반을 마련할 기회.
그리고 민제 자신의 그림에 대해 미리 어필해 둘 수 있는 기회였다.
***
그렇게 젊은 동양화가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전방위로 애쓰고 있을 때.
동양화의 거목들은 한국 간송 미술관 회의실에 모여 앉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바로 미술관의 수익과 운영에 대한 논의 때문이었다.
간송 미술관 관장과 대한동양재단의 재단장, 이제는 이일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수경 화백, 그리고 각 대학 교수들까지.
재단 기금을 과감하게 할애해 간송 미술관을 운영해왔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였다.
“이 일을 어떻게 타개해야겠습니까? 잘못하면 국보라도 팔아넘겨야 할 판입니다.”
“국보를 팔다니! 그게 관장이 할 만한 경거망동이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말이. 오죽 답답하면 그렇겠습니까?”
일섭은 그렇게 호통을 쳤지만서도 더는 관장을 몰아세우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국보는 고사하고 아예 미술관 폐쇄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곧 설날인데, 거기에 맞춰서 뭔가 이벤트를 진행하는 건 어떻습니까들?”
듣고 있던 박동석 교수가 제안했다.
그는 한국대학교 동양화과 학과장 교수로서 젊은이들과 교류가 가장 잦은 인물이었다.
물론 보수적이고 괴팍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듯했지만, 그 이점은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떤 이벤트를 진행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생각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흐음……”
일섭이 캐묻자 박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이벤트 내용까지는 생각해두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벤트 아이디어는 좋습니다. 이벤트 내용은 지금부터 고민해보면 되잖습니까?”
“맞아요.”
다른 교수들이 지지하고 들었다.
“옳거니! 지금 미술관 초입에 걸어둔 훈민정음 해례본을 활용하면 되겠습니다!”
관장이 무릎을 치며 제안했다.
해례본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에서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귀중한 문화재였으니 화제성은 톡톡할 것이었다.
“그거 좋네요. 해례본에 나오는 문장들도 디자인을 살려서 상품화하고, 전면 인쇄를 통해 기념용 가품도 만들고. 솔직히 조선시대식 판형은 고전미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고전의 미를 보여줍시다. 여기 이수경 화백도 계시니 작품성과 화제성 모두를 얻을 수 있어요.”
박 교수가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일섭이 반대했다.
“여기 이수경 화백이 어디 있단 말요? 그는 죽었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수경이 죽다니. 여기 멀쩡히 살아 계시는구만.”
“글쎄 죽었다니까.”
일섭이 박동석의 사소한 한 마디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이수경으로 활동하는 동안 정통 동양화 작품을 내도록 압박한 것이 바로 박동석을 필두로 한 교수들이었다.
그들이 대학가 교수직이란 교수직은 꽉 잡고 있어 현대 동양화를 시도하는 화가들의 입지를 좁혀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목에 기름칠한 채 이젠 대한동양재단에서도 거들먹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일섭으로서의 활동에 태클을 걸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었다.
“화백께선 이 일을 맡아서 진행할 뜻이 없다는 걸로 들립니다. 그럼 적임자로 누가 좋겠습니까?’
박동석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야 물론 윤예준 화가님이시지. 지금 한국에 들어와 계시기도 하고. 만약 그분께서 안 하시겠다면 나, 이일섭이 해야 할 것이고.”
“윤예준 화가요? 그분은 동양화가가 아니잖습니까?”
교수들이 웅성거렸다.
그러자 일섭이 발끈 화를 냈다.
“동양화가가 아니라니? 그럼 이 중에 동양화가 자격증 가지고 있는 사람 있소? 나는 없는데.”
“그 뜻이 아니잖습니까?”
“애초에 정통에 기준이란 게 있소? 자신들 마음에 들면 정통이고 아니면 이단 취급이지. 틈만 나면 동양화가라는 말을 그렇게 특권처럼 사용하시는데, 그거 별로 좋은 태도 아니오.”
마이크를 잡은 일섭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윤예준 화가님께서는 모든 동양화가들 중에서 외국인들에게도 동양화의 매력을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님이시오.”
예준은 한국인 화가 중 현재 가장 유명하고 로고 상도 받았다.
특히 그의 첫 작품 <환생>은 얼마간 동양화라는 키워드를 언론에 떠들썩하게 노출시킨 문제작이었고, 한국 수채화의 격을 높인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그런 예준이라면 해례본의 내용과 옛 한글의 감각을 잘 살린 디자인을 해낼 수 있다.
이상이 예준을 추천하는 일섭의 근거였다.
“제 식구 감싸는 건 화백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그려.”
“뭐요?”
“동양화로서는 윤예준의 스승이기도 하시고, 최근엔 예술학교도 함께 진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엔 박 교수가 나섰다.
일섭도 박 교수에게 불만이 꽤 많은 모양이었지만, 그건 박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박 교수와 일섭은 박 교수의 아버지인 ‘박노규’의 제자로서 오랜 연을 쌓아왔다.
아들인 자신이 아니라 일섭이 정통 동양화가 타이틀을 가져간 건 그냥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일섭의 실력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통 거목의 역할까지 뛰어났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박노규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분명 달랐을 것이었다.
적어도 가명을 써서 호시탐탐 정통 화단을 탈출할 생각만 해오진 않았을 것이었다.
“윤예준 화가님의 최근 작품 <아마란스>를 보셨습니까?”
“<아마란스>? 그건 미국에서 며칠 만에 팔려버린 설치 예술이잖소.”
박 교수가 말했다.
“거기 마네의 붓이 활용된 것 아십니까? 그렇게 비싸고 귀중한 걸 미술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게 저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장승업의 작품에 풀떼기를 덧그린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해례본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습니까?”
예술학교야 예준과 일섭이 함께 기획하는 일이니 박 교수로서는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었지만……
동양화관에 서양화가들을 선생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는 이미 교수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외국에서 오래 활동하더니 완전히 서양화에 경도되어서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잊은 거였다.
일섭이 한 번 했던 배신을 예준이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데에 박 교수는 큰 분노를 느꼈다.
적어도 박 교수의 제자들은 정통 동양화가로서의 암담한 여정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지 않던가.
“설치 예술 작품인데, 실제로 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막말하는 거 아니오. 들어보니 붓은 하나도 훼손하지 않았다던데.”
“실제로 보지 않은 건 화백님도 마찬가지시죠. 비판할 수 없다면 비호할 수도 없는 사안입니다.”
“자기가 먼저 이야기 꺼내놓고……”
둘의 다툼을 가만 보고 있던 관장이 나섰다.
“두 분 그만하시지요. 그러니까 이일섭 화백님이 맡으시냐, 아니면 윤예준 화백님이 맡으시냐. 지금 그게 문제 아닙니까?”
“맞습니다.”
박교수와 일섭이 동시에 동의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이일섭 화백이란 정통 동양화 교수들의 입김에 폭삭 젖은 이수경이겠지만 말이다.
“저희 간송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인 만큼 둘 중 누구한테 맡길지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누가 하는 게 옳다고 보시오?”
일섭과 박 교수가 동시에 관장을 보았다.
관장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