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트밸리를 향한 첫걸음
새롭게 설립한 재단 이름은 ‘Y.J’로 하기로 했다.
재단을 설립하는 데에 필요한 일반적인 절차를 도와준 존은 많은 사람들이 그 사업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였다고 했다.
존의 자선사업을 생각하면 그가 직접 얼굴도장을 찍은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었다.
그렇게 Y.J 재단에 이번 수익금을 입금한 뒤 스테이트 하우스에서 선정해준 미들타운 부지로 향했다.
지도로는 자주 보았지만, 막상 실제로 와보니 생각보다 넓고, 생각보다 황량했다.
드림캐쳐에서 일을 할 때만 해도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지만 그 정도 크기의 아트밸리가 들어오면 주에서 자체적으로 도로도 놓아드릴 겁니다.”
함께 온 주의원이 말했다.
황량한 거야 문제되지 않았다.
애초에 황량하지 않았다면 선정하지 않았을 테니.
주의원은 자신의 비서와 함께 지적도와 실측을 비교하며 부지의 경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렇게 차량이 바닷가 쪽으로 빠질 때쯤 한 기차역을 발견했다.
허름한 걸로 보아 여태 보아왔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곳인 듯했다.
“저 기차역은 뭔가요?”
“아. 선로를 노스킹스타운 쪽으로 변경하면서 지금은 버려진 기차역입니다. 이곳 유동량이 많지는 않아서요. 보시다시피.”
새로 아트밸리를 들이면 그곳에 기차역을 들여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재건까지 그 부분을 비워둘 수도 없었다.
철거하든 어쩌든 해야 할 텐데.
“부지를 사면 저 건물도 제 게 되는 건가요?”
“주 소유의 건물이니 철거 비용은 지원해야 합니다. 그 밖의 다른 건물들도 소유 관계를 파악해서 철거 허가 절차를 진행 중이고요.”
찰리가 나서서 철거하지 말라고 막아설 리도 없었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였다.
물론, 나도 철거할 생각은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도 저런 폐기차역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곳이랬지.’
기차역스러운 외관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 뒤로 여러 현대적인 미술관들을 많이 방문해보았지만, 그래도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의 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뭐니 뭐니 해도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것.
‘부지 중 RISA대학교와도 가장 가까우니 미술관으로 적합해. 그럼 그곳 학생들도 이용할 수 있겠지. RISA미술관에는 없는 작품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
나는 주의원과 함께 기차역 곳곳을 돌아보며 기본적인 것들을 검토했다.
어떻게 리모델링해야 미술관이 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런데 건설사는 정하셨습니까? 이 정도 대규모 건설 사업이라면 마찬가지로 대기업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희가 그쪽도 연결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의원이 생색을 내었다.
내가 스스로 진행하는 개인 사업에 주의원이 이렇게 수행까지 해주고 건축사까지 소개를 시켜 준다니.
굉장히 큰 배려였다.
‘하지만 부지 매입과 안내만으로도 충분해.’
현재는 한국에서 윤예준예술종합학교를 짓고 있었다.
건축가를 몇 명 더 보내 달라고 하면 흔쾌히 그러겠지만, 그럼 총력을 쏟기는 어려울 터였다.
또 현재 본인과 함께하는 작업이 아니면 감각건축은 의미 없었다.
잠시 연이 되었던 샐리 스털링도 윤예준예술종합학교에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런 과감한 시도도 스털링으로서는 불모지인 한국에서 진행하는 건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였다.
갑자기 미국으로 와달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건축가가 한 명 더 있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명함을 주고받았던,
스털링 건축사무소의 CEO, 제임스 스털링 말이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저장된 제임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몇 번 들린 뒤 제임스는 전화를 받았다.
-아, 윤예준 화가님 아니십니까?
“네, 맞아요. 직접 전화해도 전화를 받아주시네요?”
-물론이죠. 그런 자리에서 설마 사업용 명함을 드렸겠습니까? 이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무조건 받습니다.
제임스는 그가 알고 있는 나의 근황에 대해 언급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옐로우 카드> 가품 사건과 크리스티 경매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하지만 건축사 CEO인 제임스에게 가장 재미있는 근황은 당연히 아트밸리 조성 사업일 것이었다.
-솔직히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건축 사업이면 건축사를 계약해야 할 텐데, 미국에서 가장 크고 실력 있는 저희에게 연락해주시지 않을까 하고요. 물론 다른 일로 연락 주신 것일 수도 있지만요.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으니 몇 가지쯤은 물어볼 수 있을 것이었다.
“네, 구겐하임에서 뵙기도 했고…… 그런데 굉장히 거대한 빌딩을 짓는 것도 아니라 의뢰비가 크지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제임스는 스털링 소속 건축가만 무려 2500명이고, 그들 모두가 완성된 베테랑이라고 했다.
물론 한 건이라도 더 비싼 건축 건을 진행하려 노력해야겠지만, 스털링에서도 선호 건축 건은 충분히 고려한다고.
그러니까 돈만 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 생각이더라도 조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계산기와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당장 몇 푼 더 벌 것이냐, 아니면 조금 수익을 낮추고 미국 내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쏟을 것이냐. 제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업가라도 후자를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이미지는 백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상품이었다.
나와 함께하는 사업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아트밸리에 들어갈 건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재단 본부 건물과 미술관 건물 먼저 진행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확인해보죠. 저희에게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로써 스털링과는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계신 격이군요.
전화를 끊은 뒤 내가 설계한 것들을 메일로 전송해주었다.
***
찰리는 평생의 정치 인생을 주민이 행복한 로드아일랜드를 위해 일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요즘은 되려 주지사가 행복한 로드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풍파가 없으니 일할 만하구나.’
아트밸리를 위한 제반 시설 보수나 착공이 완료되는 시점에 인근에 자리 잡게 될 상가의 권리 중재까지.
일만 두고 보면 복잡했지만, 찰리를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즐겁게 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즐거움도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주지사님, 큰일입니다!”
비서실장이 황급히 주지사실로 들어오며 외쳤다.
“왜? 무슨 일이야?”
“지금 전화가 왔는데, 당장 주지사를 바꿔 달랍니다!”
비서실을 건너다보니 다른 직원 하나가 굉장히 곤란한 표정으로 전화 응대를 하고 있었다.
주민 응대는 비서실의 몫이 아니라 주로 내선 연결 용도로만 쓰던 전화였다.
그래도 전화통을 붙들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지난번 총기 반대 시위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누군데 그래?”
“그게…… 해리슨 가에서……”
해리슨 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찰리는 이 모든 게 어떻게 되어가는 일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당사는 자주 찾아가서 제때제때 인사드렸는데.’
당에서는 반대할 수도 있는 사업이라 미리 손을 쓴다고 써두었다.
실제로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윤예준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으니 당으로서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게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건 찰리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해리슨가도 같은 당 출신의 정치 가문이기는 했지만, 워낙에 거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당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이젠 그들이 직접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었다.
“...... 전화 돌려줘.”
찰리는 자리에 앉아서 비서실에서 옮겨오는 전화를 기다렸다.
청천벽력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침울한 기분이었다.
-그만한 큰 땅을 외국인한테 팔아버리면 뭘 어쩌자는 거야!
해리슨에서는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안인데도 성화였다.
“저도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는데 방법이……”
-막아보긴 뭘 막아봐? 네놈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찰리는 알려지지 않은 자신만의 다른 의중이 있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정확히 해리슨 가의 누구인지도 모를 그는 쉽게 찰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주지사인데.
그는 말을 제집 노예라도 대하듯 심하게 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그놈 국외추방시켜!
“네? 아니 이게 무슨 국외추방할……”
전화가 끊어졌다.
너무 세게 끊어 아마 그쪽 수화기는 박살이 났을 것이었다.
면전에 있었다면 재떨이라도 맞았을 거라는 생각에 오한이 일었다.
어차피 막는다느니, 국외추방이라느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이곳으로 찾아와 찰리의 뺨 정도 한 대 때려볼 순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찰리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해리슨 가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전화를 걸어 스트레스를 푸는 것뿐이었다.
‘확 녹음해서 신문사에 보내버려?’
잠시 과감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간의 편안함은 폭풍전야의 평화였던 것이었다.
찰리의 몫은 이제야 시작되었다.
버티는 것.
이번에도 찰리가 할 일은 그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철통같이 버텨주지.’
총기 난사 때는 추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
“건방진 주지사 놈!”
조셉 해리슨은 며칠째 전화통을 붙잡고 시위대만 찾아다녔다.
현재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문 내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한 그였다.
해리슨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통령을 역대 세 번이나 배출했고, 지금도 친인척 중엔 선출직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처음엔 그 해리슨의 이름을 빌려다 로드아일랜드의 주지사를 구워삶아 보려 했다.
한 번 호통을 치면 순순히 들어줄 것처럼 굴어놓고 막상 다음날 되면 감감무소식.
그 반복이었다.
해리슨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겠지.’
그래서 와스프(WASP) 정치 명문가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해리슨과 당 지지자 시민단체를 만나 로드아일랜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얼마 전 총기 난사 일로 열병을 앓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것도 스털링까지 꼬드겨서 말이다.
‘총기법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이 사안은 용서할 수 없지.’
이 일도 그냥 넘어간다면 이제 국민들은 해리슨의 정체를 잊게 될 것이었다.
조셉 본인의 분노야 둘째로 치더라도 존재감을 위해서라면 지금이 본보기를 보여야 할 때였다.
여론은 의도대로 활활 불탔다.
조셉은 계속 윤예준 아트밸리의 위법성을 조사해 시민단체로 넘겨주었다.
시민단체에서는 윤예준이 유대교를 믿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예술에 대해서는 관대한 미국이지만 아트밸리가 전통회화로 승인을 받은 게 아니라는 꼬투리도 잡았다.
덕분에 그들은 연일 로드아일랜드 스테이트 하우스 앞에서 ‘윤예준 추방’, ‘동양인 추방’을 외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때였다.
‘음? 뭐지?’
조셉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텔레마케팅인가 싶어 거절해 보았지만, 전화는 즉시 걸려왔다.
조셉과 굉장히 내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는 번호였다.
아마 잘못 걸려온 전화이겠거니 싶어 받아보았다.
-조셉 맞나?
“예? 누구신지요?”
-내가 자네한테 자기소개를 올려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로드아일랜드에서 온종일 왱알대는 저 사람들을 자네가 선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맞나?
중압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누구지?
조셉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해리슨만큼 걸출한 이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이야말로 내가 누군지 아쇼? 나 조셉 해리슨이라는 사람이요.”
-다 컸군. 내게 언성도 높이고. 초선 때는 그렇게나 깍듯하더니.
수화기 너머의 남성은 그제야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나 존 데이비스야. 내가 자네 스폰서들한테 연락 한 번 돌려야 말을 알아먹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