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17화 (117/241)

117화. 아마란스 (2)

그렇게 로드아일랜드 스테이트 하우스 근처에 가설 판매장이 조성되었다.

말이 가설 판매장이었지 지진이 일어나도 흠집 하나 안 날 것처럼 견고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판매를 위해 간단히 지어 올린 건물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윤예준의 (가칭) ‘마네의 붓 설치 예술 프로젝트’ 특별 전시관.

아직 작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현수막만 건물만 한 크기로 뽑아두었다.

근처를 지나는 차량들이 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전부터 많은 기자들의 연락을 받았던 아버지는 건물이 세워진 후 연락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전시관이 마련된 직후 존은 보관해주었던 마네의 붓을 이곳으로 옮겨주었다.

대형 차량이 야간에 조용히 들렀다 나갔을 뿐인데 그 소문 또한 하루 사이 퍼졌다.

마네의 붓이 지금 로드아일랜드 스테이트 하우스 인근에 있다는 것이었다.

“윤예준 씨! 지금 마네의 붓으로 뭘 구상하고 있는 겁니까?”

“작품이 훼손될 우려도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그걸로 그림을 그리려는 겁니까?”

“가설 전시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건 말씀하신 아트밸리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기자들의 태도는 여전했지만 한 가지 질문에는 대답을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마네의 붓을 재구성해보겠답시고 훼손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얼룩 하나, 털끝 한 올 안 건드리고 그대로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마네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그 정도 우려는 달게 받기로 했다.

곧 나는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 마네의 붓을 마주했다.

환생한 직후 보았던 그 모습이 여전했다.

불을 끄고 보니 그때의 얼떨떨한 심경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신비로워. 마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

나는 천천히 붓을 향해 걸어 손을 뻗어보았다.

그때처럼 차가운 유리관이 손을 막아섰다.

유리 표면은 손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뿌예졌다.

220억 원.

<옐로우 카드>를 통해, 그 이전 <3월의 탄생>을 통해 이미 뛰어넘은 물건.

를 그렸을 땐 붓 자체를 꿈의 상징으로 여겼던 붓.

지금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되었으니 이번엔 그저 재료로만 활용해볼 차례였다.

작업을 도와줄 기술자들이 도착했다.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투명한 줄을 이용해 ‘아마란스’라는 식물의 형태를 띤 조형물들을 천장에 매달았다.

‘아마란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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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는 붉은빛을 띠는 유리 재질의 보석이었지만 여럿 겹치면서 아마란스의 형태가 되었다.

바람을 맞고 있는 듯 높낮이를 달리해 시간 감각을 표현했다.

중앙엔 마네의 붓을 잘 세워두었고, 관람객이 건너다볼 수 있는 맞은편 벽에는 사각형의 타일을 붙였다.

마찬가지로 높낮이가 달랐다.

그 뒤 마지막으로 두 개의 조명을 대각으로 쬐면 마네의 붓이 두 개의 그림자를 나타냈다.

하나는 오래되어 털이 다 상한 붓의 그림자였지만, 나머지 하나는 층이 진 타일에 그림자가 왜곡되게 맺혀 기울어진 아마란스처럼 보였다.

나는 곳곳을 돌며 아마란스를 표현한 샹들리에의 높낮이를 조금씩 조정했다.

‘완성이야.’

작품을 설치하기 시작하던 때엔 온통 하얗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연붉은 샹들리에와 빛 덕분에 은은한 적색 빛이 감돌았다.

조명에도 특히 신경을 썼으니 붓은 이 상태로도 오래 보관될 것이었다.

완성된 작품에 <아마란스>라는 제목을 붙여 언론에 소식을 알렸다.

수많은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작품을 취재하기 위해 로드아일랜드로 모여들었다.

작품은 하나뿐이었지만 전시관 내 CCTV만 각도별로 여러 대는 되었다.

지난번에 데이비스 이스테이트를 방문했을 때 잠시 보았던 경비업체의 경비원들이 주 소속 경찰들 틈을 오갔다.

혹시나 누군가 붓을 뽑아갈 것을 걱정해 존이 임시 고용했다고 밝혔다.

“와……”

나와 아버지는 숙소로 돌아와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계속 전시관에만 있으면 진만 빠질 뿐이었다.

기자들은 하루에도 같은 질문만 수십 번을 해댔다.

경찰과 경비원들을 믿고 그냥 숙소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구매 의사를 밝히는 메일부터 문자, 전화까지. 진짜 확인하다가 한세월 보낼 뻔했다 야.”

아직 그것들 중 단 한 건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나와 아버지는 숨통을 틔워놓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개인적인 연락으로 구매자를 컨택할 생각이었지만 급히 생각을 바꾸었다.

전시관을 넓게 조성한 김에 장기 경매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나올 때 얼마였지?”

“2200만 달러 조금 넘었던 것 같아요.”

호가자들은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표시된 현재가를 확인하며 입찰을 접수했다.

접수가 완료되면 전광판의 숫자가 즉시 바뀌는 방식이었다.

전광판 업데이트는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스테이트 하우스 소속 공무원이 1시간 단위로 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스테이트 하우스의 연락을 받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곧 경매가 마무리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전시관의 전광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8400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 저게 현재가인가요?”

“네. 추세상 1시간 간격으로 새로운 호가자가 나타나는데, 지금 낙찰까지 10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8400이라면, 아마 8500만 달러를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그럼 한화로 약 1000억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5배는 오른 것이었다.

‘그림을 판 돈에 그 값을 얹으면 아트밸리를 지을 수 있겠어!’

비싸게 팔았다는 사실보다 아트밸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더 기뻐하는 동안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이컨 로빈슨이다!”

기자들이 외치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기자들이 시선을 모은 곳엔 한 백발노인이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이동하고 있었다.

“베이컨 로빈슨이 누군데요?”

내가 묻자 근처에 있던 사람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뉴욕 월스트리트 트레이더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에요. 일부러 시간 맞춰 사러 오신 모양이네요.

그는 전광판을 확인하더니 직원에게 다가가 섰다.

그들이 짧게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8400이라는 숫자는 곧 8500으로 바뀌었다.

한 남자가 한숨을 쉬며 전시관을 떠났다.

바로 이전 호가자였던 모양이었다.

판매는 그렇게 끝났고 전시관은 폐관되었다.

“와! 계산해보니까 1050억이야, 1050억! 750억 원을 이익 본 거야!”

아버지가 나를 껴안으며 들어 올렸다.

마네의 붓을 빼고 750억짜리 작품을 만든 셈이니 내 역대 작품들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앞으로 더 비싼 작품도 만들 수 있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때 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잠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기사 봤어요. 작품이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팔렸더군요?

팔린 지 2분도 지나지 않았다.

기자뿐만 아니라 존도 빨랐다.

아마 낙찰 즉시 비서에게 보고를 받은 것일 터였다.

“네. 축하해주시려고 전화 주신 건가요?”

-당연하지요. 하지만 반기실 만한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

민제는 오늘도 예준의 매니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재단 설립과 관련해 많은 일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독 바쁜 요즈음이었다.

이번엔 마네의 붓을 판매한 닐슨가에서 보내오는 감사 편지를 포함해 수많은 응원 메시지가 민제의 메일함을 가득 채웠다.

‘팬레터를 받는 연예인이 이런 마음일까?’

그 모든 걸 읽어서 예준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제목만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윤민제 화가님! ‘모두가 연결된 미술, 여럿이 만드는 미래-시민 큐레이터 전시회’에서 알려드립니다.-

윤예준이라는 이름들 틈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러고 보면 이 메일은 민제의 메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메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인즉슨 다음과 같았다.

시민 큐레이터 전시회란 뉴욕혁신파크에 위치한 뉴욕시립미술관 옆 창고형 이벤트 전시관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였다.

주최 측에서는 이번에 기획하고 있는 그 전시회에 민제를 큐레이터로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전시 목록을 보니 꽤 유명한 명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빠, 뭐 보세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멀찍이 앉아 자신의 노트북으로 아트밸리 관련 자료를 찾고 있던 예준이 물었다.

민제에게 괜찮은 기회인 건 맞았지만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예준이 작품 활동만 해왔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빴기 때문이었다.

메일 창을 닫으려는데 마지막 문장이 민제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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