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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제일 쉬움-114화 (114/241)

114화. 반타의 예술가들 (4)

내가 직접 고르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침묵이 오래 이어지면 어느 한쪽에선 앞다퉈 나설 법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남 아쉬울 소리를 앞둔 사람들처럼 말이다.

앞선 태도로 봐서는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한 마디 더 해보려고 성화였을 텐데.

조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앞서 크리스티의 명함을 먼저 골랐으니 이번엔 소더비 측에게 먼저 이야기할 권한을 주었다.

“최근에 구겐하임 미술관의 아트 에프터 다크 파티에 가서 그린 그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당장은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 두 사람 모두 이미 자세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소식통이 굉장히 빠른 것이었다.

역시 최고의 경매장 의전원들은 달랐다.

“제목은 <현대 살롱전>이지요? 그 작품을 출품할 수 있을까요?”

“저야 좋죠. 하지만 <현대 살롱전>은 한 점뿐이니 경매장도 한 군데면 족한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 경매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뭔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조금 생각해보았다.

“예상가 선정인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매는 행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분위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번 경우에는 최저가입니다.”

최저가를 처음에 높게 부르고 나면 뒤이어 붙는 가격 경쟁에 그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희들에게 출품해주시면 크리스티 쪽의 두 배에 해당하는 최저가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 그런……!”

최저가를 올리는 게 무조건 좋다면 경매장 측에서는 안 올려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둘 중 어느 한 곳을 골라야만 진행되는 절차였기 때문에 애초에 소더비가 크리스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최저가를 보장해줄 수도 없었다.

크리스티에서 최저가를 얼마 제시할지 어떻게 알 것인가.

물론 그만큼 높게 쳐주겠다는 의지겠지만.

“크리스티는요? 뭔가 배려해줄 수 있는 게 있으신가요?”

그는 조금 고민해보더니 마음을 굳게 먹고 나섰다.

“요즘 가장 큰 이슈를 몰고 있는 작품은 <옐로우 카드>입니다.”

“아, 그렇죠. 그런데 그건 존 데이비스 선생님께 선물로 드린 거라서 제가 경매할 수는 없어요.”

“압니다.”

그는 조금씩 힐끔댔다.

“그 작품 저도 자세히 봤습니다. 3D 프린팅돼 있다는 소문도 들은 상태였죠. 하지만 그건 컴퓨터로 디자인해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린 뒤 3차원 스캔, 출력해낸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걸 3D로 디자인하려면 물감의 오묘한 높낮이를 일일이 설계해야 했는데, 차라리 직접 그리는 게 훨씬 빠르고 현실감 있을 터였다.

“그 말은 즉, 그 작품의 원본이 있다는 뜻이죠.”

“그, 그런!”

소더비 측에서 앞선 크리스티 측과 똑같이 감탄했다.

“가품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옐로우 카드>입니다. 그런 <옐로우 카드>의 진품이라면 구미가 당길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 점을 어필하면 비싸게 팔 수 있을 겁니다.”

가품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라.

작품 자체에 유명한 일화가 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진품보다 더 많은 조명을 받는 가품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원본 <옐로우 카드>는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거 정말 매력적인 분석인데요?”

크리스티 측에서 내세우고 싶었던 건 마케팅 전략이었다.

선뜻 말하지 못하고 고민했던 건 옆에서 소더비가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더비가 듣고 그 마케팅 그대로 최저가 두 배 보장을 선언하면 죽 쒀서 남 준 꼴 아닌가.

하지만 그 정도로 내 작품을 자세히 분석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었다.

업계 사람끼리 상도라는 게 있는 모양인지 소더비 측에선 가로채려고 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소더비와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크리스티 측에서 웃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네! 뭡니까?”

나는 아버지를 한 번 보았다.

이런 식으로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할 줄도 알아야 했다.

“저희 아빠인 윤민제 화가의 그림도 살펴주세요.”

“음? 안 그래도 이스테이트 내 화실에서 작품을 그리시는 것 같기에 제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방금 윤예준 화가님께 선물로 주신 것 아닙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하려고 했는데, 선물로 주시는 걸 보고 좀 아쉬워했죠.”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희는 모든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군요! 그림이 더 있는 거라면 저희는 꼭 모시고 싶습니다.”

“아빠, 더 그린 게 있으세요?”

아버지는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제게도 제안하려고 하셨다고요?”

“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향을 찾아서> 때부터 기대해왔고, 이번 <더 데뷔탕트>도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당연히 빈말일 줄 알았다.

그와 악수를 나누는 동안 아버지는 눈물을 참으려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

아버지는 경매를 적어도 한 번은 경험해본 화가답지 않게 유별나게 떨었다.

경매장으로 출발하는 시점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계속 달래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경매장에서는 일개 화가의 심정 같은 건 고려해줄 생각이 없는지, 검은 옷을 입은 직원들이 바쁘게 오가며 한참을 정신없이 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매전의 제목이 쓰여있는 플래카드가 경매장 입구부터 크게 나붙어 있었다.

한 해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는 게 실감 날 정도로 굉장히 큰 규모였다.

나와 아버지가 도착하자 올해 가장 주목받는 신예라며 반기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기자들이야 아버지도 종종 겪어본 이들이었지만 이번엔 그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기사를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압박감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이후 도착한 의전원도 우리를 VIP룸으로 안내하며 경매와 리셉션 일정 등을 빠르게 읊어주었다.

애사심을 가지고 임하는 그들만큼 주인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금방 숙지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오늘 하루만 수십 번은 읊은 모양인지 의전원의 발음은 하나도 새지 않았다.

대신 내가 특별히 요구한 전시 조건을 확인할 때는 조금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출품 당시 요구하셨던 조건들 중 이미 갖춰진 건 제외하고…… 최소 6개월은 공개된 장소에 전시해줄 만한 사람에게만 판매하겠다는 것이었죠?”

“네 맞아요. 구매자에 대한 요청사항이 아니라 판매 조건이니까 그 약속이 이행되어야만 해요.”

“이 내용은 이미 경매사에게 전달된 사항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신가요?”

나와 아버지는 서로 눈빛을 한 번씩 교환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의전원은 조용히 VIP룸 문을 닫고 나갔다.

“세상에 부모 덕 보는 자식들은 많지만, 자식 덕 보는 부모는 나밖에 없을 거야.”

아버지가 거기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경매전 분위기에 벌써 지쳐버린 것이었다.

“에이. 미리 알고 아빠 작품 컨택하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아빠 그림이 빛을 발하니까 결국 그분들 눈에도 띈 거죠.”

아버지가 편안하게 웃었다.

“빛이 너무 약하면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눈에 안 띄는 경우도 있다. 예준이 너는 그걸 모를 거야.”

자신은 칠흑 같은 밤을 오랜 시간 보내왔다.

아버지는 그렇게 덧붙였다.

아마 미술학원에서 짧게 그린 모란 그림도 화제를 끌 정도로 내가 빨리 인정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아직 이 성공을 자신의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거야.’

혹시나 이 모든 게 정말로 꿈이라면 잠에서 깼을 때의 상실감이 너무 클 테니.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처음 환생했던 날 밤을 떠올려보았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도 설렜다.

괜히 이불을 발로 차보기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정 못 믿겠다더라도 상관없었다.

경매전에서의 낙찰가가 아버지의 작품 가치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줄 것이었다.

물론 나의 그림도.

***

-2024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 경매전,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아나운서의 안내가 흘러나오자 경매전은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몸을 조금 기울여 작품이 올라오는 단상 위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괜히 VIP룸이 아니었다.

마치 작품을 사방에서 관찰하듯 편안했다.

프랑스 경매장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처지였다.

귀금속부터 가구, 와인, 자동차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경매되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가치 있는 명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루해할 틈도 누리지 못했다.

시장에서의 평균가와 상관없이, 그러니까 거기 투여된 노동량과 기술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낙찰가가 매겨졌다.

모두 예술 작품으로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비싸게 팔린다.”

한 명인의 그릇 세트가 30억에 팔리자 아버지가 감탄했다.

물론 더 비싼 작품들도 봤지만, 경매장에서 이 정도의 평균가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싸면 20억, 비싸면 그릇 세트처럼 30억에도 팔렸다.

“다음 상품입니다. 윤예준 화가의 <현대 살롱전>”

경매사의 말을 못 들었어도 눈치챌 뻔했다.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장내가 술렁였기 때문이었다.

‘뭐지? 다들 내 작품을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내밀어 다른 좌석과 VIP룸을 살펴보았다.

알아볼 수는 없지만, 어딘가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구겐하임에서 본 영 컬렉터들도 대부분 참석했을 거야.”

아버지가 설명했다.

그곳에서 그린 그림에 <현대 살롱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도 당시 바로 알려졌던 모양이었다.

경매장 의전원들도 알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경매사는 내가 미리 제시한 판매 조건을 사람들에게 숙지시켰다.

사람들은 다행히도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넘겼다.

“저 작품을 샀으면 당연히 사람들한테 자랑 좀 해야지. 6개월이 아니라 60년이라도 말이야.”

어느 한 사람이 지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곳곳에서 인정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가가 시작되자 그들은 일제히 패들을 들어 올렸다.

프로 경매사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려 애쓰거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 값을 올렸다.

30억을 넘기고 40억, 50억이 지날 때까지도 경쟁은 여전했다.

150억을 돌파하자 일반적인 호가 경쟁이 시작되었다.

“1200만 달러 불러주셨습니다…… 1250만 달러!”

서너 명의 참가자들이 값을 계속 올렸다.

1650만 달러면 한화로 약 200억에 달했다.

“자, 1650만 달러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세 번 호가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경매사가 낙찰을 선언했다.

곳곳에서 아쉬움 섞인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 200억 원이지? 다른 상품들도 엄청 비쌌는데, 예준이 건 비교도 안 되니! 축하해!”

아버지가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항상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그게 더 달갑고 기뻤다.

부모 자식의 연을 가진 예술가의 존재는 그만큼 복된 것이었다.

“자, 다음 상품도 윤예준 화가의 작품입니다. 작품명 <옐로우 카드>. 조건 동일하고요, 바로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크리스티 측의 히든카드이니만큼 금방 억 단위를 돌파하고, 곧 10억 단위로도 치달았다.

그때였다.

“......네, 820만 나왔습니다. 820만!”

갑자기 한 번에 올라버린 호가에 사람들은 경매사가 바라본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른 VIP룸이었다.

그곳엔 존이 앉아 있었다.

“가품을 가지고 있으니 원본도 가져야지요.”

잠시 침묵이 지속되자 존이 나긋이 말했다.

존이 <옐로우 카드>로 인해 수모를 겪었다는 건 미국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가품 <옐로우 카드>를 찢거나 짓밟는 건 알려진 존의 성품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진품에 820만 달러(100억 원)를 부른다는 건 사람들에게 의외의 일일 것이었다.

물론 오직 그것 때문에 침묵이 이어진 건 아니었다.

“존 선생님께서 이렇게 대놓고 찜을 하시니…...”

전의를 잃은 사람들 몇몇이 패들을 놓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호가 경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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