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13화 (113/241)

113화. 반타의 예술가들 (3)

노라 스미스 교수는 나에게 다음 오리지널 작품의 자문으로 참여해달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예술적 화풍이 가미된 이례적인 작품을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내 능력을 잘 녹여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물론 그 작품이 성공했을 때의 드림캐쳐의 수익도 무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거절했다.

이젠 영상 분야에서도 많은 걸 얻기도 했고, 더군다나 예술적 화풍을 가미한다는 말뜻은 아무래도 고전 회화 화풍을 활용할 생각이라는 뜻일 터였다.

드림캐쳐 포트폴리오 최신화 때 내 작업을 보고 큰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전 화풍이라면 더더욱 해볼 만한 매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현대화를 1초라도 더 오래 봐두어야 할 시기였다.

“오늘 전시회 갈 거지?”

숙소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네? 글쎄요. 어제도, 그제도 갔다 왔는데 또 가야 할까요?”

안 갈 이유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시회장에 갈 때마다 그 안에 조성된 화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는 전시장 내부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론가들의 비평을 엿듣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예준이 네가 필요 없다면 안 가는 거지만…… 그래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가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 왜 좋은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를 데려가야 할 말 못 할 이유가 있는 눈치였다.

“그래요. 그럼 지금 가봐요.”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가 차 키를 꺼냈다.

얼마간 존(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은밀한 통화를 주고받으며 목요일이 어쩌고, 예준이가 저쩌고, 꼭 데려간다느니 안 간다느니 떠드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사실 존과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목요일인 오늘은 나의, 그러니까 윤예준의 생일인 것이었다.

‘전시장에서 뭔가 생일 축하라도 해줄 생각인가 보지?’

방금 아버지의 반응으로부터 그 생각에 확신을 얻었지만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놀라는 사람은 없지만, 놀래키는 사람들을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착하고 나면 아버지는 즉시 화실으로 향했다.

얼마간은 명작 감상에 수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 어떤 명작이 걸려 있어도 관심을 주지 않을 만큼, 아버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창작 욕구에 잡아 먹혀’ 있는 상태였다.

그 심정이야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존중해주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동안 아직 둘러보지 못한 구역을 가보기로 했다.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며 작품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시간이 다 가버렸다.

“이런. 벌써 폐관 시간이 다 돼버렸네. 아무튼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윤예준 화가님.”

잡지사 소속 저술가라고 소개한 사람이 미술관을 빠져나갔다.

나도 함께 빠져나가기 위해 메인 전시장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 아버지도 데리고 나가야지.’

아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을 게 뻔했다.

미술관을 바쁘게 빠져나가는 인파 틈으로 불현듯 펭펭이를 본 것도 같았다.

미술관에 펭펭이가 돌아다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무함마드도 왔나?’

내가 잘못 보았을 리도 없으니 아마 무함마드가 구경을 온 것일 터였다.

나는 못 본 체하고 아버지를 찾아 화실으로 이동했다.

“아빠. 이제 폐관이래요.”

예상대로 아버지는 화실 안에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

“어어. 그래. 지금 몇 시야?”

화실 가운데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6시가 넘었어요. 이제 나가야 해요.”

“아 그래?”

아버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웃었다.

“그래. 지금 나가면 되겠다.”

아버지는 그리던 그림을 잘 정리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실을 나가 정문 출구 쪽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아버지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빠, 어디로 가세요?”

“응? 아아, 아까 차 좀 옮겨달라는 말을 들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 주차했어. 이쪽 길로 가는 게 빨라.”

이곳에 붐비는 상가도 아니고, 이동 주차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참 어설프시네.’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한 이 모든 유난과 아버지의 어설픔이 꽤 재미있었다.

‘생일파티장으로 이동하려는 건가?’

한 번 모른 척하기로 했으니 끝까지 눈감아줘야 할 것이었다.

***

그렇게 아버지는 나를 저택 뒤편 공원으로 안내했고, 뒷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팡파프와 폭죽이 터져 나왔다.

알고 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소리였다.

“생일 축하해요!”

공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 미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참석한 모양이었다.

“역시. 아까 본 펭펭이는 무함마드였군요! 옷 덕분에 알아봤어요.”

무함마드가 펭펭이가 그려진 후드티를 입고 빈 폭죽 껍데기를 들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모두가 무함마드를 보며 야유를 쏟아냈다.

“그러니까 좀 눈에 안 띄는 옷을 입으라고 했잖습니까?”

“나야 이 옷이 눈에 띄는지 안 띄는지 모르지.”

바비의 타박에 무함마드가 항변하고 들면 화목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튼 생일 축하드립니다. 노라 감독님께 일은 성사가 안 됐다고 들었는데, 또 같이하기를 기대한 입장에서 좀 아쉽더군요.”

“하하하. 죄송하네요.”

더 이상 일적으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노라와 바비, 무함마드가 시간을 내서 이곳까지 찾아와준 것이었다.

노라는 한쪽에 치워둔 상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바비와 함께 준비한 선물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고품질의 영상 작업을 할 수 있는 노트북이에요. 외장 부품까지 다 있으니 활용하시면 돼요. 프로그램도 거기 다 있어요. 물론 윤 화가님이 애용하시는 카산드라 언리시드도요.”

노트북을 받아 들고 벤치 한쪽에 잘 세워두었다.

“안 그래도 타블렛만으로는 그림 그리기 어려울 것 같아 고민이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잘 쓸게요!”

“미리 구하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다음은 카프탄이었다.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기야. 그저께 처음 나왔다고. 첫날이라서 한정 공개했거든? 원래 나는 기다렸다가 편하게 구하는 편인데 네 생일 맞추려고 새벽같이 줄 서서 사온 거야.”

무함마드는 게임기를 켜 그 안에 있는 ‘명화 틀린 그림 찾기’를 켜주었다.

“한번 해봐!”

명화와 그 변형된 모작이 좌우로 배치된 상태였다.

한쪽에 박혀 있는 터치펜을 뽑아 그림이 다르게 변형된 부분을 골라내면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예준이 두 그림을 한 번씩 확인하고 다른 점들을 즉시 골라냈다.

“와. 너 진짜 빠르다. 역시. 모작 감별도 막 하고 그랬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에이,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나저나 기대되네요. 이렇게 골라내면 이제 게임이 시작되는 건가요?”

“응? 아니, 골라내면 게임이 끝나는 건데? ……재미없구나.”

바비가 풀죽은 무함마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거 게임 기능 많은 거잖아요? 윤예준 씨는 저 게임 말고 다른 게임을 하면 되는 거예요.”

“맞아. 기능 많아. 그래도 이렇게나 빠를 줄은 몰랐는데.”

‘명화 틀린 그림 찾기’는 발전시켜서 모작 감별 교육 프로그램으로나 쓰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림 그리다 쉴 때 한 번씩 머리 식히는 용도로 쓰거나.

다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주는 선물은 그림이었다.

“와. 매일 화실에서 그린 게 혹시 이 작품이에요?”

“응, 뭐. 이 작품도 있고.”

액자에 있는 종이 꼬랑지에는 ‘예준이 12살 선물, <아들의 초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림을 보고 크게 놀랐다.

“와! 이 그림 정말 대단한데요!”

만약 전생의 내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조금 더 완성시켜 둔 크로키쯤으로 평가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크로키로 보이는 이 <아들의 초상>에 동양화풍이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투박하게 느껴질 만한 목탄 크로키의 라인을 공필화스럽게 재해석했어.’

동양화의 선을 통해 얼굴 라인을 따고 있었고, 명암은 담묵 처리해서 표현했다.

크로키 특성상 색이 들어가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게 되는 부분은 여백의 미처럼 보였다.

현대 회화에 통달한 동양화가의 그림이라면 딱 <아들의 초상> 같은 그림이 될 것이었다.

어쩌면 일섭이 발생시킨 현대 동양화가로서의 고민을 해소할 화가는 아버지인지도 몰랐다.

“정말 그래?”

“네.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요. 계속 이대로 그리면 금방 유명해지겠는데요?”

가난해서 그릴 기회가 잘 없었다던 아버지는 한 번 그릴 때 최대한 화려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프랑스 경매장에 출품한 <이상향을 찾아서>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실력을 최대한 뽐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더 데뷔탕트>와 <아들의 초상>은 편안한 마음을 먹고 그렸기 때문인지 안정감이 있고 톤도 깔끔했다.

명암, 채도, 그림자 처리도 나의 방법을 참고해 적절히 변형한 티가 났다.

내 작업을 보는 과정에서 표현력은 늘었고, 그만큼 부담감은 줄었으니 발전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그림 정말 시각적으로도 뛰어나고 담백해요. 고마워요, 아빠.”

“예준이가 좋게 봐주니 정말 기쁘네.”

그때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아들의 초상>을 감상하고 있던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정장 차림의 남성 두 명이 박수를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멋진 작품입니다. 윤민제 화가님 작품은 <더 데뷔탕트> 때부터 기대해왔는데, 이렇게라도 보게 되니 영광입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팔린 <이상향을 찾아서> 때부터인데, 생각보다 윤민제 화가님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보군요?”

“아뇨. 더 큰 관심이 생긴 건 <더 데뷔탕트> 때부터였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상향을 찾아서> 때부터도 차기작을 기대해왔죠.”

두 사람은 서로 은근히 아옹다옹하며 내 앞에 섰다.

“누구세요?”

“아, 소개를 드려야겠네요.”

두 남자는 저마다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자신의 명함을 상대방의 위에 얹어지도록 건네기 위해 또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얼굴 붉힐 일을 만들기 전에 어서 명함을 건네받았다.

가장 위에 놓인 게 크리스티의 명함이기에 그걸 먼저 집었을 뿐인데, 그들은 이미 결정이 나기라도 했다는 듯 희비를 나눠 가졌다.

“크리스티…...? 소더비?”

“네, 맞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미술품 경매장인데,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윤민제 화가님께서 존 선생님과 전화를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로 질책하기 위해 돌아본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조심히 둘러댔다.

“나야 뭐, 주목받는 삶을 살아본 적도 없고. 내 통화 따위엔 아무도 관심 없을 줄 알았지.”

그건 그랬다.

“유명하더라도 엿듣는 건 좋은 취미가 아니죠. 그래도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리스티 쪽에서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 모르겠지만요.”

“아, 저는 원래 미술관이 폐관되면 얼마간 근처를 둘러보고 갑니다. 보통 폐관 이후에 셀럽 파티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소더비의 언급에 계기를 설명하려던 크리스티 직원이 입을 꾹 닫았다.

“곧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인데, 가능하면 윤예준 화가님의 그림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아버지가 말했던 연례행사 격의 경매 이야기인 듯했다.

“두 분이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으니 두 군데 중에서 한 군데로 결정을 해야겠네요. 음, 동전을 던져볼 수도 없고. 한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지금은 너무 정신없잖아요?”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서……”

물론 둘 다 세계적인 경매장이었으니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비싸게 작품을 팔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경매장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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