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반타의 예술가들 (2)
“텅 빈 공간을 헛것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광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자선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존은 나와 아버지가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왔다.
처음 <옐로우 카드>를 3D 프린팅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말리려고 했다.
혹시나 존과 척을 지게 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존이 없더라도, 존이 나를 배척하고 들더라도 나는 충분히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인맥이 없다고 작품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나는 그림으로 성공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그의 도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존이 숙소 초인종을 눌렀을 때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내가 존을 도발한 것은 그의 도움이 필요 없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일로 남을 미워할 만큼 존의 그릇이 작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예상대로 존의 얼굴에선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 시간을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나와 아버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게는 부인이 있었어요. 굉장히 이른 나이에 만나고 이별했죠. 사별이었어요.”
그와 아내는 잠깐 사이에 발리와 발렌티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말을 떼기도 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버렸다.
두 사람이 얼마나 절절한 연애를 해왔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가 여전히 언급할 정도면 쉽게 잊히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두 아이를 잘 키워내면 그 헛헛함이 채워질까 싶어 한때는 교육에만 매달렸어요. 하지만 아무리 잘 키워내도 발리와 발렌티나는 제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죠. 결국은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아니었어요.”
자녀가 유년기에 접어들어 기본적인 사리 분별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다른 활동으로 아내를 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건 미술품이었다.
평소에도 그들 부부는 미술품을 좋아해서 전시회 다니는 걸 즐겼다.
구체적으로는 아내와 함께 살았던 저택에 아내가 좋아할 만한 미술품을 가져다 놓기로 한 것이었다.
“저 혼자 값비싼 추억팔이에 골몰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정작 그 작품들 중에는 아내와 함께 봤던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고 함께 감상해줄 아내가 이 집에 있는 것도 아닌데……”
존은 담담하게 얘기했다.
아내와의 사별은 이제 40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그를 더 슬프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과거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데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예술가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면서 승화시켜낸 게 바로 예술 작품이잖아요? 존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상처도 위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나의 말에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너무 큰 슬픔을 겪은 사람들은 오히려 남의 슬픔에 귀 기울일 여유를 잃게 되죠. 윤 화가님 말이 맞아요. 나로 인해 남들이 상처를 치유 받을 기회를 잃게 되더라도 별로 신경 쓸 바는 아니었어요. 어쩌면 제 잘못은 슬퍼해도 너무 슬퍼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50년이면 유난히 길기도 하죠.”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존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경청의 자세가 아니었다.
존 자신의 변화가 제일 중요했다.
존으로서도 그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를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앞으로 몇 마디 더 해줄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데이비스 이스테이트를 개방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화실도 마련할 생각이고요.”
“오…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잘 선택하셨어요.”
아버지가 존의 손을 맞잡으며 감동한 티를 냈다.
“이번 파티에서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죠?”
내가 묻자 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창피했죠. 하지만 누가 제게 그런 수모를 줄 수 있겠어요? 덕분에 이스테이트를 개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애저녁에 겪어야만 했던 일이죠. 오히려 이 변화 때문에 제가 아직 젊다는 생각도 듭니다.”
존은 그런 면에서 게리와 비슷했다.
그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인간적인 고민은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미술계 인사로도 성공해 많은 이들의 존경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변화라면 어떤 계기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존의 말대로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됐습니다. 마침 저희가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었는데. 지금 드리면 개방된 데이비스 이스테이트에서 언제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가 그림을 가져왔다.
전망대에서 그렸던 <더 데뷔탕트>였다.
만약 이번 일이 잘되어서 데이비스 이스테이트가 개방되게 되면 존에게 선물로 주자고 미리 이야기해두었다.
값을 받고 팔지는 못하겠지만 그곳에 전시하게 된다면 아버지로서도 큰 영광이었다.
그곳이 개방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어쨌든 흔쾌히 수락했다.
“선물이라고요? 이 작품이요?”
존은 <더 데뷔탕트>를 보고 크게 놀랐다.
“이 작품만 보여주시면서 이스테이트를 개방하라고 하셨어도 고민했을 것 같네요.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에요.”
“좋게 봐주시니 다행이네요.”
“개방하고 첫 전시회를 열면 메인작으로 전시해도 될까요?”
존이 조심히 물어왔다.
그야 당연히 가능했다.
선물로 줬으니 이제 존의 소유였다.
그 소유권 행사는 이제 전과 판이하겠지만 말이다.
***
데이비스 이스테이트가 모두에게 개방된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테이트의 전체 부지는 국립공원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더 데뷔탕트>를 구상하게 만든 그 풍경도, 저택의 컬렉션도.
이젠 모든 사람들이 원할 때 언제든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MAMA]
그 소식과 함께 첫 번째 전시회 일정도 널리 알려졌다.
MAMA라는 이름의 전시회였다.
더 이상 VIP 티켓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언론에서는 이스테이트에 보관 중인 작품에 대해 사람들의 귀추를 주목시켰다.
<아비뇽의 처녀들>과 같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무수했기 때문에 미술계 연구자들도 대거 이곳을 방문할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더 데뷔탕트>는 바로 그곳에 전시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메인작’으로.
다시 데이비스 이스테이트를 방문할 땐 차가 꽤나 막혔다.
울타리 문에선 이제 사설 경비원들이 아니라 국립공원 소속 공무원들이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림을 보게 될 거야.”
존은 저택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깔끔하게 잘 포장해두었다.
하지만 차량은 자갈길을 지나듯 은근히 진동했다.
핸들을 잡은 민제의 손이 떨렸기 때문일 것이었다.
‘작품을 공개할 때마다 이렇게 떨리는구나.’
넓었던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부지 곳곳의 도로 갓길마다 차가 세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 걸어야 했다.
긴 오르막이었지만 기대감 덕분에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서자 <더 데뷔탕트>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다.
메인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평론가들이 모여들어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통의 윤예준 작품들엔 공통점이랄 게 없지만, 동양화적이기도 하면서 서양회화적이라는 특징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은 또 그렇지도 않군요.”
“미묘하게 끼어들고 있는 초현실주의 작풍이 원인인 것 같은데요? 놀라워요. 이런 작풍은 윤예준의 전작에 없었어요. 윤민제라는 화가의 영향이겠죠?”
“윤예준의 작품에 윤민제의 톤을 씌운 느낌이네요. 그게 굉장히 절묘하고 잘 어울려요.”
그들은 한 마디도 혹평하지 않았다.
예준은 갑자기 생긴 노라와의 미팅으로 함께 올 수 없었다.
그러길 참 다행이었다.
민제는 눈물을 훔쳤다.
아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일 뻔했으니 말이다.
예준과 함께한 그림이기 때문에 찬사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민제가 불안해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거장의 작품만 모아놨다는 데이비스 이스테이트였다.
예준의 그림에 자신이 먹물이라도 끼얹은 모양새라고 한다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발견해주는 윤민제의 화풍에 대해서도 큰 호평을 받고 있었다.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다.
‘오래 선망해왔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는 평생 모르고 살아왔어.’
이런 기쁨이라면 죽을 때까지도 그림만 그린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화가를 꿈꾸면서도 오랫동안 큐레이터만 해왔다.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미술관 공간에서 지내면서 많은 박탈감을 느껴왔다.
큐레이터도 굉장히 좋은 직업이었지만 그래도 민제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남은 인생은 화가로 살겠어.’
존이 말한 대로 전시장 곁채엔 화실도 마련돼 있었다.
그 화실 벽면엔 텅 빈 액자들이 들어찬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나눴다.
민제도 이 감동을 그림으로 한 번 더 표현해내기로 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려야 할까? 왜 사람들은 다른 화가의 그림도 아닌 윤민제의 그림을 감상해야 하는 걸까?’
그 이유가 없다면 아직 그림을 그릴 준비가 안 된 것이었다.
하지만 민제는 이제 알았다.
많은 화가들 중에서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시선.
그것을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면 되었다.
‘나는 지금의 예준이와는 달라서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편하게 그릴 수 있겠지.’
민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민제는 스트레칭이라도 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이리저리 돌렸다.
오래 그림을 그리니 어깨가 쑤셨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니 민제 뒤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는 존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어느 순간부터 화실이 지나치게 조용해졌다고 느꼈다.
그땐 민제 자신이 집중력을 강하게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니 미술관 관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 데이비스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윤 선생 작업에 저도 흠뻑 빠져서.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어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림이 무척 대단하네요.”
“아니에요. 저도 기척을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림이 대단하다는 건 빈말이 아닌 듯했다.
“윤예준 화가님과 윤민제 화가님의 작품은 둘 다 폭발력이 있어요. 윤예준 화가님의 경우엔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폭발력과 표현력 모두가 뛰어나 사람들을 감동시키죠. 하지만, 물론 많은 작품을 봐온 건 아닙니다만, 윤민제 화가님의 작품은 감각들을 오랜 시간 눌러 담아두었다가 침묵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확 터뜨린 듯한 절절함이 느껴져요.”
“그, 그런가요……?”
“네. 이렇게나 좋을 줄 알았다면 여길 와보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처음부터 완성작을 볼 것을…… 완성될 때까지 기대해야 하잖아요? 저는 그런 걸 잘 못 참는 편이거든요.”
이곳에서 겪는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존 데이비스에게 받는 인정이라니.
2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장면은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윤예준 화가님은 어디 계시죠?”
“아. 일전에 잠시 협업했던 업체가 있는데, 그곳에서 다급히 불러서 갔습니다. 내일부터는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폐장쇼 관련해서 후속 작업들이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응이 좋았으니 당연했다.
“아…… 그럼 오늘 아예 안 오시는 건가요?”
“네. 그렇죠, 뭐……”
데이비스는 아쉬워하는 듯했다.
<엘로우 카드> 일로 둘이 굉장히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참 다행이네요.”
존에게서 의외의 감상이 나왔다.
“네?”
“그것참 잘된 일이라고요. 윤예준 화가님 몰래 꾸며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안이 벙벙해 민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존이 민제에게 접근해 귓속말을 해주었다.
“...... 그것참. 좋은 생각입니다.”
존의 말을 들은 민제도, 마찬가지 의미심장하게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