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반타의 예술가들
“저런 일이 종종 있나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의 차 안에서 물었다.
“분야가 예술이다 보니까 비슷한 사례만 있는 건 아니지. 기상천외한 일들이 굉장히 많아.”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색깔에 대한 독점 사례를 들어주었다.
“색깔을 독점한다구요?”
“기업에서도 자신들의 포인트칼라를 고수하기 위해 해당 색깔의 색채값을 비공식적으로 독점하기도 하잖아? 그런 게 화가들 사이에서, 법적으로도 생기는 거야.”
색깔이란 엄밀히 말해서 기준이란 게 없는 법이었다.
컴퓨터에서 하는 것처럼 색채값을 정하면 색깔을 수치화하는 게 가능했지만, 감상자가 빨간색과 주황색을 색채값으로 구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디서부터 빨간색으로 느끼고 어디서부터는 주황색으로 느끼는지 분명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기준이 있는 색깔이 딱 하나 있어. 바로 검은색이지.”
하얀색을 제외하고 말한다면, 검은색은 빛 흡수율이 100%에 가까울수록 계속 검어졌다.
누구도 100%의 흡수율을 가진 검은색을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을 검은색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타블랙이라는 검은색이 있어. 그건 빛의 흡수율이 99.965%야. 빛을 비추면 그중 0.035%만이 반사되어 나온다는 뜻이지. 하지만 보통사람 중에는 그 0.035%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그 정도면 100%지. 실제로 보고 있으면 어지러울 정도라고 하더라.”
“오…… 그 정도 검정이라면 오히려 굉장히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겠어요. 나중에 한번 구상해봐야겠네요.”
아버지는 작게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어.”
과학 분야에서의 쓰임이 다양해 주목받고 있는 소재이지만, 예술 분야에서는 한 사람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했다.
반타블랙 개발사에 거액을 지불하고 예술에서의 독점권을 샀기 때문이었다.
아마 물감에 대한 독점만으로 예술성을 지키려는 이라면 실력도 별로일 게 뻔했다.
“그거 엄청 아쉽네요.”
“탐만 내 볼 따름이지. 쓸 수 없으니.”
그 뒤 다른 개발사에서 반타블랙에 가까운 다른 색깔을 개발해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예술로 치자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따로 그려 팔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번 작품은 특별히 신경 써야겠네.’
존 데이비스가 스스로 그의 컬렉션을 공개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데이비스 이스테이트에 오래 가두어져 있던 명작들이 쏟아져나오게 된다면 미술학계에서는 큰 센세이션을 맞을 것이었다.
“반타블랙과 가장 가까운 색깔이 뭔가요?”
“글쎄? 알아봐야 하겠는데?”
“혹시 구해다 주실 수 있나요? 다음 작품에 좀 쓰고 싶어서요.”
어찌 보면 입장권을 돈 받고 파는 미술관들도 미술품을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존과도 친해지면 이번 VIP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가능성의 정도 차이는 존재했다.
미술관은 몇만 원 모아서 내고 들어가면 끝이었지만 존의 눈에 띄는 건 사활을 걸어도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미술관을 짓게 되면 가능한 한 많은 작품들을 최대한 저렴하게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해야겠어.’
***
며칠 뒤 아버지는 굉장히 검어 보이는 물감을 얻어다 주었다.
‘무수블랙(Musou Black)’이라고 적혀 있는 그 아크릴 안료는 빛 흡수율이 99.4%라고 했다.
반타블랙에 비하면 0.5%가 넘는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인지 조금 번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게 예술 목적으로 쓸 수 있는 블랙 중 가장 검은 거야.”
“감사합니다.”
이번에 그릴 작품에는 반타블랙이 좋은 모티프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반타블랙을 사용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차선택이기에 오히려 의미 있는지도 몰라.’
물감을 기다리며 미리 해둔 스케치 앞에 앉았다.
무수블랙을 조심히 덜어 캔버스 위에 발라보았다.
특징적으로 어려우니 시각적인 효과는 분명했다.
어떤 윤곽과 형태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은 검었기 때문에 하얀 물감을 조금씩 섞으며 묘사했다.
가장 어두운 부분은 무수블랙 그대로 활용했다.
그리고 있는 건 존에게 받은 VIP 티켓이었다.
그 티켓만의 고급스러운 느낌은 완전히 살렸지만,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마치 힘차게 쥐어 구긴 듯 주름 가득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 뒤 안에 VIP 로고를 그려 넣었다.
주름을 따라 똑같이 명암을 주었다.
노란 물감이었지만 일반 옐로가 아니었다.
금가루를 섞어 함께 빻아놓은 물감을 활용했다.
그러자 아득하게 어두운 카드 표면과 휘황찬란한 VIP로고까지 완성되었다.
“오. 느낌 있다. 제목은 뭐야?”
그림에 검은색 말고는 활용된 색이 옐로우뿐이었다.
보통은 블랙카드라고 부르는 티켓이었지만 진짜 검정을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예술가의 독점 때문에 말이다.
“<옐로우 카드>로 해야겠네요.”
그렇기 때문에 남은 한 가지 색의 옐로우로 대신 부를 수밖엔 없었다.
“좋네. 반칙을 쓰면 주는 게 옐로카드잖아?”
아버지가 절묘하다고 평가하며 좋아했다.
“그런데 왜 구겨 그렸어?”
“이 그림을 끝으로 저 티켓은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요.”
나는 휴대폰을 들어 노라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3D 프린터’를 쓸 수 없겠냐고 물었다.
***
예준이 내건 조건은 자선 파티 당일 공개해달라는 것이었다.
지켜주기 어려운 약속이라는 건 존 본인도 그전까진 작품을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존은 즉시 예준의 다음 작품을 자신의 정원 가운데에 잘 보이도록 전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선 파티는 저택의 정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도 정원에 모아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작품들을 정원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비서는 존을 따라다니며 작품의 배치에 대해 논했다.
울타리를 지키는 경비 인력은 평소의 두 배 이상 강화해두었다.
도둑들에게는 단 한 건의 도둑질만으로 몇백억의 거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성수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훔쳐봐야 법적으로는 존의 소유였다.
작품을 배치하기로 한 당일 예준의 그림이 도착했다.
<옐로우카드>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해당 작품은 약속대로 가림막을 걸어놓고 정원 한가운데에 전시했다.
빨리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게 예준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선 파티 당일이 되었다.
여전히 손님들은 VIP 카드를 들고 데이비스의 집으로 모였다.
아직 정원 구역으로 들어서기 전 저녁 만찬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윤예준에게도 초대장을 보냈지만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다.
“자. 슬슬 이동들 하시지요.”
존은 손님들을 정원으로 안내했다.
저택 건물 사이에 널찍이 조성된 인조 정원이었다.
“오. 여전히 작품들이 정말 많네요.”
“기대가 됩니다. 감상 좀 해볼게요.”
“음……? 그런데 저기 가려진 그림은 뭔가요?”
손님 중 하나가 예준의 그림을 가리켰다.
존은 깜빡 잊고 있었던 척하며 비서에게 그림을 공개하도록 시켰다.
“윤예준 화가의 작품이에요. 이번 자선 파티를 위해 보내주셨지요. 다들 보러 가실까요?”
손님들은 윤예준의 이름을 듣고는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파티 참석자 전원이 정원 한가운데에 모였고, 곧 그림은 공개되었다.
“오! 이건…… 응?”
그림은 어딘가 싸늘했다.
손님들이 이곳의 울타리를 지날 때 경비원들에게 건넨 VIP 티켓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심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구겨진 모양새를 보아 생활 흔적은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구긴 것이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묘사된 VIP 로고는 완벽했지만 티켓의 배경 검은색은 보통의 검은색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반타블랙인가?”
“그래 보이기는 하는데,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당황한 존이 묻자 비서가 소곤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 물감은 예준이 사용할 수 있는 물감이 아니었다.
“아…… 가운데 노란 물감이 유독 빛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검어 보이는 모양이군.”
유별나게 검은 물감이기는 하지만 반타블랙만큼은 아닌 물감으로 충분히 검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VIP의 금빛이 블랙의 빛을 계속 빼앗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빛이 VIP에 모여드는 모양새가 조금 오묘하네요.”
“......이 그림 조금 이상해.”
존은 예준의 그림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액자의 유리표면 위로 빛이 비쳐 잘 보이지 않았다.
물감 뭉친 부분과 캔버스 천 표면까지 모두 완벽해 잠시 헷갈렸지만……
“이건 물감의 질감이 아닌 것 같은데.”
존이 말하자 비서도 다가와 작품을 살폈다.
“3D 프린팅을 했네요.”
존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60 평생을 살아오며 간만에 겪어보는 두통이었다.
예준의 조건은 ‘자선 파티 당일날’ 공개해달라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선 파티 당일날 ‘공개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그 전에 보았다면 존이 전시를 취소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조건을 걸었을 터였다.
반타블랙은 예술적 독점에 대해 큰 이슈를 가져왔던 색상이었다.
그에 대비되는 빛나는 VIP로고는 그러한 독점이 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을 의미했다.
게다가 구겨진 VIP 티켓.
예준의 불참 사실까지 더해져 그러한 독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존은 손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존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황한 한편으로 가식적인 박수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여, 역시. 윤예준의 작품도 컬렉팅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맞아요. 이 작품이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허물은 혁신적인 작품입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사조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 거기 경계란 애초에 없었다.
‘이렇게 부끄러울 데가……’
그냥 3D 프린팅 작품이기만 했다면, 손님들의 공치사대로 그 기술을 활용한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비판적 시각을 떠올려보면 3D 프린팅마저도 비판의 한 방식이라고만 생각되었다.
게다가 완전히 실제 그림 재질을 살려 프린팅했으니 의도는 분명했다.
자신의 작품만은 독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윤 화가님께서 나를 심히 매질하려는 모양이야.”
“작품 돌려보낼까요?”
비서가 물었다.
하지만 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작품을 공개하는 건 누워서 침 뱉는 꼴이었다.
예술품 독점을 비판하는 이 작품을 정원 한가운데에 전시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이 작품은 자선 파티 정원 한가운데에 잘 보이도록 그대로 둘 것이었다.
이미 침은 뱉은 상태고 말이다.
“내 아들과 딸에게는 크고 좋은 상을 주신 윤 화가님이셔. 하지만 내게는 벌을 줬지. 왜 그랬을까?”
“......”
남의 비판을 헛소리 취급하며 자존심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존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작품은 공개되어버렸고, 사람들이 비웃을 만한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욕심쟁이에게 가해지는 가르침의 매질이라면…… 달게 받아야 하겠지.”
존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돌이켜보았다.
‘독점…… 욕심이라……’
그 자체로 잘못된 건 하나도 없었다.
재산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예준은 존의 잘못을 지적한 게 아니었다.
이미 늘그막에 든 존을 그저 성장시켰을 뿐이었다.
“윤예준 화가의 작품은 다들 만족스러우십니까?”
존은 그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손님들에게 물었다.
손님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조용히 비서를 불렀다.
“네, 선생님.”
“지금 바로 윤예준 화가에게 연락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