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10화 (110/241)

110화. 허드슨 리버 밸리의 주인 (4)

작품 이름은 <더 데뷔탕트>로 정했다.

예준과 함께 고민한 결과였다.

“이번 작품은 굉장히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죠. 저와 아버지가 각자 작품을 낸 적은 있지만, 합작을 선보인 적은 없잖아요?”

예준이 <환생>을 그렸을 적을 생각해보았다.

곳곳에서 예준의 첫 작품이라고 구입하고 싶어 했다.

예준은 앞으로 값이 얼마나 뛸지 모른다며 그 모든 제안을 거절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나중에 더 비싸게 팔기 위한 게 아니더라도, 첫 작품이란 건 보다 의미 있게 써야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더 데뷔탕트>는 민제와 예준이 합작한 ‘첫 작품’이었다.

그림을 파는 데에 거부감은커녕 여태 선망만 하며 살아왔지만, 예준과 함께한 저 작품은 팔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저 그림을 어떻게 선보이는 게 좋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요즘은 또 대부분 경매장에서만 연락이 오고 있기는 한데.”

“오호. 어떤 경매장이요?”

경매 신생 업체 ‘퓨리퍼즈’를 비롯해서 경매장이란 경매장에서는 모조리 연락이 오고 있었다.

세계적이라고 평가받는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준은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더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민제 선에서 다 거절해두었다.

“아, 그렇긴 하죠. 알았어도 그림 그릴 시간은 없었을 거예요.”

미들타운의 <화합>, 발리의 로고, 발렌티나의 패션위크까지.

그림으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예준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았을 터였다.

“가뜩이나 이 시기에는 현대미술경매전이 열리기 직전이라서. 경매사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거든. 꽤 큰 경매전인데 이렇게 작품 좀 보내 달라고 그쪽에서 사정을 하니 당황스럽더라.”

“그 정도인가요?”

장피에르의 경우도 제발 손톱만 한 그림이라도 좋으니 예준 좀 설득해달라고 했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민제는 그런 장피에르에게도 칼같이 거절해왔다.

장피에르라면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려도 병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번 건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아빠랑 그런 곳에 작품도 내보고 싶어요.”

“응? 에이…… 네가 팔면 몰라도 내가 어떻게 그런 데에 작품을 팔아보겠어?”

민제는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예준의 말만으로도 가슴이 끓어오르는 게 미술가로서의 성공 야망은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

해 질 무렵 전망대에서 나와 존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렇게나 거대한 저택인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저택 왼편으로는 웬만한 공공주차장 크기의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컬렉션 공개 파티를 위해 마련해둔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 주차장에는 검은 차량들이 가득했다.

“지인들만 알음알음으로 불러서 하는 파티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많이 왔네요?”

“그러게. 지인들만 불러도 이 정도는 되는 건가?”

지난번 발리와의 시상식 때 아버지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려보았다.

데이비스 이스테이트라는 건물에 들어와 볼 기회라면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자선사업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 자산가이기 때문에 일생 동안 쌓아온 연도 꽤 될 것이고 말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저택을 향해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미 수많은 차량들이 주차돼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번 구겐하임 때와 마찬가지로 저택은 조용해 보였지만 아마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를 터였다.

“안에 값진 미술품들이 많다고 했죠?”

“그렇지. 어떤 작품들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기 컬렉팅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장이 되었다는 뜻이지. 비싼 건 당연한 거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사람들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중세풍의 인테리어 분위기가 특징인 저택은 완전히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작품이 많고 시설도 계획적이었다.

시선이 탁 트였고 조명도 적당했다.

그 덕에 들어오자마자 <발레리나 크로마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견했네! 예준이 네 작품이다. 이른 나이에 거장이 되었다는 뜻이지.”

언론에는 익명의 사업가가 수집했다고 알려진 작품이었다.

게다가 패션 쪽에 조예가 있는 사업가라고 예측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빈들에게 꽤 깜짝스러운 이벤트였을 것이었다.

‘이 이벤트를 위해 사들인 건가?’

작품을 보고 있는 손님들은 ‘그게 데이비스 선생이었을 줄이야.’라며 격조 있게 떠들고 있었다.

“오호. 이게 바로 윤예준 화가의 NFT 작품인가요?”

“그렇네요.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거장의 노련함과 신인의 패기가 동시에 느껴지는데요?”

“100억이라…… 한 20% 정도는 나누고 싶은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나머지 손님들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설마 지분을 얻어가실 생각으로 온 거예요?”

“꿈도 안 꾸시는 게 좋을 거예요. 데이비스 선생께서는 작품을 굉장히 아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야 잘 알죠. 그래도 원할 수는 있잖아요?”

지분을 얻어간다니.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어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비싼 작품들은 지분 투자를 받기도 해. 이후로 값이 더 오를 것 같은 작품에 한해서 진행하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NFT 작품들은 그런 게 더 활발히 이루어지는 편이지.”

그 이야기를 듣고 갈가리 찢긴 <막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이 떠올랐다.

지분을 나눠 갖는다는 게 그 그림을 실제로 찢어놓겠다는 심산은 아니겠지만.

실물 그림에 대해서 지분을 나눠 갖는다면…… 그래, 매입자의 자유이니 신경 쓰지 않으려면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본이 실물이 아닌 NFT 작품에 대해서는 지분을 나눠 갖는다는 게 조금 더 파괴적으로 와닿았다.

“저런 식의 거래까지 이루어지는 줄은 몰랐는데 조금 그렇네요. 작품을 갈가리 찢어가는 것 같아서요.”

“그래? 하긴, 원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존 데이비스의 호평이 뒤따랐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 만에 100억짜리 그림을 그렸다.

몇 번 더 해볼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분 분할이 있다면……

NFT 거래에 대해서는 더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와주셨군요! 윤 화가님.”

멀리서 존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러자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존은 나와 아버지에게 악수를 한 번씩 권하고 저택 안쪽을 가리켰다.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겠네요. 제가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자랑부터 보여드릴게요.”

나와 아버지는 존을 따라 이동했다.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직면하게 된 공간에도 작품들이 많았지만, 밖에서 커 보였듯 그 외에도 공간이 많았다.

무하, 칼더와 같은 현대 미술 거장들의 전시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와. 그나저나 여긴 거의 박물관이네.”

미술품뿐만 아니라 거장들의 클래식 태블릿, 구식으로 보이는 자동차와 마차들도 곳곳에 전시된 상태였다.

그렇게 곳곳을 지나 피카소 전시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그의 작품들 중엔 그 <아비뇽의 처녀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희끄무레한 색채와 여러 명의 나체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입체파라는 그의 작품 특징에 걸맞게도 인물은 여러 부위로 조각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 도발적인 제스처와 강렬한 눈빛은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역시 그 작품은 먼저 보시네요.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인데,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죠. 그려졌을 당시에도 피카소가 이 그림을 10년간 숨겼거든요.”

감상자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는 이 작품의 불온함으로 인해 수많은 노이즈를 예견했다고 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냥 발표해버렸지만, 피카소가 살던 20세기에도 여성 누드에 대한 선입견은 분명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나라고 모든 사람들이 알몸으로 다니는 사회를 바라고 그 작품을 그린 건 아니었어. 그냥 표현할 수만 있으면 되지.’

20세기에도 보수적 풍조가 여전했다는 건 조금 놀라웠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슬슬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려는데, 아버지가 발을 떼지 않았다.

“아빠. 안 가세요?”

“응, 잠깐만. 이 작품 조금만 더 보고.”

아버지는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이 작품이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왜요?”

“연대를 보면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이야. 하지만 여태까지 입체주의에 대한 연구는 이 작품을 제외하고 진행됐어. 이 작품을 연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랬겠지.”

아버지는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제목과 존재만 알려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아비뇽의 처녀들>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풍이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연대도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빨랐다.

“그럼 존이 처음부터 이 작품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뜻인가요?”

“그야 모르겠지만 지금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하잖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도 여전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선사업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연구 협조는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연구 교육용 이미지 자료가 알려졌겠지. 학계에서의 언급도 마찬가지고.”

자신이 큰돈을 주고 산 작품이니 남들에게 보여줄지 말지는 그 사람의 자유일 것이었다.

누가 개인적으로 빌려 가서 면밀히 보고 싶다고 꼭 그렇게 해줘야 한다면 소유권을 왜 구입하겠는가.

존은 지금 자신의 온당한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사가 법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와 의무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자선사업을 했다는 사람이니 앵무새처럼 권리만을 주장하지는 않겠지.’

미술품을 좋아한다더니.

이건 애호가가 아니라 그냥 욕심 많은 콜렉터 수준이었다.

돈이 그를 허드슨 리버 밸리의 주인으로 만들어줬을지는 몰라도 예술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잘 타일러 설명했을 때 못 알아들을 만한 천치도 아니었다.

‘한번 제대로 교육을 시켜줘 봐?’

내가 아버지와 함께 <아비뇽의 처녀들>만 계속 보고 있자 앞서갔던 존이 다시 다가왔다.

“<아비뇽의 처녀들>...... 굉장히 도발적이고 불쾌한 작품이죠? 일부러 얼굴에 괴상한 음영을 넣고 감상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의도했다더군요.”

작품에 묘사된 공간은 아무래도 매음굴 같았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정말. 너무 볼 게 많네요.”

내가 칭찬하자 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년에 한 번씩 자선 후원 파티를 진행하고 있어요. 마침 그게 올해네요. 그때도 꼭 초대해드릴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세요.”

“오. 너무 감사하네요.”

그렇다면 그때가 기회였다.

“빈손으로 가긴 그렇고…제가 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게 그림뿐인데, 그때 그림을 선물해드려도 좋을까요?”

“오! 정말인가요?”

점잖던 존이 크게 놀랐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울 때도 그림으로 울었다.

나는 말로 설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림을 통해 그가 스스로 깨닫도록 할 뿐이었다.

“당연히 정말이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이 조건을 들어주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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