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발레리나 크로마키 (3)
발렌티나는 예준을 즉시 드레스룸으로 안내했다.
행사에 쓰일 모든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거기까지 들어가는 데만 해도 보안장치가 철저했지만, 발렌티나의 작품들은 그곳의 더 깊숙한 장소의 개별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작품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영상 기획에 필요한 건데 당연하죠. 오히려 다른 곳으로 옮겨서 보여드리는 것보다 이게 더 안전하기도 해요.”
발렌티나는 작품을 하나씩 옮기며 예준에게 보여주었다.
시대별로 유행하던 드레스들을 모두 조사해 새로 고증해둔 옷들이었다.
작품을 구경하던 예준은 매우 관심 있어 하는 티를 냈다.
‘영상 촬영에 필요하다면야.’
전임자의 경우 그냥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델들을 아무렇게나 일괄 촬영한 뒤 편집만 현란한 영상을 제작했었다.
역사 유적을 거니는 영상은 발렌티나의 재요청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뻔한 영상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참신한 영상을 위해서라면 예준에게 이곳 열쇠라도 맡겨줄 수 있었다.
이미 예준이 보내준 무대 디자인대로 리모델링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걸 아카이브에 다 공유하셨던데, 다른 의도가 있나요?”
“네. 이번 기획도 그렇고, 원래 예술이라는 게 역사적인 도상에서 일어나는 활동이잖아요. 예술가 간의 영향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유행도 설명할 수 없는 법이에요. 독방에서 혼자서만 표현할 거였다면 애초에 예술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니, 그랬다면 인간에겐 표현 본능도 없었겠죠.”
그래서 다른 예술가들과의 토론을 위해 아예 작품에 대한 모든 걸 공개해버렸다.
그 덕에 고증 면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완성도에 치중했으니 영상에도 이렇게 총력을 쏟는 것이었다.
예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품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의견을 줘볼 생각인 것이었다.
발렌티나는 잔뜩 기대한 채 예준의 감상을 기다렸다.
‘어떤 의견을 줄까? 화가에게서는 굉장히 감각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겠지?’
그동안 동료 패션디자이너들과 의견을 주고받을 때엔 주로 고증과 예술적 표현을 얼마나 균형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했다.
단순히 고증만을 한다면 뭐, 이곳은 드레스 역사박물관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 시대의 유행에 맞게 또 하나의 웨딩드레스 작품을 만드는 게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마치 그 유행이 진행형의 유행인 것처럼 말이다.
말 그대로 과거의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 서민들의 웨딩드레스라고 하셨죠?”
예준이 작품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1830년대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에요. 아직 흰색 웨딩드레스가 공인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때에는 이렇게 색깔이 있는 드레스를 입는 게 보통이었어요.”
예준은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민했다.
“제가 1830년대 사람이라면 이 드레스를 안 살 것 같은데요?”
“네? 왜요?”
“제가 알기에도 당시 서민들은 흰 드레스를 안 입었던 건 맞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 입은 거지 못 입은 건 아니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로코코 당시의 화려함에 대한 선망이 은연중에 남아 있었는데, 일생에 하나뿐인 행사인 결혼식이라면 가능한 한 화려한 걸 입고 싶지 않았겠어요?”
발렌티나는 예준의 말을 듣고 다시 자신의 작품을 보았다.
레이스가 적절히 달려있고 장미무늬의 붉은 실크가 고급스럽게 표현되어 있기는 했지만, 부속이 달릴 여지가 훨씬 많았다.
“색깔이 조금 덜하더라도 더 부속이 많고 화려한 걸 선호했겠죠. 하지만 이 드레스는 너무…… 단정하고 깔끔하잖아요.”
1800년대 초반의 서민용 드레스는 특히나 자료 찾기가 어려웠다.
프로젝트 중 가장 옛날이기 때문인지 보존된 것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무늬가 많은 드레스를 입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제작한 것이었다.
‘무늬가 많은 것을 입었다’라는 정보의 진짜 의미를 모른 채로 제작한 실수였다.
“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아무도 그런 지적은 해주지 않았는데.”
“음…… 그냥 옛날에 책에서 봤어요. 유년기에 1830년대를 보낸 작가 책이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요.”
사료라고 함은 그 당시 문학 작품들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물론 서민의 웨딩드레스가 언급된 작품들을 몇 권 읽어두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묘사가 ‘다패턴의 무늬’였다는 식에 그칠 뿐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직물에 들어가는 무늬만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준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발렌티나는 1830년대 서민들이 다패턴의 무늬를 선호했다는 건 알면서도 왜 선호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화려한 걸 추구했기 때문이고, 또 그게 이유라면 부속을 이렇게 조금만 썼을 리도 없었다.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예술가라고 들었는데 그게 진짜였네요!”
발렌티나는 예준의 피드백에 더욱 신이 나서 드레스들을 보여주며 신나게 떠들었다.
1800년대 작품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주로 의견을 주더니,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예술적인 관점에서만 이야기했다.
‘착각인가? 뭐, 하긴…… 20세기는 애초에 기성복의 시대니까 그럴 만도 하지.’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20세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기도 했고 말이다.
***
발렌티나는 모든 지적을 반기는 예술가였다.
‘전생의 나도 저렇게 밝은 성격이었다면 작품 활동이 좀 더 편했으려나?’
아닐 것이었다.
오늘 나는 지적 정도만 했지만, 전생에 받아온 평가들은 지적을 넘어 모욕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데이비스 남매는 유독 나와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들만의 열린 성품 때문일 것이었다.
‘웨딩드레스를 볼 뿐인데도 전생에 다녀온 것처럼 기분이 묘했어.’
몇 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했어도 발렌티나의 드레스들이 고증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일 것이었다.
1830년대 웨딩드레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시기에 결혼한 전생의 어머니 것이 도움이 되었다.
드레스가 너무 심심하다며 못내 아쉽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보라색 실크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릴 정도였고, 부속은 더 이상 붙일 곳이 없을 만큼 주렁주렁 달려있었는데도 말이다.
옛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필립의 영화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발렌티나의 현대 드레스 디자인이었다.
현대로 환생한 뒤 사람들의 복식에서 처음 느낀 건 전보다 실용적이고 편안한 복장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막연하게도 모든 복식에 대해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발렌티나가 보여주는 현대 웨딩드레스 중에는 15ft, 약 4m 50cm가 넘도록 늘어지는 것들도 많았다.
특별한 날엔 화려한 옷을 입고 싶다는 욕구는 지금도 여전한 것이었다.
발렌티나와의 만남이 끝난 뒤 나는 드림캐쳐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내게 할애해준 자리와 장비는 미국에 있는 동안 자유롭게 써도 좋다고 배려해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토리보드 파일을 연 뒤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오늘 본 드레스는 발렌티나의 아카이브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으니 필요한 모든 정보는 이미 있는 셈이었다.
‘전임자의 고민 지점을 다른 방향에서 해소해야겠어.’
어떻게 ‘역사’라는 키워드를 40초 안에 담아내느냐.
발렌티나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모두 활용하려면 한 벌당 노출 시간은 2초 남짓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기발한 연출을 떠올리든가 합리적인 요약 방식을 강구해야 했다.
그러던 도중 CG 작업 도구를 발견했다.
그래픽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의 생명체를 실제 촬영본에 덧씌울 수 있는 증강현실 프로그램이었다.
영상에 직접 적용하는 건 본 적 없었지만, 바비가 새로 디자인한 코스튬을 인체 동작 그래픽에 입혀 퍼레이드를 시뮬레이션하는 건 봤다.
‘그 시뮬레이션 영상을 그대로 녹화하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폐장쇼 작업 당시 바비가 공유했던 작업 파일을 열어보았다.
마네킹처럼 단순화된 인물들이 드림랜드 현장을 거니는 게 원본 영상이었고, 각 코스튬 그래픽 디자인 정보가 여럿 링크된 상태였다.
적용 버튼만 누르면 인물에게 해당 코스튬이 즉시 입혀지는 형태였다.
‘이거면 자연스럽게 의상을 전환할 수 있겠는데?’
드레스 20벌을 모두 보여주려면 20장면이 함께 편집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래픽을 활용하면 한 장면 만에 20벌을 모두 보여줄 수도 있었다.
나는 바비가 작업한 그래픽들을 보며 금방 활용법을 익혔다.
옷들에 대해 일일이 동작 정보를 입력하고 인체 마네킹과 같은 지점에 운동점을 찍어둔 것이었다.
그의 동작에 따라 드레스에 연결된 지점이 함께 움직이도록 말이다.
이번 영상에서는 실제 인물의 복장에 그래픽 드레스를 입혀야 하니 모델의 옷에 센서를 부착하면 될 것이었다.
우선 발렌티나의 아카이브에서 이번 패션위크에 사용될 웨딩드레스들을 모두 다운로드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그 뒤 그 그래픽이 증강현실로 씌워질 ‘모델 드레스’를 직접 제작했다.
실크이기는 했지만 모든 드레스의 원형이 될 만한 단순 의상이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됐어. 한번 시험해볼까?’
나는 새롭게 만든 드레스를 들고 카메라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동작이 잘 링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링크되었다면 내가 들고 흔드는 모델 드레스는 발렌티나의 웨딩드레스로 자연스럽게 변경될 것이었다.
***
영상 촬영이 예정된 날이었다.
발렌티나는 다시 패션위크장에서 예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전에 촬영을 도와줄 모델 한 명만 구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 모델에게 촬영을 부탁해두었다.
예준이 오기 전까지 그 모델은 연습용 웨딩드레스를 입고 워킹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드레스 밑단이 땅에 닿지 않는 옛날 웨딩드레스들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곳엔 최고의 모델들만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렌티나가 제작한 15ft가 넘는 현대 웨딩드레스는 워킹이 곤란했다.
함께 촬영하기로 한 그 모델조차도 말이다.
“드레스 앞 발목 부분에서부터는 일부러 갈라지게 디자인해뒀어요. 그래도 걷기가 힘든가요?”
“네. 발목이 어떻게든 빠져나오긴 하지만, 옆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써야 해서……”
발렌티나가 직접 입고 걸어보았을 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입장하는 신부처럼만 걸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모델들은 옷의 흔들림을 표현하기 위해 동작을 과장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웨딩드레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드레스 앞부분을 잡고 들어서 걸어보시겠어요?”
발렌티나가 묻자 모델은 그렇게 해보았다.
앞부분 빈 공간이 넓어지면서 발에 걸리는 부분이 없게 되었다.
“걸을 땐 그렇게 잡고 걷다가 무대 선두에 섰을 땐 한 번 놓고 보여주고, 다시 되돌아 나갈 때 들춘 채로 걷고.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괜히 드레스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면 모델로서는 커리어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뉴욕패션위크에 설 정도로 유명한 모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모델은 탐탁지 않아 했다.
“그렇게 하면 옷을 완벽히 보여줄 수 없는데요. 그냥 00년대 초반식 워킹을 제외하고 연습해볼게요. 그럼 몸을 이렇게 많이 흔들 필요 없을 테니까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는 것 같았다.
조금 걱정되었지만, 어차피 연습에 실패하면 발렌티나가 제안한 방식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지금 촬영할 수 있나요?”
그때, 뒤에서 예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모델도, 발렌티나도 돌아보았다.
예준이 큰 가방을 든 채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 물론이죠. 그런데 준비해오신 가방은 뭔가요?”
촬영을 마친 뒤 다시 연습해보기로 하고 예준 앞에 모였다.
영상과는 관련이 없지만, 예준에게 관심이 많은 모델들도 함께 말이다.
예준은 가방을 완전히 열어 보여주었다.
“이번 영상에 사용할 특별 소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