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04화 (104/241)

104화. 발레리나 크로마키 (2)

“아아, 그런 거였으면 진작에 얘기를 해줬어야지. 나만 창피하게 됐잖아.”

“이런 일로 창피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내가 윤예준 화가님한테 맡기고 싶었을 뿐인 건데.”

본업은 패션 디자인인 발렌티나였다.

그래서 오빠인 발리에게 누구보다도 더 멋진 로고 디자인을 해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가 속으로 윤예준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휴, 됐어. 아무튼 좀 더 보자.”

그나저나 매우 잘된 디자인이었다.

둘로 떨어져 있는 발리의 모습과 축구공이 하나의 비율을 이뤘다.

습관처럼 예준의 로고에 숨어 있는 황금 비율을 찾아보았다.

굉장히 복잡하면서 절묘하게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내친김에 예준의 지난 활동들도 함께 찾아보았다.

발리는 이미 자신이 스크랩해둔 게 있다며 인터넷창 몇 개를 일제히 띄워주었다.

한국에서 진행했다는 첫 번째 특별전 작품부터 시작해 최근 드림랜드 폐장쇼까지.

그중 역시나 로고 디자인은 없었다.

‘하긴. 그런 건 학습의 영역이 아니라 타고 나는 거라고 했지.’

안정감을 추구하는 건 화가를 포함한 모든 디자이너들의 본능이었다.

어떤 위태로운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적어도 완성된 비율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의 그림인 이상 말이다.

예준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문 디자이너들은 세세한 부분들까지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하지만 100%에 가까운 모작부터 유명 명작 복원까지 해낸 윤예준이라면 아마도……

“그냥 앉은 자리에서 바로 그린 게 분명해.’

어떤 도구를 쥐여줘도 정밀한 표현이 가능할 윤예준이었다.

“나도 이 사람 좀 소개시켜 줘.”

“뭐? 안 돼. 지인이 소개시켜 줬다고 아무나랑 작업해주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아무나는 아니잖아.”

곧 뉴욕에서 패션 위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오늘 집에서 쉬고 있다시피 웬만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곳을 장식할 작품들까지 말이다.

하지만 딱 하나가 모자랐다.

“알겠어, 얘기는 해볼게. 뭘 맡기고 싶은 건데?”

“런웨이 스테이지에 띄울 영상이 마음에 안 들던 차였어. 진짜 저 놀이공원 영상 같은 느낌이면 너무 좋을 거 같단 말이야.”

실력 있는 영상 제작자들은 죄다 영화판에 자리 깔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필 연초라서 그런지 쓸 만한 스튜디오가 모두 매진 상태였다.

일단 무난한 영상으로 기획은 마치긴 했지만, 너무 신경 쓰여서 잠도 설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럼 네가 여태까지 한 작품들 모아보기 가능해?”

“당연하지! 제안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잘 설명해줘야 한다?”

“알겠어.”

발렌티나는 자신의 아카이브 주소를 발리의 노트북에 저장해주었다.

***

로고를 보낸 다음 날 아침, 발리에게서 메일이 한 통 전달되어 왔다.

내가 디자인한 로고가 굉장히 마음에 들고, 곧 이 로고로 브랜드를 런칭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전 세계인을 만족시켜야만 했던 로고였다.

발리 한 명 정도는 쉽게 만족시킬 수 있어야 했다.

발리의 메일에는 본문 내용만큼 긴 추신이 쓰여 있었다.

-한창 바쁜 와중이신 걸 잘 알지만 딱 한 가지 요청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의 여동생이자 ‘도나텔라뉴욕’의 대표인 발렌티나 데이비스가 ‘뉴욕 패션위크’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실력도 좋고 그 브랜드도 대표적인 오트쿠튀르 디자인 그룹으로서 촉망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제안 드립니다. …(중략)... 발렌티나의 작품을 모두 확인하실 수 있는 주소 링크를 보내드리니 편하게 검토해보시고 답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메일엔 내용뿐만 아니라 첨부파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다운로드해보았더니 뉴욕패션위크라는 행사에 대한 전반적인 기획안이었다.

[HISTORY BUFFET]

쇼의 메인 타이틀로 보이는 문구와 함께 행사장 디자인 정보가 가득했다.

새로운 영상의 주제로 삼고 싶은 건 ‘웨딩드레스의 200년 역사’였다.

발렌티나의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아카이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고급 실크로 디자인된 드레스 도안들이 보기 좋게 정렬된 상태였다.

패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분위기야 둘째로 치더라도 도안 공개가 꽤 상세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세부적인 디자인 정보를 공개할 수 있을 리가 없어.’

화가로서는 습작을 공개하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기획이 끝났고, 내게 부탁하고 싶은 런웨이 영상도 확정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이번 쇼를 꼭 크게 성공시키고 싶었다.

특히나 마음에 안 들던 것이 영상이었기 때문에 재기획도 감안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마음 나도 잘 알지.’

아무리 쏟아부어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해봤을 것이었다.

이미 중간 이상의 성과가 보장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내게 기획 자문을 부탁했던 노라처럼 말이다.

패션 쪽은 완전히 생소한 분야였다.

드림랜드 코스프레 디자인을 하며 어느 정도 흥미를 느껴본 게 전부였다.

‘로고 디자인 일도 끝났고. 여유가 될 것 같은데?’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하나였다.

당연히 패션계 예술가들도 많이 모여들 것이었다.

나는 구겐하임에서 본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을 떠올려보았다.

영향력을 넓히려면 분야를 불문하고 친분을 쌓는 게 좋다는 걸 그곳에서 알게 되었다.

아직 패션 작품은 내본 적이 없어 그들에게도 내가 많이 생소할 터였다.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영상 작품으로 좋은 이미지를 먼저 심어줄 수 있는 기회였다.

어차피 노라와 일하면서 영상 제작에는 도가 튼 상태이기도 했다.

그 기술들을 써먹을 기회가 지금 온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지난번에 공유받았던 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화가님. 메일 확인하신 거 봤습니다.

“네. 좋은 기획이던데요? 해야겠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발리는 크게 기뻐했다.

-정말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발렌티나도 굉장히 기뻐하겠어요. 제가 발렌티나의 연락처를 보내드릴 테니 직접 한번 연락해보시죠.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라고 말해두겠습니다.

“네, 하하. 제 영상이 마음에 들면 많이 해주시겠죠. 아무튼 기다리고 있을게요.”

***

나의 연락을 받은 발렌티나는 정말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인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발리의 말대로였다.

그런 것 치고 영상에 대한 제안서가 매우 자세했는데도 말이다.

우선 우리는 패션위크가 예정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알기로 아직 행사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런웨이 무대와 객석 곳곳을 떠돌며 번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행사 기획자였다.

패션위크가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옷을 입고 무대 위에 설 모델들이 각자 동선을 체크하며 무언가를 상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행사장 곳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었다.

‘발렌티나 데이비스 X 윤예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벌써 홍보가 시작됐나 보네.’

하기야 영상만 제외하면 대부분의 준비가 끝나 있다고 했다.

“오셨네요! 오는 동안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무대 한쪽에 서 있던 여성이 다가왔다.

아카이브 주소의 프로필에서 본 얼굴이었다.

발렌티나 데이비스.

발리의 얼굴이 조금 보이는 걸로 보아 본인이 확실했다.

“아니에요. 입지가 좋은 곳이네요. 사람들이 많이 오겠어요.”

“맞아요. 물론 미리 입장권을 팔고 진행하는 거겠지만 자리가 비어 있었던 적은 없죠. 기자들도 많이 올 거구요.”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발렌티나는 나를 일자형 무대 바로 앞으로 안내했다.

무대 위를 정면으로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일단 기존의 영상을 먼저 보여드릴게요.”

“아, 그런 게 있으면 더 좋은 참고가 되죠.”

무대는 성인의 무릎 높이밖엔 되지 않았고 객석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옷의 디자인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자형으로 돌출된 무대를 통해 모델들은 쭉 걸어 나온 뒤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가는 것이었다.

영상은 그 무대 뒤쪽의 벽을 스크린 삼아 재생되었다.

웨딩드레스 차림에 도도한 표정의 모델들이 장소를 바꿔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뒤로는 세계 곳곳의 문화 유적이 보였다. 제법 편집도 잘되어 있고 깔끔했다.

“어떠신가요?”

영상은 40초를 딱 맞춰 끝났다.

끝나자마자 발렌티나는 의견을 물어왔다.

“일단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영상이라서 그런지 몰입감이 좋네요.”

“그리고요?”

차마 영상에 대한 불만을 자기 입으로 얘기할 수 없어 내게 의견을 묻고 싶은 것이었다.

그 영상 제작자만의 표현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발렌티나의 의도에만 맞춰주기로 했다.

“굉장히 훌륭한 영상이기는 하지만 저는 저렇게 구성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젠 저한테 맡겨주셨으니 제 방식대로 만들어봐야죠.”

발렌티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문화 유적은 ‘역사’라는 키워드의 이미지로 가져다 쓰인 것 같았다.

패션위크의 주제가 웨딩드레스의 200년 역사였기 때문이었다.

200년보다도 더 된 문화 유적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거기 오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 이미지만 전달하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200년의 모든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보여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몇 개를 생략하면 불완전한 편집본이 되어버렸을 게 뻔했다.

차라리 웨딩드레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옷 하나를 다양한 모델들에게 입힌 것이었다.

“저기 스크린 사이즈 정보가 있나요?”

“네? 물론이죠. 패션위크 행사장 전체 사이즈 정보도 있어요.”

객석은 병렬식이 아니었다.

영화관에서처럼 제작자에게 그리 친절한 구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너무 가까웠고 먼 사람들은 너무 멀었다.

그러니 장면을 영화에서처럼 넓게 쓰면 안 됐다.

“무대를 조금 변형해도 될까요?”

말이 나오는 순간 내게 무대 자료를 전송하던 발렌티나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가능하세요?!”

“물론이죠. 변경할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작업 인력이 패션위크 당일까지 계속 대기 중이에요. 변형 방향만 확정되면 즉시 수정할 수 있어요.”

전임 영상 담당자는 이 무대 조건 그대로를 활용해야 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럼 무대 수정 사항도 제가 오늘 안에 확정해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좋아요! 그렇게나 빨리해 주신다니…… 그 밖에 필요하신 것들은요?”

“흠…… 영상을 구체적으로 구상해보기 전에 런웨이에 실제로 사용될 웨딩드레스 작품들을 실제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발렌티나는 입맛을 다셨다.

“아……! 그런 차원에서 발리하고도 직접 만나보신 거죠? 그래서 그런 생동감 있는 로고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거고.”

“맞아요. 로고는 브랜드를 소개하는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번 영상 작품은 어디까지나 패션쇼의 예고편에 불과해요. 그 본분에 충실한 작품을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겠죠.”

말이야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솔직히 내 계획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의 영상 속 분위기가 오히려 발렌티나의 패션위크를 잡아먹어 버리도록 할 것이었다.

40초에 불과한 영상으로 20분짜리의 패션위크를 말이다.

‘그러려면 영상은 이 공간보다도 더 커야겠지.’

나는 객석을 포함한 패션위크 행사장 전체를 돌아보았다.

쓸데없는 구조물이 너무 많았다.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다 치우고 깔끔한 베이지색의 벽면으로 만들어야겠어.’

행사 시작과 함께 암전되면 이 공간의 모든 벽면이 훌륭한 스크린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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