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03화 (103/241)

103화. 발레리나 크로마키

파티가 끝나고 다시 미들타운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 특별한 공간에서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치 짧은 꿈 하나를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숙소에 있는 컴퓨터를 켜서 다시 데이비스 발리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선물을 받기만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의 마음에 쏙 든다면 또 훌륭한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발리와의 대화는 충분했지만, 그의 활동들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별 그의 경기 사진과 그의 팬들이 편집해 올린 경기 영상을 몇 개 확인했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유니폼 번호에도 의미가 있었군.’

가장 마지막에 오래 활동했던 팀에서 그의 유니폼 등번호는 항상 10번이었다.

내게 자신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애정이 없다면 파티장에까지 유니폼을 입고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얼마나 축구에 열정을 쏟았을지는 뻔했다.

오래 함께한 이 ‘10’이라는 숫자에도 남모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그의 새로운 브랜드, ‘발리서클’의 로고 디자인에 돌입했다.

숫자 ‘10’을 활용해 감각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영상 중엔 유독 프리킥 관련 자료가 많았어.’

내가 아는 한 프리킥은 순간적으로 득점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실력이 좋고 파워도 우수한 발리가 주로 프리킥에 나선 것이었다.

발리, 하면 프리킥을 먼저 떠올리게 될 정도로 말이다.

‘왼발 킥을 차려는 발리, 그리고 축구공을 각각 1과 0으로 형상화해서 10을 표현해야겠어.’

발리는 공을 차올리기 직전 만세 하듯 팔을 뻗어 올리는 동작으로도 유명했다.

그게 발리만의 시그니처 프리킥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작감도 확실하고 각도를 잘 조정하면 1이라는 숫자로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축구공 같은 경우엔 크기가 너무 작아 일부러 전방배치했다.

실제 비율보다 과장되게 표현되니 그 자체만으로도 역동감을 얻어냈다.

축구공 특성상 동작을 통해 느낌을 표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디자인을 마쳤다.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발리는 금방이라도 공을 걷어찰 듯 굵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축구공은 셔터 속도가 느린 카메라로 찍은 듯 조금 번져 있었는데, 몇 년은 쓴 듯 낡은 표면 묘사는 충분히 해두었다.

그 흠집 자체만으로도 축구선수 발리의 오랜 습관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표현도 최대한으로 끌어내면서도 디자인은 단순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겠어.’

나는 그 그림을 로고 제작툴로 동기화해 마지막 손질까지 해두었다.

그의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붉은 음영을 전체적으로 잡아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도 좋지만 포인트 컬러를 내세워 최대한 이미지를 강렬하게 남기는 것 또한 중요했다.

이 정도라면 다른 디자이너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발리서클만의 색채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다.

‘됐어.’

여태 많은 작품을 그려왔지만, 이 로고만큼 성과가 기대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았다.

압도적으로 잘된 디자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고두고 한 사업의 얼굴이 될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 로고만으로도 발리의 사업은 성공하게 될 것이었다.

뒤늦게 내 뒤로 다가선 아버지가 로고를 보고는 감탄했다.

“진짜 잘됐다. 벌써 만든 거야?”

아버지는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로고를 천천히 구경했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걸 봐서는 나처럼 그 로고의 성공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모든 명작은 작업 기간이 오래 걸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예준이 그림 그리는 거 보면서 그 생각이 조금 깨졌어.”

요즘 들어 작품 제작을 빠르게 마치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이 로고를 포함한 모든 작품들이 빨리 제작된 거라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나는 매 작품마다 50년이 훨씬 넘는 나의 모든 세월을 총동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게 보면 반나절이었지만, 길게 봤을 땐 내 평생이 걸린 작품들이었다.

“발리 선수. 이 로고로 돈 꽤나 벌겠는데?”

“그렇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최고였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돈이 필요한 나였지만 그렇다고 사업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니 주객전도되는 꼴이었다.

‘직접 사업을 할 순 없어. 하지만 돈이 사업을 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카산드라 스튜디오나 바로크에 돈을 투자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특히 카산드라 스튜디오의 주가가 크게 올랐을 때 테레즈는 내게 ‘앞으로도 직접 움직일 생각이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즉시 테레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윤 화가님. 테레즈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잠시 근황을 나누고 투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투자 중인 ETF 이익이 크게 오르고 있어요. 꽤 성공하고 있습니다.

“역시 테레즈 회계사님이 꼽아주시니까 이익이 많이 생기네요.”

ETF는 전적으로 테레즈가 선정하고 있기 때문에 과찬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화가님께서 말씀하신 바로크 성장 추세가 가장 가파릅니다. 이제는 특별 주문이 없으시더라도 수익률이 높아 주 투자처로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죠. 앞으로 얼마간은 큰돈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치 빠른 테레즈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조용히 말을 멈췄다.

내가 이런 식으로 전화할 땐 새로운 투자처 이야기를 하게 될 거란 걸 이젠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데이비스 발리라는 축구선수 아시죠?”

-네. 최근에 은퇴했다던데. 관련주를 좀 알아볼까요?

“아뇨. 곧 ‘발리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스포츠웨어 브랜드가 탄생할 거예요. 아마 기대치가 높은 주식일 테니 예의주시하고 계시다가 상장 즉시 매입해주세요.”

테레즈는 말없이 나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아직 생긴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눈치 싸움이 중요할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투자비율은 얼마 정도로 하면 될까요?

지금 투자 중인 금액으로는 큰 이익을 남길 수 없을 것이었다.

전망이 분명한 종목이라면 전 재산을 쏟아부어도 위험 투자가 아니었다.

뉴욕에 와서 번 돈만 선별적으로 거기 넣어두기로 했다.

“최근에 미국에서 번 돈 400억을 모두 투자해주세요.”

-......네. 발리서클이라는 기업이 나오면 바로 투자해두겠습니다.

테레즈는 침착해하는 한편으로도 굉장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바로크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건 발리라는 축구선수의 이름값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

“오오! 이럴 수가! 이건 그야말로 예술이야!”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발리가 거실에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오래간만의 평일 휴가라 느긋하게 쉬려던 여동생, 발렌티나 데이비스는 발리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거실에서 멀리 떨어진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도 발리의 목소리는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듯 쩌렁쩌렁했다.

‘사업한다고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더니 감정 표현이 너무 늘었어.’

한참 선수로 활동하던 때에도 인터뷰는 많았지만 그런 건 사교가 아니었다.

스스로 직접 나서서 사람을 대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활발해질 필요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 성격이 금방 바뀔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긴. 오빠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

우천에도 경기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며 진흙밭에서도 드리블 연습하던 발리였다.

그만한 진흙밭이 생기도록 비가 많이 내리면 경기가 진행될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 빛을 발했다.

평소에도 세계 원탑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덕분에 유사시에는 더더욱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런 유별남이 그를 일인자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성격 정도 바꾸는 거야 일도 아닐 것이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참다못한 발렌티나가 2층 거실 복도로 뛰쳐나왔다.

발리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오. 작업에 방해됐어? 미안미안.”

발리는 사과하면서도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뭘 보고 있길래 눈도 못 떼고 저러고 있지?’

발리가 미술품을 좋아하기는 했다.

그래서 종종 구겐하임 프라이빗 파티도 참가하는 편이었다.

은퇴한 뒤부터는 인맥을 위해 참가하는 게 더 컸겠지만 말이다.

발렌티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발리의 노트북 화면을 건너다보았다.

멀어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10’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응? 오빠 등번호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아주 기가 막히지 않아?”

뭐가 기가 막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완전히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보았다.

단순히 10일 뿐만이 아니라 공과 발리의 모습 배치가 10처럼 보이는 거였다.

“와! 이거 진짜 디자인 좋은데? 프로 디자이너 팬이 보내준 거야?”

팬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유명한 디자이너일 게 뻔했다.

10을 이루는 형상 아이디어도 아이디어였지만 그 모습에서 어딘가 강인한 의지가 전달되었다.

프리킥을 차기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마치 발리의 발은 계속 공을 향해 뻗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주었다.

‘뭐지? 누구 작품이지?’

발렌티나는 자신이 아는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작품을 모두 떠올려보았지만, 이 작품을 그렸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발렌티나가 모를 만한 무명 작가의 디자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팬이 아니야. 이번에 내가 발리서클 로고를 맡긴 화가가 디자인한 거지.”

종종 발렌티나에게 아부성 발언을 할 뿐 자신이 준비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별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로고야 언젠간 정해야 했겠지만 일이 그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가 작품이라고? 디자이너가 아니라?”

“응.”

화가들이 그림을 잘 그리기는 했지만, 디자인 감각까지 항상 좋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디자이너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누군데? 이름이 뭔데?”

“저번에 구겐하임 갔을 때 있잖아. 사실 윤예준 화가를 만나러 갔던 거야. 로고를 부탁하기 위해서.”

발리는 자신이 윤예준의 로고 디자인을 따냈다고 뒤늦은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새 사업에 대한 포부를 자세히 적어 제안했더니 감동한 윤예준으로부터 수락 메시지가 전달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윤예준? 그래…… 못하는 게 없는 화가라고는 들었지.’

발렌티나가 그를 알기 전부터 예준은 유명했다.

발리와 친한 필립의 영화를 계기로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 명성만은 잘 알았다.

순수미술부터 미디어 작품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게 인터넷이나 발리에 의해 전해 들은 것들이었지만,

구겐하임에서 ‘바림 기법’에 대해 설명하던 모습만큼은 직접 봤다.

“뭐야. 내가 디자인해준다고 했을 때 그렇게나 거절하더니. 나를 거절하고 윤예준에게 맡기려고 그런 거였어?”

발렌티나의 손이 벌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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