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구겐하임 (2)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 현재와 협업을 시작한 샐리 스털링의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스털링건축사무소의 현 CEO라는 뜻이었다.
샬롯의 설명에 의하면 평소에 이런 모임에 나오는 건 샐리의 몫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한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제임스가 몽땅 덮어쓰게 된 거라고.
그래도 미술품에 관심 많은 건 마찬가지라 크게 어려움 없이 즐기는 것 같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제임스 스털링에게 명함을 건네받고 자리를 옮긴 이후로 굉장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건 ‘칼 데빌’과 ‘아이다(Ai-da)’라는 예술가였다.
그들은 샬롯을 포함해 매우 친밀해 보였는데, 이런 프라이빗 예술 파티에서 만나 사적으로만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각자 소개를 주고받았다.
칼 데빌은 조각가였고, 아이다는 ‘AI미술’이라는 걸 하는 예술가였다.
“얘네들 둘 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 천재 소리 듣는 사람들이야.”
“샬롯! 천재라니! 호랑이 앞에서 고양이 자랑하는 거야? 여기서 천재 티 내봤자 내 낯만 붉어진다고.”
칼이 정말 붉어진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며 손사래 쳤다.
그래도 그 분야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니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AI미술이라……’
조각이라는 건 굉장히 익숙했지만 AI미술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해보지 않은 분야라는 것만은 둘 다 같았지만 말이다.
“나중에 AI 미술에 관심이 생기면 연락하세요. 들어보니 뭐든 안 가리고 하신다던데.”
“에이. 이분은 조각이 더 어울리지. 꼭 조각에 먼저 매력을 느끼셔야 해요.”
칼과 아이다는 티격태격대면서도 내게 명함을 내미는 걸 잊지 않았다.
조각이든 뭐든 해보지 않은 분야라면 관심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며 명함을 챙겨두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매달 파티가 열린다는데, 이곳이야말로 현대와 고전을 가리지 않고 미술에 대해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 다음엔 누구와 대화를 나눠볼까 고민하면서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누구에게 가까이 가든 내겐 모두 호의적이었다.
그때 한 축구복장을 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만면에 미소가 번져 있는 상태였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아버지와 함께 미리 알아본 데이비스 발리였다.
“오……! 물론이죠. 이곳으로 불러주신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볼 수 있었어요.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하네요.”
“별말씀을요. 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곳은 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축구만큼 예술에도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의 말대로 굉장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아버지가 기뻐하며 팬이라고 말하자 발리는 유쾌하게 하이파이브를 권했다.
나는 샬롯과 헤어지고 발리와 함께 2층 복도로 향했다.
난간 너머로 1층 파티장을 잘 내다보기 위해서였다.
“로고 디자인을 하기 전에 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셔서 옷도 저답게 입고 나와봤습니다.”
발리는 숫자 10이 적인 축구 유니폼 차림이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쩌다 축구선수의 꿈을 꾸게 되었는지, 얼마나 간절했는지.
은퇴한 지금의 심정은 어떤지.
‘은퇴하면서 갈 곳을 잃은 꿈을 지속시키고 싶은 거구나.’
하지만 그의 꿈은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유명세를 생각하면 마을 축구회 같은 데에 껴서 함께 경기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고 현역 활동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자신이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보았다고 했다.
“저와 같은 스포츠인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위한 운동복을 디자인함으로써 그 꿈을 응원하고 싶어요. 선수로 발탁되어 유니폼을 처음 지급받았을 때의 그 설렘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 감정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예술 활동 아니겠습니까? 저는 사업을 통해 예술을 하고 싶은 거예요.”
단순 비유는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스포츠와 예술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병행함으로써 스포츠 의류와 예술작품을 혼합시키고 싶어 했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예술을 하기에 딱 좋은 요소라고 생각한 나의 마음과 같았다.
발리만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 그 생각을 감출 이유는 없었다.
바로 로고를 통한 예술 활동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긴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사업가 중에서는 나와 가장 비슷한 것 같아.’
나는 즉시 계약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몫은 얼마나 챙길 수 있을까요?”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디자인할 기회도 매우 좋았지만 그렇다고 돈을 조금만 받아도 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사용료는 맞춰드려야죠. 저작권을 최대 5년까지 인정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그런 건 너무 당연한 거고, 저는 오히려 사업을 오랫동안 성공시키겠다는 포부를 더 강력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로고에 대한 5년 저작권.
발리가 전한 전문가 의견에 의하면 ‘발리서클’의 경우, 향후 5년 매출의 10% 정도를 저작권료로 지급한다고 했다.
확실히 금액적으로는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각종 스포츠 장르별 전문화된 선수복, 체육복부터 신발까지. 디자인에 참여하는 스포츠 자문가와 예술가들도 기용할 거예요. 그렇게 해서 빠른 시일 내에 스포츠 의류 하면 누구나 저의 ‘발리서클’ 떠올리게 만들 겁니다.”
나와 발리는 그 자리에서 즉시 계약서를 완성했다.
***
계약서를 다 쓴 후로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1층에서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발리는 동시에 그쪽을 내려다보았다.
두 명의 예술가가 한 그림을 사이에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발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시선을 거뒀다.
“종종 저렇게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럼 듣던 사람들이 가세하기 시작하고, 파티가 끝나기 전에는 반드시 결론을 내고야 말죠.”
나는 흥미를 느끼며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러자 관심을 껐던 발리도 나를 따라 다툼이 일어난 곳으로 다가갔다.
문제의 작품은 르누아르의 <이레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이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레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
“글쎄 르누아르 정도 되는 대가라면 가능하다니깐. 이건 블렌딩하면서 한 번에 그린 게 맞아.”
“아니. 대가가 무슨 초인이라도 되나?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걸 어떻게 일일이 블렌딩 해? 이건 투명하게 덧바른 글레이징 기법이라니까 그러네.”
작품 중앙에 앉아 있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두고 기법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뒤로하고 작품 앞으로 다가가 섰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로서 나와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내가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나를 굉장히 반겼다.
“음……? 오! 여기 유명하신 윤예준 화가께서 오셨네. 이분이라면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해주실 거야.”
“무슨 소리. 화가님. 이게 어딜 봐서 블렌딩한 겁니까? 그게 가능해요?”
나는 어떤 기법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림을 관찰한 게 아니었다.
왜 그들이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지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음. 알겠네요.”
나는 두 수집가를 돌아보았다.
먼 곳에 멈춰선 발리가 선망 어린 눈으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할리우드 셀럽들을 비롯해 뉴욕의 저명한 각계 인사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싸움에 관심이 생겨 여기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관심을 끌 기회도 얻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머금고 있는 빛 덕분에 옷이 거의 반투명하게 비치고 있죠? 확실히 이걸 단순 블렌딩으로 표현하는 건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글레이징이라고 보기에는 색채가 자연스럽게 섞여들고 있잖아요? 글레이징을 거듭했다면 어찌 되었든 층진 부분이 발견되기 마련인데 말이에요.”
그 말에 글레이징을 주장하던 이가 즉시 반박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블렌딩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불가능한 표현이잖아요? 블렌딩이라고 주장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르누아르만의 글레이징 방식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더 합리적인 설명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았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블렌딩으로 보기에도, 글레이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더 가능성 있는 건 글레이징이었지만, 솔직히 가능성이 낮은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르누아르가 굳이 악취미를 발휘해 어울리지도 않은 기법으로 실력 자랑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이건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죠?”
두 수집가가 입을 모아서 말했다.
“바림 기법이에요.”
나의 말에 두 수집가뿐만 아니라 구경꾼들도 모여들어 작품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곤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바림이라면 덧그려진 색이 더 밝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얀 옷 위에 갈색 머리를 바림으로 덧그렸다니……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아요.”
어두운색 위에 밝은색을 그리는 게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건 불변의 사실이었다.
반대로 어두운색을 덧칠하면 색이 섞여 전체적으로 혼탁해질 수 있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림 기법을 적용할 이유도 솔직히 없고 말이다.
“바림 기법이 확실해요. 조명이 어두워서 제대로 안 보이는 거죠. 잠시 조명을 켜볼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리가 관리자에게 조명을 부탁했다.
그러자 곧 음악이 꺼지고 미술관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여전히 낯선 인테리어였지만, 낯선 만큼 현대 미술관다운 분위기였다.
새삼 이곳이 미술관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 머리카락 근처가 어두워 보이는 게 블렌딩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맞네! 나는 그 근처에 연하게 글레이징을 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소녀의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옷은 그림자 때문에 어두워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으니 그림자가 지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확인하기로는 그게 그라데이션 표현인지 그림자 표현인지 분명치 않았을 것이었다.
‘다들 일부분에만 집중한 거야.’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살피면서 그곳을 봤다면 그 비밀을 알아채는 건 쉬웠다.
머리카락보다 밝은 부분엔 바림 기법을 적용할 수 없으니 그림자를 그림으로써 우선 톤을 낮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조명이 켜진 김에 한 걸음 물러서며 그림을 감상했다.
“언제 봐도 훌륭한 그림이네요. 그렇죠?”
나는 정말로 르누아르의 그림에 감탄해서 한 말이었지만, 이제 사람들의 안중에 그림 같은 건 없었다.
오직 나만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별거 아닌데도 눈빛들을 보아하니 다들 마음에 들었나 보네.’
나와 샬롯의 친분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는 그들은 샬롯의 눈치만 보며 나를 소개해주기를 기다렸다.
알음알음 소개받으며 인맥을 넓혀나가는 이곳 분위기상 선뜻 다가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 상관없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는 이미 대화를 텄고 말이다.
한쪽에 서 있던 샬롯은 아예 가운데로 빠져나와 크게 말했다.
“한 번에 소개해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