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구겐하임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는 노란빛을 내는 달팽이 집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9시에 보기로 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파티는 그 전부터 미리 시작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헤맬 일이 없도록 미리 장소를 봐두려고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주변을 둘러보거나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막상 미술관 건물을 보자마자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너무 복잡해 보이는데?”
중앙의 거대한 달팽이 집 모양 건축물을 기준으로 주변에 부속 건물들이 상당히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파티 장소를 살피려면 직원이라도 하나 붙잡아야 하겠지만 이미 미술관은 폐관되어 직원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우선 정문으로 다가가 내부를 살폈다.
정문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해도 구불구불 오래 걸어야 했다.
챙겨온 미술도구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조금 지쳐 있는 상태였다.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내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아트 에프터 다크라더니. 진짜 어둠뿐인데요.”
“그러게. 아빠가 좀 알아볼게.”
아버지는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차량들이 미술관 한편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저녁에 이루어지는 파티는 정문 개방 없이 별도의 통로를 이용하게 돼 있대. 저 사람들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장소를 잘못 찾아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아버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미술관에서 파티를 여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주변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차량들은 건물 옆 주차장에 주차되었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은 미술관 건물을 구석구석 헤쳐 한 작은 통로 앞에 줄을 섰다.
별도의 통로라는 곳을 찾은 것이었다.
굉장히 정중한 태도의 직원이 줄을 선 방문자들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초대장을 한 장씩 나눠 갖고 손에 꼭 쥐었다.
“그럼 이 사람들이 다 돈 많은 수집가들이라는 거예요?”
“그런가 봐. 돈이 많으니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것 같은데. 아마 얼굴만 봐도 알지도 몰라.”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무함마드였는데, 그런 그가 여기 와 있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함마드는 펭펭이 상품을 쓸어 모을지언정 비싼 미술품에는 수집욕을 불태우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방문객들이 이용하고 있는 통로는 아마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을 것이었다.
처음 와본 나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우선 문에만 해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문을 통과한 뒤 파티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계속 걸은 끝에 마침내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니.”
아버지가 감탄했다.
이곳이 실제 미술관이 맞기는 한지 시끄러운 음악이 재생되고 있었다.
파티장 중앙에 서서 몸을 흥겹게 흔드는 한 남성이 낯선 장치를 조작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북과 같은 타악기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파티장 전체를 둥둥- 울릴 정도로 소리가 좋은 악기였다.
갑자기 엉뚱한 공간으로 내던져진 기분에 얼떨떨했다.
그럼에도 파티 분위기만큼은 확실해서 지쳤던 몸이 마음에서부터 풀어지기 시작했다.
“어? 여기 아까 본 그 건물인가 봐요.”
내가 천장을 가리키며 묻자 아버지가 함께 올려다보았다.
달팽이 집의 내부 모습과 같은 형태의 넓고 높은 천장이었다.
하얗고 깔끔한 난간마다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앞서 입구를 통해 들여다봤을 땐 칠흑처럼 어둡고 아무런 인적도 느껴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즐거워 보이네.’
세계적인 갑부들이라면 매우 고귀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치들이 대부분인 법인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즐겁게 웃으며 춤을 추는 모습만 봐도 사고가 굉장히 자유롭고 열려있을 게 분명했다.
조금 둘러보려는데 어딘가에서 샴페인 뚜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량하고 속 시원한 소리였다.
소리가 난 방향을 보자 한 여성의 손에 들린 샴페인 병에서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 샴페인!”
내가 외치자 아버지는 그쪽이 아니라 즉시 나를 돌아보았다.
“...... 샴페인을 알아?”
***
“곳곳에 앉을 곳도 많은 것 같은데, 조금 쉬면서 기다릴까?”
예준은 파티장 풍경에 정신이 팔린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파티장 같은 데는 가본 적도 없는 아이니. 이 모든 게 신기할 수밖에.’
미술관과 파티장의 조합이라니.
예준에겐 파티장만 해도 낯설 텐데 이곳부터 보게 된 것이었다.
물론 구겐하임 미술관은 처음 와본 민제로서는 이곳이 원래 미술관이었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예준과 민제는 함께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들끼리 신나게 춤을 추던 유명인들이 은근히 이쪽을 힐끗댔다.
물론 민제가 아니라 예준을 보는 것이었지만 민제도 그 시선을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장소의 최고 유명 인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술관에서의 파티뿐만 아니라 유명인사들에게 받는 시선이라니.’
해외 유명 작곡가나 유통회사 오너, 책 표지에서만 보았던 석학까지.
너무 유명해 오히려 가짜 같아 보이는 이들이 예준을 힐끗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술관에서 춤까지 추고 술도 막 터뜨리고 그러는데, 그림을 그린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죠?”
예준은 파티장 구경을 멈추지 않고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래.
미술도구를 챙긴다기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미 챙긴 이상 더 당황할 것은 없었다.
인상 깊은 장소에 미술도구까지 갖춰진 상황이라면 예준은 그리고야 마는 아이였으니까.
‘이곳이 예준이에게 좋은 영감을 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면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기도 좋았다.
온 김에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는 게 좋겠지.
민제는 예준과 함께 주섬주섬 미술도구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예준이 활용할 색들을 짜내는 동안 민제는 캔버스 판에 천을 고정시켰다.
예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붓으로 캔버스를 문지르며 파티를 계속 내다보았다.
그러길 몇 초쯤 지났을 때 본격적으로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준은 처음엔 어둡고 탁한 색으로 고전적인 미술관의 모습을 그려냈다.
어두운 명암 표현에 타고난 예준이 그리는 그림다웠다.
하지만 포인트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평이한 그림이었다.
포인트가 없이 어두운 배경만을 균형 있게 그리는 것만 해도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준은 어두운 배경을 표현하면서도 최대한 묽고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저 그림을 배경 삼아 무언가를 덧그리려는 거야.’
민제는 거기까지 깨달았을 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긴 통로를 지나 이곳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 격한 심박이었다.
예준의 붓이 움직일수록 미술관의 모습은 조금씩 깊어져 갔다.
오래 묵은 전통의 색상이었다.
그렇게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예준은 붓을 물통에 담갔다.
그리고 새로운 붓을 꺼냈다.
이미 훌륭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고전적이긴 하지만 어떤 고전 작품보다도 안정적이고 고풍스러웠다.
고전의 모든 것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볼 때마다 놀라워.’
이젠 오히려 예준이 고전 미술을 하는 걸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민제는 그때마다 새삼 놀라는 자신의 모습에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진하게 그리면서도 얇게 펴 바른 보람이 있었다.
그림은 몇 분 사이 금방 말랐고, 예준은 이제 유화 물감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조금 희석시키기는 했지만, 물을 많이 섞어 배경을 그릴 때와는 비교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이 정도면 캔버스에 잘 안 묻을 텐데.’
심지어 이미 수채화 물감이 자리 잡고 있는 캔버스였다.
하지만 예준의 물감은 딱 물감의 점도를 유지한 채 잘 발라졌다.
파티장도 어둡고 예준의 그림도 어두웠지만 새롭게 바르기 시작한 붉은 물감은 민제의 시선을 시리게 붙잡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표현법이야.’
미술관 곳곳에 화려한 색채들이 샴페인 터지듯 번져 묻었다.
점도와 붓 자국을 고려하면 임파스토 기법인 듯했지만, 그마저도 차이가 있었다.
임파스토는 오로지 인상주의적 기법일 뿐이었지만, 예준의 그림에 폭죽처럼 덧그려지는 유화는 캔버스와의 반발 효과를 주로 얻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끝낸 예준이 두 번째 붓을 놓았다.
언젠가부터 리틀마네라고 불리지 않게 된 예준이었다.
확실히 이젠 마네의 그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장점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예준에게 마네식의 그림은 그림에 동원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게 된 것이었다.
“역시. 이 작품은 제목이 뭐야?”
예준은 바로 대답했다.
“<현대 살롱전(Exposition Salon Moderne)>이요.”
“살롱전?”
과거 프랑스 화단에서 프로 화가의 작품을 선정한 최고 등용문 이름이었다.
‘예준이가 살롱전을 어떻게 알지?’
하긴.
뭐든 다 아는 아이니까 그럴 만도 했다.
예준이 좋아하는 마네도 살롱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현대 살롱전>이라……’
민제는 예준의 그림을 다시 보았다.
그리는 순서대로만 작품을 감상했기 때문에 전통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현대의 파티를 표현했거니 했다.
그럼 수채물감과 유화의 반발 효과가 왜 활용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그저 전통을 낯선 기법의 덧그리기로 그저 희롱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 아트 에프터 다크 파티에서 느낀 예술의 본질에 접근했다.
미술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통과 현대의 내적인 반발.
현대의 원인으로서의 전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작품 속 불꽃은 다른 어디도 아닌 고전 미술관의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맞아. 현대에 살롱전이 남아 있었다면 꼭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마네 같은 화가들은 이런 화려한 파티를 좋아했을 테니 말이야.”
“맞아요.”
예준이 담백하게 동의했다.
***
그림을 다 그린 뒤 도구를 정리하며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컬렉터들은 술이 올려져 있어야 할 대리석 테이블에 그림이 올려져 있으니 신기해했다.
나의 <현대살롱전>을 궁금해하는 시선들이 느껴지자 나는 아예 그림을 세워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내 그림과 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볼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이 완전히 임박했을 때쯤 반가운 얼굴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뜻밖의 만남이었지만, 이런 장소라면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오, 윤 화가님! 이런 곳에서 다 만나고. 너무 반갑네요!”
여러 가지 일로 연을 쌓았던 샤를로트 로렌스였다.
그녀도 미술품 수집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블랑쉬 네즈>를 살 때 큰돈을 과감하게 썼듯이 말이다.
“유명한 화가가 1층 로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기에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예외 없이 화가님이셨네요.”
“하하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네. 전 저기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들었을 정도니 이곳 사람 모두가 화가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닐걸요?”
샬롯은 양해를 구하고 내 그림을 얼마간 감상했다.
“화풍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여전히 너무 좋은 그림이네요. 색채 활용이 뛰어나셔서 그런지 이렇게 컴컴한 데서도 아주 선명해 보여요.”
“하하, 좋은 감상평을 주는 건 여전하시네요. 그나저나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샬롯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 간단하게 전했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 덕분에 백설공주 아역 이미지를 완전히 벗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오히려 더 과감한 작품을 해볼 생각이죠.”
곧 들어갈 작품은 보물 도난범을 잡는 범죄 수사물이라고 했다.
스토리가 정해진 걸 보니 조만간 극장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제적으로 범인을 잡는 ‘인터폴 수사관’이 된 샬롯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고도 남을 작품이었다.
“맞다. 필립 감독님도 계신데. 인사라도 나누실래요?”
“아, 정말요? 지금 여기 계세요?”
“네. 제가 초대했어요.”
샬롯이 한쪽을 가리키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을 보니 정말로 필립이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이에게 무어라고 전달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샬롯과 함께 다가서자 필립이 악수를 권했다.
“하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화가님! 활약은 낱낱이 전해 듣고 있습니다.”
“저도 다음 작품 기대하고 있어요.”
필립은 함께 대화를 나누던 남자와 나를 서로 인사시켜주었다.
앞서 미리 나에 대해 전해 듣는 걸 보았다.
공식적인 예의 차리기였을 뿐이었다.
제임스 스털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마찬가지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워낙에 유명하셔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의 손을 잡았다.
힘을 꽉 준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힘이 넘치는 남자라는 건 느껴졌다.
“일전에 제 딸을 직접 만나셨다고 들었는데, 저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네?”
딸이라.
생각나는 일은 없었다.
제임스 스털링, 제임스 스털링.
나는 그의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무언가 생각 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