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승리의 콜라보 (2)
예준은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사흘 정도의 말미를 부여받았다.
모두가 터무니없는 허세라며 예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새롭게 응원단장 역할을 맡게 된 무함마드조차도 그 방안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터무니없는 일을…… 이룬다는 거잖아?’
무함마드는 바로 다음 날 예준의 방으로 찾아갔다.
최근 미들타운 교육구를 되살린 일로 큰 화제를 모은 윤예준의 약속이었다.
겉으로는 예준의 말에 코웃음을 치는 것 같아도 마음만은 무함마드와 같았는지, 선수들은 조금씩 연습에 열성을 띠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문을 두드리자 예준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잘돼가고 있……”
어제까지만 해도 무함마드의 눈 밑에 있던 다크서클이 이번엔 예준에게 있었다.
물론 예준도 자신의 몰골이 피곤해 보인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아,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무함마드는 예준을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지난번엔 1층 현관 앞까지만 와봤을 뿐이었다.
‘굉장히 좁은 데에 살고 있구나.’
무함마드가 보기에 그곳은 자신의 집 안방만큼의 면적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조금 내부를 둘러보려는데 바닥 한편에 가득 쌓인 수채화 도안들이 발견되었다.
“이건 뭐야?”
무함마드는 그것을 하나씩 펼쳐보았다.
미들타운 미식축구팀의 엠블럼부터 시작해 럭비공, 별, 왕관, 문구 ‘VICTORY’까지.
일정한 비율에 맞게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알아보니까 카드섹션 응원법이라는 게 있더라구요. 관중들이 카드를 뒤집으면 멀리 너머에서는 전체 그림이 보이는 거 있잖아요? 이런 걸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더라구요.”
“뭐?”
예준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도트를 찍으며 말했다.
솔직히 무함마드는 조금 실망했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우리가 생각할 땐 그냥 타이밍 맞춰 카드를 들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박자를 맞추려면 소통도 잘 돼야 하고…… 카드 뒤집는 것만 해도 연습이 1~2주는 걸릴걸?”
예준이 찍고 있는 도트는 한 미식축구 선수가 럭비공을 옆구리에 끼고 돌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럴 것 같더라구요.”
“그럼 어떡해?”
예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소통은 응원단과의 싸인이 맞으면 돼요.”
“싸인이야 그렇다 치고…… 도안 개수는? 너무 많지 않아? 그걸 다 외울 수 있을까? 어떤 순서로 들어 올릴지 말이야.”
“그림을 완성하면 책자 형식으로 인쇄를 맡길 거예요. 박자에 맞춰 페이지 순서대로 넘기기만 하면 여기 있는 선수가 적진 돌파에 성공하는 모습이 나타나겠죠.”
책자 형식이라.
그런 거라면 예준 말대로 하루 만에도 연습이 끝날 수도 있었다.
아니 하루가 어딘가.
미리 미들타운 대학교 측 관객들이 앉는 좌석마다 책자를 배치해두고 경기 시작 전에 예행연습만 하면 될 것이었다.
“오, 그러네! 이거 되겠네!”
“그렇죠?”
“응. 그런데 저렇게 정교한 그림이 가능해? 저 픽셀만큼 객석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예준은 프로그램을 전체 축소해서 무함마드에게 한눈에 보여주었다.
“한 장의 카드에 여러 개의 색깔이 격자 모양으로 더욱 정교하게 들어갈 거예요. 그만큼 정교해지면 카드의 배열이 비뚤비뚤할 때 위화감이 크게 들 테니 객석 사이즈를 고려해 가득 찰 만한 사이즈로 맞춰뒀어요. 들어 올려서 앞뒤 좌우 사람과 거리를 맞추기만 하면 될 정도로요.”
예준이 생각해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카드 배치를 딱 맞춘다고 해도 격자형의 접합부는 눈에 크게 띌 것이었다.
현실적인 그림으로 그리면 더욱 좋겠지만 카드섹션 응원법이라는 점을 살리기 위해 ‘격자형 그림’을 고집했다고 했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싸인을 주고받는 방식도 체계적으로 고민해두었다.
“그리고 만약 훈련이 더 잘 된다면……”
예준은 거기 사소한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카드섹션에 역동감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준의 설명을 듣는 동안 무함마드는 그 응원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자연스럽게 재생되었다.
“여기, 오실 것 같아서 간단한 응원 가이드랑 도안 준비해둔 거예요. 오늘 오전 중으로 주문 맡기면 미들타운 경기장으로 응원 카드가 완전히 배송될 거거든요? 책자로 나올 테니까 표면에 숫자 표시를 해뒀어요. 그걸 지정된 좌석마다 배치해주시면 돼요.”
무함마드는 예준에게 응원 가이드와 도안을 가지고 즉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어제보다는 조금 적극적으로 연습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 그리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무함마드는 즉시 카드섹션 응원법에 대해 설명했다.
카드섹션이라는 말에 그들도 처음엔 실망했지만, 무함마드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다 들은 그들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미들타운 대학교는 애초에 미식축구로 유명한 대학이기 때문에 관람을 오는 학생들 간에도 죽이 잘 맞았다.
전통적인 응원가도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박자를 맞춘다면 책장을 넘기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이건 남은 응원단의 역할이 제일 중요해!”
무함마드는 응원단원 모두에게 통제자 소통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객석 구역마다 한 명씩 응원단원을 배치하고 무선으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관중에게 박자를 세어줘야 했다.
“오. 해볼 만하겠는데요?”
“그렇지?”
지켜보던 선수단장이 호응해주었다.
관중을 직접 통제해본 적은 없지만,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경기가 공을 든 선수들이 탐색전을 펼칠 때처럼 분위기가 진정된 상태라면 충분히 통제가 가능할 것이었다.
“통제 타이밍은 제가 알고 있으니까 일단 연습해주세요. 저희도 훈련을 시작할 테니까요.”
***
카드섹션의 주문과 제작은 빠르게 끝내두었다.
그 이후부터는 응원단장을 맡은 무함마드가 전적으로 진행해주기로 했다.
일전에 이야기했던 UN 연설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영상을 공부해두길 잘했어.’
영상을 이루는 픽셀에 대해 떠올릴 수도 있었고 프레임 수를 활용해 움직임도 구현했다.
물론 이런 응용으로 기뻐하기엔 영상 그 자체로 얻은 성과가 이미 크기는 했다.
경기장 카드섹션이라는 참고 사항도 있고 더 발전까지 시켰다.
지금부터는 그들의 의지에 달렸지만, 무함마드라면 잘 격려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예준아. 연습은 잘 해뒀어?”
뉴욕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물었다.
연설에 대한 연습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냥 내 생각 듣고 싶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건데요, 뭐. 연습할 게 있겠어요?”
“응? 그래도 엄청 높은 사람들 앞에 모여서 하는 연설인데.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해야 했더라도 이미 늦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끊임없이 해왔다. 이번에는 붓이 아닌 말일 뿐이었다.
경직되고 어려운 자리라고는 하나 초대받은 건 나였다.
어차피 나를 위한 무대이니 무난한 관용구로만 연설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뭐, 하긴. 예준이가 말재주도 워낙 뛰어나기는 하지.”
아버지는 별걱정 없다는 듯 몸을 파묻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뉴욕 유엔 본부에 도착했다.
낮고 긴 형태의 의회장 건물과 높은 사무실 건물의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연설장은 굉장히 컸지만 스포츠 경기장처럼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들어차 있지는 않았다.
아버지 말대로 ‘높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인원수에 연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왔다, 왔다!”
역시나 이곳에도 기자들은 있었다.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종종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들끼리 소곤거렸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었다.
한 해 동안 세계적으로 있었던 평화에 관한 이슈를 되짚으며 더 나은 내년을 기약하는 내용의 논의들이 오갔다.
곧 내가 연설할 차례가 되었다.
연단으로 오르는 동안 내게 스포트라이트가 강하게 집중되었다.
막상 연단에서 마주 보니 사람이 한 수천 명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익숙하게 마이크가 잘 켜져 있는지 확인한 뒤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최근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민들은 한동안 잔인한 딜레마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하자 사방팔방에서 터지던 플래시 소리가 잠잠해졌다.
“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음 직한 미숙함을 악마화할 것인가, 아니면 40명을 쏴죽인 악마를 두둔할 것인가. 그들은 둘 중 한 가지를 무조건 골라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으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 또 몇 명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죽었죠.”
누구든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마치 선악과로 인해 모두가 원죄를 타고나게 되었듯이 말이다.
“편안함은 우리를 죽이지 못하지만 불편함은 우리를 죽음에도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불편함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나쁘게 만드는 그 딜레마의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굴려 온 것이겠죠.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면 의외로 해결방안은 간단한지도 모릅니다. 결론 낼 수 없는 논의에 목매는 것보다는 모두가 망각하고 있는 중요한 하나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봄으로써 말이에요.”
비난을 빼놓고 나면 적대자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쉬웠다.
일의 심각성을 미뤄놓고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원하는 게 바로 무엇인지.
딜레마로 인해 논의하지 못했던 안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의견을 나눠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딜레마가 아니고서야 그런 논의는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었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의 논의로 얻어낸 총기 등록법 강화가 바로 그 첫 번째 성과였다.
“이때 저는 ‘화합’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봤습니다. 서로 다른 음은 음악을 만들고, 다른 색채의 물감들이 그림을 만들죠.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어요.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걸까? 모든 판단을 정지하고 함께 ‘화합’이라는 가치만을 바라보면 돼요. 한 번 연습해볼까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사람들을 더욱 집중시켰다.
그러자 잠시 플래시가 터졌다.
“피해 학생은 평소에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속상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의 총을 훔쳐 와 난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죠. 자, 여기까지 들었을 때 누가 잘못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괴롭힘을 당했으니 잘한 복수인가요? 그럼에도 40명이나 죽였으니 그 아이가 나빴나요?”
잠시 뜸을 들이자 그 조용한 와중에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둘 중 하나를 생각하셨겠지만, 이 사건의 원인은 그 둘 중 무엇도 아니에요. 원인은 하나뿐. 그곳에 ‘화합’이 없었다는 사실뿐이죠. 도덕적으로는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누구를 처벌할 수 있겠느냐고 묻곤 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딜레마의 연장이었다.
여태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소모적인 고민일 뿐이었다.
‘미래에 죽을 이들을 위한 최고의 애도는 그 사건을 방지하는 일이야.’
그리고 화합을 주창하는 건 미래의 사고를 방지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저는 저의 작품 <화합>과 <장미의 섬>을 통해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처벌도 비난도 아닌 화합뿐이라고 말입니다. 다툼을 그만두고 화합해야 합니다. 한 명의 어린이로서, 한 명의 예술가로서, 그렇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장내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가 끝날 때까지 연단 위에서 계속 기다렸다.
연설 시간만큼이나 긴 박수가 이어졌다.
연설 라이브 영상에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에는 ‘세계를 감동시킨 연설가’라는 수식도 있었다.
-윤예준 말이 맞다. 정말로 피해자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다면 무엇이 해결방안인지 정도는 더 깊게 고민해봤겠지.
-많이 반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지역 사는 사람인데요, 솔직히 저런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면 생각만큼 그리 위험한 건 아닌 거 같네요.
연설 내용 중 특히나 음악과 미술에 대한 비유가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말을 따서 ‘하모니즘’이라는 말이 새롭게 생겼다.
이번 <화합>과 <장미의 섬>에 대해서 말이다.
처음 내게 리틀마네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던 한 평론가에 의해 퍼진 말이었다.
‘하모니즘 예술’
그렇게 내가 처음으로 성취한 예술 사조의 이름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