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96화 (96/241)

96화. 승리의 콜라보

결국 [개인총포등록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개인 총기의 긍정적인 쓰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고 후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는 반대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전면 불법화를 주장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견 충동적인 살인이 문제시되어온 만큼 신고제는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단 법안이 통과된 만큼 상황을 지켜보자는 데에 동의했다.

어차피 계속 발전시켜나갈 법안이기 때문에 문제점 지적 정도는 감안할 일이었다.

[로드아일랜드 시민연대, 윤예준에 의해 주 법원에 대한 광장 투쟁 승리 경험 쌓아.]

[생명에 대한 윤예준의 남다른 관심. 그의 역대 작품 모아보기]

그 과정이 법적 절차를 때마다 키워드만 바뀌며 계속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법률 제정 과정이 끝났을 때, 제일 처음 그 사실을 알려온 건 무함마드였다.

-법 통과됐대! 너 그럼 한국 가는 거야?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나조차도 일상생활은 하면서 뉴스를 살폈다.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전화가 왔다는 건, 휴대폰 알람이라도 맞춰놓고 매 순간 궁금해했다는 뜻이었다.

“아뇨.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로 한국 가는 건……”

-가기 전에는 꼭 말해줘야 해. 아니, 이참에 밥이나 한 끼 하자. 내가 사줄게! 한국인들은 밥 약속 자주 잡는다면서?

한국인으로 살아본 지 2년도 되지 않았다.

밥 약속을 마음대로 잡을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이 생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총기 법안이 불법화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는 아쉬움이 더 큰 모양이었다.

물론 한국에 즉시 가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아랍 왕자가 밥을 사준다기에 내심 궁금하기도 했건만, 결국 약속 장소는 드림캐쳐 스튜디오 구내식당이었다.

“미안. 나는 일해야 하잖아.”

인근 어느 식당보다도 맛이 좋고 값이 싼 건 동의하지만, 폐장쇼를 진행하면서 많이 와본 식당이었다.

그렇다고 얻어먹는 입장에서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내게 큰 호의를 가져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일만 하고 계신 거 맞아요?”

여전히 표정은 활발했지만 특유의 피곤한 낯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도 내려앉아 있었다.

“아. 나 피곤해 보여?”

“네.”

“요즘 업무 외로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고 있는 게 있어서. 사실 잠을 잘 못 자.”

신체적으로 피곤한 반면 정신적으로는 별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업무 외 애니메이션이면 개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는 것 같은데. 혹시 그때 그 <당근전사>요?”

“아니야. 그건 실패한 작품이잖아.”

“모든 캐릭터가 자식 같다고 하셨잖아요.”

무함마드가 웃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엄하지. <당근전사>의 무엇이 문제인지도 대충 감을 잡았고 말이야.”

“뭐가 문제였던 것 같나요?”

“일단 토끼와 당근 사이의 연상 관계도 뻔하고, 당근을 무기로 한다는 아이디어도 뜬금없었어. 브리오슈는 안 그랬잖아? 좋은 캐릭터는 그 디자인 자체에서 딱 떨어지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당근전사>는 기본적으로 배경 서사가 받쳐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으니.”

생각보다 성실한 한계 파악이었다.

“그러네요. 캐릭터가 단순해야 한다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당근전사>는 너무 섬세하고 구체적이기는 했죠.”

내가 칭찬을 가장해 동의하자 무함마드는 굉장히 우쭐해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히 단순하고도 단순하고 단순한 걸 캐릭터로 삼았어. 당근이면 당근. 근데 당근에도 부위가 있잖아? 부위마다 또 세포가 있고. 그걸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얼마나 쪼개셨는데요?”

“쪼개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 전자 단위로 쪼개도 결국 가장 작은 건 ‘감정’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어. 감정엔 입자도 없잖아?”

입자가 없는 수준이면 더 이상 작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그는 감정들. 즉 슬픔, 기쁨, 우울, 분노 등의 감정 캐릭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겠다고 했다.

캐릭터를 단순화하겠다는 그 목적만큼은 이룬 것 같았다.

“들어보니 진심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기존의 드림캐쳐 애니메이션들과도 결이 많이 다르고요. 응원할게요.”

“아! 응원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곧 미들타운 대학교와 워싱턴 앤 리 대학교가 미식축구 대회를 치른대. 그거 응원하러 갈래?”

아무래도 무함마드가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면 캐릭터들의 대사가 2초 이상 끊기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무함마드는 RISA대학교를 나오셨다면서요?”

“꼭 모교여야만 참여하나? 난 항상 내가 속한 미식축구팀을 응원하고 싶었단 말이야. 미들타운에 10년 넘게 살았으니까 미들타운 대학교 응원할 수 있는 거잖아?”

“저는 몇 달 안 됐는데요.”

내가 고민하는 동안 무함마드는 남자의 로망이라느니, 경기와 응원의 콜라보가 꽃피는 스포츠라느니 계속 미식축구의 매력에 대해 쏟아내며 나를 설득했다.

‘전생에 경마장을 좀 다녀보기는 했었지.’

그 스포츠마다 주변 열기가 얼마나 흥분되는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꼭 경기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 미식축구라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나만의 의견이 아니야! 미국에서는 가장 잘나간다고. 그리고 미들타운 대학교랑 워싱턴 앤 리 대학교는 미국 동부에서 처음부터 1, 2위를 다퉜던 대학교란 말이야. 그런 우승 후보 둘을 예선에서부터 붙여 놓다니. 이건 너무 잔인한……”

무함마드는 계속 떠들었다.

‘꽤 인기가 많은가 보지?’

미술이야 스스로 고귀한 채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대중예술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무엇에 즐거워하는지, 그 즐거움이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공감하는 게 중요했다.

단순 시간 낭비는 아닐 것 같았다.

“좋아요. 가보죠.”

***

무함마드는 그 주 주말 나를 바로 미들타운 대학교로 데려가 주었다.

경기가 한참 남은 시점인데도 말이다.

그들이 연습하는 모습부터 보아둬야 실제 경기 때 더 가슴이 끓어오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 영화도 하이라이트 부분만 봐서는 감동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지.’

나와 무함마드는 미식축구와 응원단 연습이 한참 진행 중인 경기장 객석 한쪽에 앉았다.

“이게 뭐야……”

무함마드는 굉장히 실망한 듯 울상을 지었다.

전날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에 열중했는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원래의 연습 현장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무함마드 본인에 비하면 확실히 열정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선수들은 추리닝 차림으로 럭비공만 힘없이 주고받고 있을 뿐이었다.

응원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다.

“쉬는 시간인가 본데요?”

몇 분이 지나도 같은 상태였다.

갑갑증을 느낀 무함마드는 응원단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무함마드라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에 함께 달려 나갔다.

“왜 다들 연습하지 않는 거야? 주말이잖아!”

공을 주고받던 선수들과 응원단은 피곤하다는 듯이 무함마드의 말을 무시했다.

“다들 왜 그래?”

“당신. 최근에 미들타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거야?”

듣다못한 선수 한 명이 나섰다.

쿼터백 포지션을 담당한 선수단장이라고 했다.

미식축구용 보호구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덩치가 무함마드의 두 배는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최근에 총기 난사가 있었잖아. 그런데 우리가 기운이 나겠어?”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지. 그리고 그건 해결됐잖아? 법안도 통과됐고. 여기 있는 윤예준 덕분에!”

무함마드가 나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를 알아본 선수들과 응원단이 모여들었다.

“오! 진짜네. 설마하니 TV에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그럼 됐지? 어서 연습해!”

무함마드의 카리스마 없는 명령에 모두가 실소를 숨기지 못했다.

결국 응원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연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정의감으로 불탔고, 오히려 경기보다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더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고.

“굉장히 과격한 시위였어. 윤예준이 나타나기 전인 시위 초반부터 참여했거든. 시위에 맞불을 놓는 사람들 때문에 아직도 입원해있는 사람도 많아.”

그런 상황에서 체격이 좋은 미들타운 대학교 미식축구 선수들은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고 했다.

역할이 크기 때문에 어떤 시위 전선에서도 빠질 수가 없었다.

당연히 연습할 시간은 고려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 사정이……”

무함마드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 시위가 일단락되면서 응원단장은 아예 우리 팀을 나가버렸어. 이제야 겨우 연습할 수 있게 됐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 친구를 비난할 수는 없어.”

“왜?”

“그 친구 남동생이 이번 사고 피해자 중 한 명이었거든. 슬픔을 억누르고 총기 불법화에 사활을 다 걸었는데 지금의 타협이 마음에 들었겠어? 그래서 떠나버렸어.”

그제야 그들이 왜 그렇게 시위에 열띤 참여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동료의 슬픔에 함께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선수들과 응원단은 굉장히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무함마드는 더 이상 그들을 닦달하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응원단장마저도 공석으로 남아 있다니 별수 없었다.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들타운이라는 고향 정도는 잃은 사람 표정이었다.

‘슬픔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시작한 일이었어. 못 본 척할 순 없지.’

경기를 앞두고 무함마드는 굉장히 흥분했었다.

북미 전역에서 주목하는 스포츠라고 했으니 기대하고 있는 건 무함마드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왔는데 미들타운이 일방적으로 지는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 특히 미들타운 주민들에게 좋은 경기를 선물하는 건 내 마지막 남은 책임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응원 정도는 할 수 있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공놀이를 하든 휴대폰을 만지든 하려 했던 이들이 나의 말에 멈춰 섰다.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경기는 일단 나가시는 거잖아요? 그럼 거기 가서 응원은 해도 되느냐는 거예요.”

선수들은 내심 좋은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의미한 일이야. 연습도 안 된 우리 팀을 누가 응원하고 싶겠어?”

“경기뿐만 아니라 응원도 하나의 놀이이자 문화잖아요? 응원이라도 열심히 해봐요!”

“응원단장도 없는 상황이라니까?”

나는 무함마드를 돌아보았다.

응원단과 선수들을 격려하는 게 딱 응원단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와 무함마드의 눈치를 살핀 선수단장이 즉시 반박했다.

“응원단도 마찬가지야. 시간이 부족해서 워싱턴 앤 리 대학교 애들보다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가 없어. 그들은 이미 완성돼 있을 거야. 작년 걸 재탕할 수도 없고 말이야. 이번 사건이 굉장히 잘 알려졌으니 비웃는 사람은 없겠지만…… 미식축구만큼 패배가 꼴사나운 스포츠도 없다고. 거기다 응원까지 별 볼 일 없으면 어떨 것 같아?”

그들은 선수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으로 내가 좋은 대안을 제시해주기를 기다렸다.

그걸 기다린다면야 그렇게 해줘야 할 것이었다.

“워싱턴 앤 리 대학교 분들보다 더 대단한 응원을 해야 하는데 준비 시간은 짧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 맞아. 그렇게 요약해놓으니까 더더욱 불가능해 보이네.”

“그럼 그렇게 해드릴게요.”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너 네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

“네.”

“이건 아이디어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아이디어든 그걸 연습하는 데에만 몇 주가 걸린다고. 그런데 예선 경기는 당장 2주 후야.”

나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서 약속드릴게요.”

“뭐, 단기 연습 커리큘럼 같은 거라도 짜주겠다는 거야? 그래. 그래서 얼마 만에 해결이 가능한데?”

나는 집게손가락 하나를 펴서 그들에게 보였다.

“일주일?!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아뇨. 일주일이 아니에요.”

“뭐?”

멀리 떨어져 서 있는 무함마드가 손을 모은 채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루. 하루 만에 끝나는 응원법을 만들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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