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사람을 살리는 화가
쇼는 큰 호응을 끌었다.
성의 모양을 알고 있던 관광객들은 성 윤곽 바깥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보고 신기해했다.
새롭게 디자인한 팝업북도 효과가 대단했다.
이미 리미티드로 제작된 200만 장은 폐장쇼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다 팔린 상태였다.
덕분에 폐장쇼가 끝나고 다시 기념품 가게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엄마! 나도 팝업북 사줘. 저기 공주 숨어 있단 말이야!”
하지만 불행히도 남은 팝업북은 없었다.
그래서 수천 명의 부모들이 기념품 가게 앞에서 크나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팝업북은 샀지만 아쉽게도 폐장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에 폐장쇼 영상을 업로드해 주었다.
현장에도 가지 못했고, 팝업북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영상이라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3D영상의 퀄리티 덕분에 성이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특히나 성에 쏘아진 빔프로젝트 영상의 인기가 굉장히 높았다.
불꽃놀이가 없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 호평이었다.
레저에서도 친환경을 고려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좋은 영향력도 기대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른 지역의 드림랜드뿐만 아니라 여타 놀이공원들도 불꽃놀이를 사용하지 않고 폐장쇼를 꾸리는 노하우에 대해 문의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굉장히 성공적이에요. 처음 논의할 때 강조했던 점이 모두 지켜진 것 같아요.”
노라가 감동하며 말했다.
역대 가장 크게 성공한 폐장쇼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고무적인 건 ‘브리오슈’의 성공이었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프리퀄도 없이 등장했다는 것부터가 예외적이었다.
그 예외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궁금증은 연속적으로 등장한 3D 체험관과 브리오슈 만들기 행사를 통해 해소되었다. 알면 알수록 마냥 귀엽기만한 캐릭터가 아닌 브리오슈가 사람들에게 브리오슈는 여러모로 전례가 없는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폐장쇼 프로젝트가 끝났다.
브리오슈 캐릭터에 대해 VR 영상을 만든다거나 짤막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제안이 계속되었다.
나는 숙소에 머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제안들을 며칠은 숙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노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업무 외적인 일들이 너무 많아 미리 연락을 못 드렸네요.
“아니에요. 한창 바쁘실 텐데요. 노라 감독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네. 덕분에요. 이동식 스크린부터 팝업북까지, 시도한 모든 게 성공하고 있죠. 모든 게 전에 없던 시도들이라 고민이 많았을 텐데도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신 덕이에요. 정말 고생했어요.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젯거리가 쏟아지니 언론도, 당사자인 나도 매 순간 정신없을 정도였다.
-카산드라에게 윤화가님을 소개받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아무래도 윤화가님은 대중예술에도 큰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제게도 참고가 많이 됐습니다. 관객 층이 아이들이기도 하니 새로운 시도에 과감해질 필요가 있더라고요.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뿐이네요.
동양화부터 영상까지.
붓을 들지 않는 장르라고 해도 전생에 갈고닦은 실력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결국은 표현 방법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적은 없었는데.’
이게 바로 ‘대중예술’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서사 예술을 만들고 싶었다.
미술작품은 이야기와 함께 기억될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듯했다.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젠 알 것 같아.’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꾸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다는 무함마드의 마음이 절실히 이해가 되었다.
꼭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예술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RISA대학에서 일일 강연을 해볼 생각 없나요?
“강연이요?”
-네. 저는 강단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수업도 담당하고 있어요. 이 일을 하는 동안 뜻밖에도 매체를 통한 소통의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이죠. 지난주 강의 중에 폐장쇼에 대한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대부분이 윤화가님 아이디어이기도 하니 저보다는 윤화가님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노라는 해당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넓은 분야에 두루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니 강의를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했다.
특정 미디어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좋아요. 날짜가 언제인가요?”
일일 특별 강사로 다녀오는 것이었지만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좋은 경험이 될 듯했다.
한국에서 예술종합학교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으니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특별 강연이 확정된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가 안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쁘게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들었다.
특히나 내가 폐장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뒤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어, 예준아. 일어났어?”
“네.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그림을 함께 보았다.
프랑스 경매장에서 좋은 인상으로 남은 게 아버지의 그림이었는데, 그 이후로 특별히 보지는 못해왔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도 화풍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세계 곳곳을 다니며 아버지도 여러 가지를 배웠나 보구나.’
창작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 감상이 조금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작품을 그냥 감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렸는가’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감상이 학습이 된다는 점에서 일견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그림이 굉장히 좋은데요?”
일전의 작품이 붓질의 역동성에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섬세한 묘사가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그래? 단순히 동양화가 안경을 끼고 다른 기법들을 빌려다 그린 느낌이 들지 않아?”
기법의 완성도로만 보면 이전 작품이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화풍만을 고집한다면 권위자의 지위에 오르기는 힘들 것이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아야 화풍에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이일섭의 경우만 해도 계속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있지 않던가.
“어떻게 생각해?”
“그건 전 화풍에 대해 아빠가 생각하는 장점일 거 같은데요? 제 눈에는 지금이 더 좋아요.”
“그렇겠지?”
아버지는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아, 맞다. 너 일어나기 전에 노라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었어. 폐장쇼 수익 정산이 끝났대.”
제작사단 몫으로 들어오는 수익은 기여도에 따라 나눠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300억이 들어왔대. 말했던 대로 40% 정도로 계산됐어.”
“오. 잘됐네요.”
기여도는 적게 배정받았어도 드림캐쳐가 성공했으니 직원들인 그들로서는 더욱 영광스러운 일일 터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요청들도 엄청 많이 들어왔어. 전시회부터 광고까지…… 그래서 그런데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될 것 같아?”
일이 하나 끝나기가 무섭게 제의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내심 더 큰 성공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전보다 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좋은 일이었다.
“일단 노라 감독님 수업에 일일 강사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이후에 천천히 검토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한국에서 학교 문제로 바빴던 어머니 생각이 나셔서인지 아버지는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는 나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
그렇게 강의가 예정된 날이 되었다.
옷을 차려입고 숙소 현관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달려와 나를 잡았다.
“왜 그러세요?”
“방금 노라 선생님께 전화 왔다. 학교는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왜요?”
취소된 것인가?
단순히 일정상의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듯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심각했다.
“가봤자 학생들은 없을 거야. 일단 들어와 볼래?”
아버지가 먼저 거실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마다 화면 하단에 긴급 속보가 송출되고 있었다.
로드아일랜드주 미들타운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총기 난사?!”
“응. 한 11살짜리 아이가 총을 소지하고 와 학생들에게 난사를 했다는구나. 40명의 아이들이 죽었어.”
환생한 뒤로는 총기 같은 걸 본 적도 없었다.
유럽에도 연합이 생겼다고 했고, 현대에 이르러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 총기 난사란 말인가?
그것도 11살짜리 아이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 일로 인근 초등학교 전체가 휴교를 하게 됐어. 대학생들은 등교하지 않고 가두시위에 참여하고 있대. 미들타운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이야.”
아버지는 로드아일랜드주가 총기 소지를 허용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대학생들이 총기 소지를 반대하는 이유를 모두 알려주었다.
“오클라호마에 사는 18살 여성이 집에 침입하고 든 강도 두 명을 총으로 제압한 적이 있었대. 아마 총기가 없이 경찰만 기다렸다면 여성은 이미 죽었겠지. 예준이 너도 알다시피 미국은 땅이 넓어서 경찰이 도착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니까.”
“그렇죠.”
“그런데 단순히 인명피해로만 보자면 총기 사고가 적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야. 이번 일만 해도 그렇잖아? 장난감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실제 총이라고 해서 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지.”
40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고 했다.
지금 RISA 대학 학생들은 학교 밖, 거리에서 배우고 있다.
“어쨌든. 그럼 저도 거리로 나가야겠네요.”
“거리로 나가겠다니? 시위에 참여하겠다는 거야?”
“노라 감독님과 약속한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미디어 매체 종류를 불문하고 사람들 간에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그에 대한 일반론 하나 정도는 제시할 수 있었다.
바로 ‘남에게 관심 가지기’였다.
관심을 제대로 가졌다면 그다음은 공감이다.
40명의 아이들과 그 유가족들의 슬픔에 말이다.
이미 죽은 아이들을 애도하는 방법은 추모뿐이지만,
미래에 죽을 아이들에 대해서는 그 죽음을 미리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약속? 특별 강연 얘기지?”
“네. 소통을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었죠. 강사로 선택된 제가 방문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위로하고 공감하기.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미국에서 내가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드림랜드 폐장쇼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감동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
거리로 나가 작품을 만들어 귀 막고 눈 가리고 있는 이들과도 소통을 시도하자.
“...... 그래. 그럼 나도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보마.”
“힘 보태줄 사람들이라니, 예를 들면요?”
“한국으로 치면 기초자치단체장 같은 사람들 있잖아? 미국은 특히나 그 사람들의 힘이 세. 목사나 그 지역에서 잘나가는 연예인들도 있을 수 있고. 이 지역에서 대학 교수를 하고 있는 노라 선생님도 해당되겠다. 여긴 워낙에 땅이 넓으니까 말이야.”
아버지는 함께 차를 타고 가자고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말이야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일 뿐, 아버지는 나를 보호해줄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것이었다.
알렉스 커피 앞에서 소동을 일으켰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작품으로 호소한 것도 아니었는데 굉장히 큰 성과를 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작품도 유명세도 업은 상태로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다.
‘이번엔 내가 내게 일을 주도록 하자.’
이번에 맡게 될 일은 ‘사람을 살리는 작품 만들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