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들의 비밀 (2)
“펌킨 주스 마시러 가자, 펌킨 주스.”
펭펭이가 되어버린 무함마드가 카페를 가리키며 제안했다.
안 그래도 여태까지 얻어온 영감을 옮겨 그릴 타이밍이었다.
나는 음료수를 기다리며 바로 태블릿을 켰다.
“뭐야. 벌써 그리게?”
“그야, 그리러 왔으니까요.”
“하긴……”
무함마드도 나를 따라 태블릿을 꺼냈다.
하지만 이리저리 들여다보기만 할 뿐 선뜻 펜을 대지는 않았다.
“안 그리세요?”
“그려는 보는데, 난 이미 많이 그려놨어. 평소에도 매일 생각하거든.”
“정말요? 저 좀 봐도 돼요?”
무함마드가 흔쾌히 자신의 캐릭터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캐릭터만 해도 굉장히 다양했다.
게다가 오래 생각해온 캐릭터들이라면 꽤 질도 높을 터였다.
“오. 그럼 이 중에 주제에 맞는 캐릭터를 발전시키면 되겠네요.”
“그렇지. 하지만 모두 개성 넘치고 똑같이 소중한 내 자식들인걸. 우열을 가릴 순 없어.”
이번 공모전 주제는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였다.
주제에 부합하는 작품을 고르는 게 어떻게 우열을 가리는 일이 되겠는가?
“모두 개성 넘치기는 하는데, 주제에 맞게 발전시킬 순 있잖아요?”
“아니야.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법이라고. 문화권이 어디든, 시대가 어떻든 말이야. 펭펭이가 남극에서만 사랑받는 건 아니잖아?”
“그렇군요.”
그게 바로 무함마드가 생각하는 이번 주제의 진의였다.
개성 넘치는 작품이 바로 장수할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진지한 사람이군.’
의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1등은 아니더라도 RISA 특별전에는 걸 수 있겠는데요?”
“1등이 아니라니? 이 정도 공모전에서는 1등 하는 게 당연하잖아? 장차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꾸릴 사람인데.”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요?”
“그래.”
많이 들어본 허세였지만 포부도 남달랐다.
그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고 나니 그가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르게 들렸다.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저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꾸릴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에요.”
“그렇…… 뭐?”
“하하하. 농담이에요.”
영감을 얻기 딱 좋은 이런 환경에서 잡담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태블릿 펜을 들고 카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구석에 모여 앉은 남성들이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낮부터 술을 먹고 있네요.”
전생에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그려 황금 같은 호평을 받았던 일이 기억났다.
그만큼 술이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료인 것이었다.
“음? 그러게.”
무함마드가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입 근처 펭펭이 부리 부분이 조금 지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좋아하는 것. 일단 술이 있지.’
나는 잔에 담긴 맥주를 단순화시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선을 많이 그을 필요가 없어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를 바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펌킨 주스를 마시던 무함마드가 내 그림을 보고 놀랐다.
“오! 헨케트(맥주)!”
놀랐다.
무함마드가 갑자기 외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헨케트’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무함마드가 아랍인이라면 맥주는 ‘헨케트’가 아니라 ‘비라’라고 부를 것이었다.
헨케트는 고대 아랍어였다.
현대에 고대 아랍어를 쓰는 사람은 딱 두 종류였다.
역사학자거나 아니면,
‘아랍 왕족이거나.’
그러고 보니 아까 무함마드는 아랍인들을 보고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무함마드는 아랍인이 보면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어, 어때? 방금 좀 귀족 같았지?”
내 반응이 조금 수상했던지 무함마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차피 나 같은 한국인 아이는 헨케트가 귀족 어휘인지 아닌지 알 리도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그림으로 제출할 거야?”
“아니요. 아이들도 많으니 술 캐릭터로 수상하기는 조금 어렵겠죠. 그냥 그리면서 착안하고 있는 거예요.”
“뭐 어때? 어차피 1등은 내가 할 거라니까.”
***
작품 출품이 마감되었다.
그렇게 익명 투표일이 다가왔다.
다시 RISA 대학교 대형 강의실에 모여 현장 투표를 진행하기로 했다.
예준과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노라 스미스까지 대형 강의실을 찾아왔다.
‘저 두 사람도 작품을 냈다고 했지. 기대되는데?’
노라는 무함마드와 예준을 넘겨다보며 생각했다.
무함마드야 애니메이션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예준이 이 공모전에 참여한 건 조금 의외였다.
‘하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왔던 걸 생각하면…… 이제 와서 의외라고 말하기엔 늦은 감이 있지.’
이번 공모전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강의실 분위기는 매우 조용했다.
무함마드도 투표를 앞두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자신만의 캐릭터가 세상에 공개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것도 드림캐쳐 스튜디오를 통해 말이다.
“자. 출품된 캐릭터들은 저희들이 임의로 주제별 분류를 해두었습니다. 주제에 맞게 순차적으로 출품작들을 보여드릴 테니 수상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투표하시면 됩니다.”
바비가 품평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중복투표가 가능했고, 사람들에겐 이미 전자 투표 기기가 제공되어 있었다.
인물, 동물, 사물 등 주제별로 다양한 캐릭터들이 쏟아져나왔다.
모두 창의적인 캐릭터들뿐이었지만, 많은 표를 쓸어 담는 작품은 아직 없었다.
‘이번 출품작들 수준이 하나같이 높네. 60주년 기념 폐장식이 걸려 있어서 그런가?’
모든 작품이 함께 수준이 높아 봐야 평준화될 뿐이었다.
따라서 얼마간 투표는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한 캐릭터가 등장한 후로 그 추세가 바뀌었다.
용맹한 표정의 토끼가 당근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는 작품이었다.
<당근 전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노라가 보기에 그 개성 넘치는 작품은 누가 봐도 무함마드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노라뿐만이 아니었는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표를 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무함마드만의 개성을 알아보는 정도라면 무함마드는 이미 캐릭터 창작자로서 성공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당근 전사>는 많은 표를 받아 압도적 1등이 되었다.
아직 투표가 끝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모두가 그 결과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빵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분위기는 다시 한번 들썩였다.
<브리오슈 먹는 브리오슈>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캐릭터는 제목이 설명하는 그대로였다.
브리오슈라는 이름의 프랑스 전통빵 캐릭터가 손에 작은 브리오슈를 들고 있었다.
웃고 있는 입가에는 베어 문 브리오슈의 녹은 버터가 잔뜩 묻은 상태였다.
‘브리오슈가 브리오슈를 먹고 있는 거야?’
작품 설명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브리오슈’라고 적혀 있었다.
캐릭터 설정은 그 밖에도 굉장히 자세했다.
디자인도 훌륭했다.
설명대로 귀엽기도 했고, 무엇보다 브리오슈를 굉장히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건 그 캐릭터의 배경 스토리였다.
브리오슈는 자신이 브리오슈라는 걸 모르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브리오슈라는 것이었다.
“헐 미친. 개 귀여워.”
<브리오슈 먹는 브리오슈>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당근 전사>의 표를 훌쩍 뛰어넘었다.
‘귀엽기로만 치면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야. 캐릭터 스토리가 특히나 매력적인 부분이기는 한데, 그게 이 모든 인기의 비결인가?’
노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드림캐쳐는 대중문화예술을 창작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번 공모전도 마찬가지였다.
투표를 통해 수상작을 선정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느냐가 대중문화예술작품의 가치와 직결되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에 브리오슈라……’
납득할 수는 있었다.
애초에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 요소엔 정해진 바가 없었다.
이번 공모전의 주제는 ‘어떤 캐릭터를 만들든 사람들이 그 캐릭터를 오랫동안 좋아하도록 하라’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토끼든 브리오슈든 무엇을 선정했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품자가 선택한 건 브리오슈 그 자체가 아니라 ‘단맛’이야.’
브리오슈는 그 ‘단맛’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으로 선정되었을 뿐이었다.
왜 브리오슈였는가?
왜 단팥빵도 크림빵도 아닌 브리오슈인가?
노라는 스스로도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요소에 대해 많은 시간을 쏟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반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 돼! 그만 귀여우라고!”
무함마드가 절규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절규에 웃음을 터뜨렸다.
무함마드의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익명 투표도 무의미했다.
‘그래. 결과적으로 저 작품이 가장 귀엽다는 건 변치 않지.’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브리오슈 먹는 브리오슈> 출품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브리오슈’를 골랐고, 그를 통해 귀여움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사랑받기에 부족함 없는 캐릭터였다.
‘결국은 만화 캐릭터에 있어서도 표현력이 중요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뻔한 출품자는 무함마드뿐만이 아니었다.
윤예준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은 윤예준의 것일 테니까 말이다.
***
수상자들은 정해지는 즉시 캐릭터를 인쇄해 RISA 미술관 특별 전시회장으로 함께 이동하는 절차를 밟았다.
2등 한 <당근 전사>는 예외 없이 무함마드의 작품이었다.
수상했지만 표정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나도 귀엽게 그릴걸……”
2등인 무함마드는 1등인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동안 자신의 캐릭터가 무엇이 부족했는지에 대해 골몰하는 듯했지만, 답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부족해서 1등 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그냥 전략이 달랐을 뿐이었다.
“에이. 부감독님 캐릭터도 충분히 귀여웠어요.”
“그럼 왜 나는 못 탄 거야? 귀여운 건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사랑받으니까 네가 상을 탄 거 아니야?”
귀여운 건 언제나 사랑받는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귀여움을 느끼는 기준이 다를 뿐이었다.
“저는 귀여운 게 아니라 달달한 걸 그리려고 한 거였어요.”
“아. 달달한 건 언제나 사랑받으니까?”
“그렇죠.”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핵심은 브리오슈가 브리오슈를 먹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시대를 불문한 명작은 아름다움의 근거를 영원한 것으로부터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신화와 같은 그림들이 몇천 년간 많은 사랑을 받아온 것이었다.
시대적 사건이나 계기는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기엔 너무 일시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근거가 항상 신적인 것일 필요는 없었다.
“브리오슈가 브리오슈를 먹는 건 동족상잔이잖아.”
무함마드가 반박했다.
귀여움에 집중하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그 역효과는 브리오슈의 귀여움으로 예방해두었다.
적어도 귀여운 건 비극적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기 아름다움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영원할 수밖에 없어요.”
“오…… 자기충족적인 거구나.”
브리오슈의 달달함은 자신조차 감동시켰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브리오슈일 정도로 말이다.
그냥 달달한 음식을 사용했다면 음식 유행에 따라 관심도 시들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브리오슈 먹는 브리오슈>는 시대적 유행 밖의 달달함을 표현하기 위해 구상한 캐릭터였다.
‘브리오슈 자체도 일단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던 전통 빵이니까.’
전생에 종종 브리오슈의 정물을 그리며 맛의 시각적 표현에 몰두했었다.
보통 같아선 단순히 금방 먹어 없앨 수 있는 간식에 지나지 않지만, 그 또한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해봤을 때 그 가치를 알아챌 수 있었다.
게다가 ‘달콤함’은 주로 ‘좋음’의 은유로 쓰이지 않던가?
“쳇. 맥주를 그리기에 쉽게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런 비밀을 숨겨놨을 줄이야.”
“에이, 숨겨놓다뇨. 그러는 부감독님도 저한테 보여줬던 캐릭터 도안 중에 <당근 전사>는 없었잖아요.”
일부러 나를 견제하기 위해 숨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솔직히 보여주더라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1등 할 거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밀이 많은 사내였다.
왕족이라는 큰 비밀을 숨기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 하나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실을 함구해왔을 것인가.
고작 ‘헨케트’라는 짧은 단어 한 마디에 들켜버리고 말 진실이었으니.
그렇게나 말이 많은 그라면 1분에 10번도 넘게 고심하며 살아왔을 터였다.
보통 비밀이 많아서는 그런 삶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흥. 원래는 당근 그림이었던 걸 바꾸고 바꾸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야. 그리고 너만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줄 알아? 나도 너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는데.”
나의 가장 큰 비밀?
그간 큰 재능을 보여주는 데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설마하니 내가 환생했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뭔가 눈치챈 건가?’
나는 뒤를 돌아 무함마드를 마주보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학교도 다니지 않을 정도야. 그리고 맥주가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유별나게 표현할 정도면 도저히 평범한 11살 꼬마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데.”
“무함마드씨?”
무함마드는 달랐다.
그는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을 듯 동심 가득한 청년이었다.
낭패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테니 솔직하게만 대답해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