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87화 (87/241)

87화. 그들의 비밀

무함마드에게 들은 공모전 설명회 날이 되었다.

그는 설명회에서 공모전 주제를 구두로 발표하기 때문에 꼭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했다.

“회화대 대형강의실에서 한대.”

“위치 아세요?”

“당연하지. 우리 학굔데.”

무함마드는 자랑스럽게 말한 데에 비해 심하게 두리번거렸다.

회화예술대학교 건물로 들어서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굳이 무함마드처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인파를 따라가기만 하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 대부분 이곳 학생들이겠죠?”

“아닐걸? 우리가 탐내고 있듯 이번 공모전 수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영예야. 대부분 미술 쪽으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그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취지는 무색해져 버리지 않는가.

“그렇다고 전문 예술인들 참가를 금지할 수는 없잖아? 어쩔 수 없는 거지. 물론 누가 오든 상은 내가 탈 거라 상관없지만 말이야.”

“제가 디자인한 캐릭터가 폐장쇼를 장식한다니. 벌써 두근두근한데요?”

“너한테는 내 허세가 안 먹히는구나?”

나와 무함마드는 대형 강의실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대형이었다.

적어도 500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하네요.”

“저기 빈 자리 두 개 있다!”

무함마드가 재빨리 자리를 차지한 뒤 내게 손짓했다.

잠시 후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외근을 다녀온다더니, 설명회 담당자로 등장한 사람은 바로 바비 오스카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 아니. 윤예준님도 오셨습니까? 무함마드 카프탄도요?”

바비가 마이크를 입에 댄 채 아는 척했다.

제작 사단 동료가 나타나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 바비 교수님이랑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인가 봐.”

“그러게, 부럽다.”

한쪽에 모여 앉아 있는 청년들이 나를 힐끗대며 저들끼리 속삭거렸다.

“저 사람들 바비 감독님을 교수님이라고 부르던데. 학생들도 많이 오나 봐요.”

“이 시기 강의 땐 전공 기말 작품을 공모전으로 대체하기도 해. 그래서 다들 온 거겠지.”

“그런데 바비 감독님은 학생들한테 차가운 사람 아니었어요?”

반응들만 보면 한없이 자상한 보육교사라도 되는 것 같았다.

“적대감보다 존경심이 더 강한 거지, 뭐. 실력 있는 사람이잖아.”

바비를 나쁘게 본 건 아니었지만 조금 의외였다.

바비는 캐릭터 공모전을 진행해온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 후 역대 수상작들을 보여줬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있는 반면 사실적이고 날카로운 캐릭터들도 종종 발견됐다.

“캐릭터이기만 하면 제한은 없습니다. 물론 주제는 있죠. 올해 캐릭터 공모전 주제는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번에 당선된 캐릭터는 60주년 폐장쇼를 장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것 세 작품은 RISA 미술관 기획전시관에 내걸릴 예정이었다.

상금은 한화로 2000만 원. 억 단위 저작권료는 별도.

“와우. 이게 얼마야? 용돈으로 아주 제격이겠어.”

무함마드는 웃으며 말했다.

분명 바비는 ‘억 단위 저작권료’라고 공시했는데 고작 ‘용돈’이라니?

웃기기 위한 허세라는 건 이해했지만 참 꾸준하기도 했다.

***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

나는 회화예대 건물을 나오면서 주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드림캐쳐 캐릭터들 중 이번 폐장쇼에 들어가는 12개의 캐릭터들 모두 그 주제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오래된 캐릭터는 60년 내내 드림캐쳐와 함께 해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주제만 봐도 이번 폐장식에 드림캐쳐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겠어.’

어쩌면 폐장쇼를 성공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번 공모전인지도 몰랐다.

무함마드와 함꼐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복도 한 편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 붙어 있는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또 무슨 공모전 같은 게 있는 건가요?”

함께 포스터를 발견한 무함마드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뉴욕 코믹콘서트(New York Comic Concert)’라고 적힌 포스터였다.

여러 디자인의 캐릭터들이 포스터 전면에 도배되어 있는 유쾌한 디자인이었다.

“아, 설마 캐릭터 전시회 같은 건가요?”

“캐릭터 전시회? 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무함마드는 헛기침을 했다.

포스터는 지금 처음 봤지만 뉴욕 코믹콘서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조금 더 곱씹어보더니 아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완전히 맞는 말이네. 저기 가면 오만가지 캐릭터가 다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까 너 캐릭터 창작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저기 가면 다른 장르 만화 제작자들도 많이 만나볼 수 있어. 스토리 창작자들 말이야. 저기 가면 이번 캐릭터 공모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분야 예술가들과의 교류만큼 효과적인 발전도 없을 것이었다.

‘과연, 애니메이션 분야 최고 대학이라더니. 소식도 빠르네.’

캐릭터 구성 방식은 물론이고 창작 영감도 얻을 수 있었다.

연희가 예전에 습관처럼 자주 쓰던 말 중엔 ‘쇠뿔도 단김에 빼라’라는 말이 있었다.

“여기 한번 가봐야겠네요.”

내가 말하자 무함마드가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간다는데 왜 그가 기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짜? 이걸 가겠다고? 좋았어! 넌 진짜 운 좋은 거야. 나는 매 시즌마다 가는데 이번엔 특히 재미있는 이벤트도 많이 할 거라고. 가면 너도 분명 마음에 들걸. 애니메이션 설정집도 사고 달콤한 펌킨 주스도 먹고 그리고 또……”

“네, 다 갈 테니까 진정해요.”

무함마드는 자신이 기억하는 코믹 콘테스트 현장에 대한 모든 걸 묘사할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기대가 되었다.

창작 캐릭터는 실물 상품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저작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무함마드의 말대로 정말 오만가지 캐릭터들이 다 있을 것이었다.

최소한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중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편하게 보고 올 수 있었다.

“약속했다?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 그럼 내일 너희 숙소로 데리러 갈 테니까 얼른 주소 불러.”

***

“와, 저 차 뭐야?”

다음 날이었다.

무함마드와의 약속 시간이 되어 옷을 차려입는데 아버지가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했다.

“뭔데요?”

숙소 건물 바로 앞에 굉장히 길쭉한 SUV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외교 차량도 저렇게 거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전쟁용 차인가 봐요. 여기는 무슨 일이지?”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무함마드였다.

“여보세요?”

-나 무함마드. 집 앞이니까 빨리 나와. ‘제작자들과의 대담’에서 좋은 자리에 앉으려면 지금 빨리 출발해야 해!

무함마드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우선 차 가까이 내려가 보기로 했다.

차량은 가까이서 봤을 때 더 커 보였다.

형태는 일반 차량들과 조금 비슷했지만 크기가 남달랐다.

유리는 완전히 선팅되어 있어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았고 타이어는 강철로 림을 감싸놓은 신기한 형태였다.

‘왜 굳이 이런 차를 타고 온 거지?’

작정하고 중무장한 괴한 백 명쯤 달려들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중압감이었다.

“어서 타!”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무함마드가 외쳤다.

손잡이를 잡아 당기자 한없이 깊고 두꺼운 차량 문이 무겁게 열렸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도와줘야만 문을 도로 닫을 수 있었다.

“이 차는 뭐예요?”

“아, 이거? 급하게 빌려온 거야. 당장 쓸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대.”

누가 이런 차를 빌려준단 말인가.

무함마드는 별것 아니라고 했으니 정말로 별것 아닐 터였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알죠. 캐릭터 전시회에 가고 있는 거잖아요.”

무함마드는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냥 캐릭터 전시회가 아니야. 약 450개의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는 미국 동부 최대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박람회, ‘뉴욕 코믹 콘서트’에 가고 있는 거라고!”

어디서 광고 문구라도 외워온 것인지 무함마드는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그곳에 간다고 했을 때 무함마드는 굉장히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 반응이 대충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게 자신이 좋아하는 걸 구경시켜줄 생각에 잔뜩 기대했을 뿐인 것이었다.

차만 보면 어디 전쟁 지원이라도 나가는 기분이었지만, 무함마드는 오늘도 펭펭이가 그려진 후드를 입고 있었다.

코믹 콘서트는 ‘J.제이콥 컨벤션센터’라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건물 근처로 접근하자 해괴한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더 해괴한 걸 봤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차량이니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는 없었을 것이었다.

“와. 코스튬 플레이어 엄청 많이 왔다.”

드림랜드 답사를 다녀왔을 때 아버지는 캐릭터 복장을 가리키며 그것을 ‘코스튬’이라고 했다.

“아, 저렇게 캐릭터 흉내를 내는 걸 코스프레라고 하는군요?”

“응. 저거 다 있는 캐릭터들이야.”

드림랜드에서는 드림캐쳐 캐릭터들밖에 보지 못했다.

역시 제한이 없는 캐릭터 전시회에 오니 훨씬 다양하고 왁자지껄했다.

물론 전시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건 무함마드가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붙인 단어였다.

이곳은 전시회라기보다는 문화축제 현장 같았다.

우리는 차를 주차한 뒤 컨벤션 센터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지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실내에 크게 조성된 강당에는 케노피로 만든 간이 부스가 굉장히 많았다.

그곳에서는 만화나 게임, 그림 판매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엔 얼굴에 그림을 그린 채 지나다니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저 사람들 얼굴에 하고 있는 저거 물감이겠죠?”

“응. 근데 인체에 무해한 특수 물감이야. 바디페인팅용 물감이 따로 있어. 관심 있나 보지? 근데 난 별로……”

바디페인팅이라면, 원시 미술이 아니던가.

근육이 많은 한 남성은 망치를 들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온통 인형 옷만 뒤집어쓴 채 전기가 흐르는 강아지 캐릭터 흉내를 냈다.

그렇게 복장을 챙겨와 입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데에 비하면 얼굴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생각보다 얼마 없었다.

그게 더 간편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 중에서도 굉장히 마이너한 장르인가 보네.’

나는 무함마드의 옷소매를 당겨 바디페인팅을 하고 있는 부스로 향했다.

부스에 도착하자 광대 화장을 한 화가가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직접 그리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그려드릴까요?”

직원은 부스 한쪽 면을 가득 채운 도안들을 가리켰다.

“아, 제가 직접……!”

“와! 저기 펭펭이 있네, 펭펭이!”

무함마드가 도안 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정말로 펭펭이 도안이 있었다.

“부감독님은 안 하신다면서요?”

“빨리 그려줘.”

무함마드는 의자에 떡하니 앉았다.

“그럼 제가 그려볼게요.”

나는 직원에게 물감들을 건네받고 펭펭이의 얼굴을 무함마드의 얼굴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기대감에 가득한 표정으로 미동도 않더니, 갑자기 내 뒤에서 걸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곤 작게 놀라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왜 그러세요?”

“응? 아냐, 아무것도.”

무함마드는 다시 내가 페이스페인팅을 할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여전히 사람들 쪽을 힐끗댔다.

그가 살피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같은 아랍계 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떠들며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떠나자 무함마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띄게 편안해하시네요.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잡혀가기는 무슨? 허, 참!”

무함마드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그림을 계속 그리기 시작했다.

‘숨겨야 할 게 있나? 뭐, 나쁜 짓이라도 모의하고 있는 건가?’

궁금했지만 당장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위인이 바로 무함마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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