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86화 (86/241)

86화. 예준의 움직이는 성 (3)

불꽃놀이를 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여의도에서는 강 너머 굉장히 먼 곳에서 내다본 게 다였다.

드림랜드의 불꽃놀이는 훨씬 가까웠고,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사람들은 금방 불꽃놀이에 매료되었고, 코스튬을 입은 춤꾼들은 다시 불꽃 음향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그 공주는 매일같이 왕자와 춤을 추러 가는 건가?’

나는 스튜디오로 돌아와서도 드림랜드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코스튬 배우들의 몰입감 있는 연기와 퍼레이드 현장의 열기 때문이었다.

‘어른들도 그들의 연기에 잘 몰입하고 있었지.’

곱씹어 생각해보면 그리 어색한 건 아니었다.

가상의 사건과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사람들은 감동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드림랜드 퍼레이드도 그와 같았다.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해 의자에 앉으려는데 주머니에 무언가 빳빳한 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팝업카드를 꺼냈다.

펼치면 다시 성 모양이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드림랜드 중앙에 있는 성과 같은 모양이었다.

‘잠시 동화 속으로 떠나있고 싶은 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겠지.’

드림랜드는 그 열망을 실현시켜 주는 곳이었다.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겐 소중한 동심을 심어주는 드림캐쳐 애니메이션들처럼 말이다.

불꽃 아래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캐릭터들을 보는 관광객들의 시선에는 즐거움을 넘어 환희의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걸 선사하는 게 퍼포먼스의 최고 즐거움이야. 불꽃놀이도 결국은 그 일환일 뿐이고.’

나는 연필을 쥐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기록해두어야 했다.

나는 스케치북에 성을 그린 뒤 오렸다.

그리고 그 성을 스케치북의 다른 면에 붙여 임시로 팝업카드를 만들었다.

스케치북을 조금씩 오므리고 펼치기를 반복하니 성이 휘청휘청 움직였다.

드림랜드에서보다는 더 갖춰 만들었지만 여전히 공정은 복잡하지는 않았다.

‘퍼레이드장과 성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어.’

노라가 보여준 영상은 비교적 먼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불꽃의 모양을 담아내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성에 3D 빔을 쏠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자세한 표현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토리가 있으면 더 좋겠는데.’

나는 3D 빔에 활용할 만한 캐릭터를 정하기 위해 캐릭터별로 가장 유명한 장면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무함마드가 ‘펭펭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좋아했듯이, 아이들마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와 함께 성 안에 스토리를 입히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성을 스크린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명장면을 틀어놓은 채 스토리보드 작업에 임하기 시작했다.

휴대용 프로젝터가 구비되어 있어 작업하는 즉시 스케치북에 상을 비춰볼 수 있었다.

‘일단 공주가 창문을 열고 성을 탈출하고 나면 용이 성을 휘감고……’

드림캐쳐 애니메이션이 주는 동심을 잘 살려 스토리를 짜냈다.

공평하게 캐릭터별로 하나씩, 대표할 만한 사건들을 활용해서 말이다.

펭펭이가 나오지 않았을 때 무함마드가 얼마나 실망할지를 생각하면 꼭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컴퓨터에 틀어둔 영상과 팝업카드로 만들어둔 스케치북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쳤다.

엽서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까먹었다는 데에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이 팝업카드가 굉장히 인기였어…… 그렇다면 거기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카드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퍼레이드장과 불꽃놀이를 떠올려보았다.

퍼레이드 현장은 사소한 한 가지만 보여주어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동화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비품실에서 반짝이 풀 같은 것들을 몽땅 챙겨 사무실로 돌아왔다.

‘드림캐쳐 설립 60주년 폐장쇼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해주지.’

나는 스케치북 팝업카드를 꾸미기 시작했다.

***

폐장쇼 기획 초안 발표가 예정된 날.

예준이 준비한 건 프로젝터를 활용한 기획 영상이었다.

회의실에 큰 종이성을 세워둔 뒤 거기 기획 영상을 쏘는 것이었다.

제작 사단 감독들과 매니저들이 최대한 현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아이디어뿐 아니라 작업 속도도 놀라워. 실력뿐만 아니라 열정도 있으니까 가능한 거야.’

노라는 예준이 영상을 준비하는 동안 그 종이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진심으로 기대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현장은 밤일 테니 실내를 어둡게 하겠습니다.”

예준은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알록달록했던 성의 톤이 흐릿해졌다.

가장 처음 등장한 영상은 성 주변을 비추는 밝은 달빛과 홀로 불이 들어와 있는 창문이었다.

마치 성의 그림자만 보이는 듯했다.

창문 너머로 곧 공주의 실루엣이 나타난다.

공주는 창문 너머로 로프를 늘어뜨리고, 빠르게 로프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공주가 사라자 화가 난 용은 난폭하게 폭주한다.

성 반대편에서 용감한 왕자가 등장하고, 용을 성공적으로 무찌른다.

왕자가 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주가 있던 창문에 이번엔 왕자의 모습이 비친다.

이미 탈출한 공주는 거기 없다.

하지만 용이 결국 공주를 잡아먹어 버린 거라고 생각하는 왕자는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 식의 영상이 여럿 등장했다.

언뜻 보기에는 평면의 스크린에 영상을 쐈을 뿐이었지만, 사실은 울퉁불퉁한 성의 굴곡과 프로젝터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위치마다 상의 크기를 달리한 것이었다.

기획에 사용된 종이성은 최소한의 입체 표현만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더 세세하게 성의 깊이와 거리, 스크린의 위치 등을 따져야 할 것이었다.

‘기획 영상만을 위한 3D 아트를 구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실제보다 기획 발표가 더 단순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노라는 예준의 기획 영상을 보고 실제 폐장쇼가 성공적이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3D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빛과 어둠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그걸 배우지도 않고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상은 드림캐쳐 애니메이션 중 동화 속으로 모험을 떠난 캐릭터가 사라지고 끝났다.

모든 아이디어와 시각효과가 굉장히 뛰어나 기립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대단해! 역시 예준이라니까? 난 처음부터 믿고 있었어.”

이번에도 가장 신난 건 역시 무함마드였다.

“이미 윤화가님 머릿속에는 완성본이 있는 것 같군요. 그렇죠? 이번 기획 영상에 포함하지 않은 디테일들이 훨씬 많아 보이는데요.”

노라가 물었다.

예준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종이성이 실제 성과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죠. 그리고 연무기에 영사되는 부분은 성에 영사되는 빔보다 훨씬 진해야 할 거구요. 그런 건 자잘한 것들이 확정되면 기획안에 완전히 반영될 거예요.”

적어도 노라가 보기에 이 기획을 반대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특별히 제안할 게 있긴 해요.”

“뭔가요?”

예준은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드림랜드에서 팔고 있는 카드예요. 펼치면 이렇게 성이 입체로 세워지죠. 어때요? 이게 신기한가요?”

신기하기로 치면 VR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품이었다.

팝업카드 형식이란 게 별로 대단한 기술도 아니어서 다른 상품에 아이디어만 적용하고 없애자는 안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은 엄청 좋아하더라구요. 한번은 부모님에게 이걸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물어봤어요. 도대체 저 작은 종이성을 왜 그렇게 좋아하냐. 아이는 대답했죠. 펼치면 성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다고. 저런 게 자신의 주머니 속에 접혀 있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고 말이에요. 언제든 꺼내 펼치면 작게나마 거기 성이 있으니까요.”

코미디쇼에 모인 관객들은 코미디언의 사소한 말장난에도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애초에 웃을 생각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드림랜드에 방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동화 속으로 떠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모험가들이었다.

저 사소한 종이접기에도 감동할 만큼 말이다.

드림랜드 기획자들은 거기 부응만 해주면 되었다.

“이 카드를 한 번 사면…… 아이들은 폐장쇼가 끝날 때까지 손에 들고 놓지 않을 거예요. 물론 실제 성에서 선보이고 있는 3D 아트쇼를 보느라고 이 작은 종이성 같은 건 들여다볼 틈이 없겠지만요. 하지만 폐장쇼가 끝나면? 미련이 남아 카드라도 열어보게 되는 거예요.”

예준은 책상 위에 올려둔 스케치북을 들고 와 섰다.

“실제 성처럼 화려하게 반짝이지는 않겠죠. 오히려 너무 어두워서 이 작은 성도 잘 안 보일 거예요. 폐장쇼가 끝나고 조명이 다시 켜지기 직전까지가 가장 어두울 시기니까요. 하지만.”

예준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거기엔 반짝이는 특수 물감들이 여럿 그려져 있었다.

완전한 어둠이 아닌 이상 희미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빛깔이었다.

“이럴 수가!”

그러나 제작 사단 감독들과 매니저를 감탄시킨 건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그 물감들 때문이 아니었다.

성 한쪽에 숨어서 야광으로 빛나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대박이야! 폐장쇼에서 찾지 못한 캐릭터를 여기에서 찾게 되는 거잖아?!”

무함마드가 정답을 이야기했다.

노라와 바비뿐만 아니라 매니저들도 예준의 그 기획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마치 상상력이 가장 풍부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예준은 설명을 이어서 했다.

“저 큰 성을 어디서든 펼쳐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꿈과 희망의 공간을 내 주머니 속에 담아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 폐장쇼에서 사라진 캐릭터가 아이들의 엽서마다 숨어 있다면 이 엽서는 전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 되는 거예요. 드림랜드에 있는 실제 성이 우리 집으로 옮겨 온 셈이니까요. 적어도 내년 퍼레이드까지는 기다릴 수 있겠죠.”

예준의 기획 발표가 끝났다.

간이 성에 영사시킨 3D 아트도 보았고, 포토카드 안으로 도망친 캐릭터도 찾았다.

훌륭한 폐장쇼 하나를 이미 모두 경험한 것이었다.

이제 그 아이디어를 빛낼 궁리를 해야 할 것이었다.

***

기획이 확정되었다.

제작 사단 감독들은 저마다의 작업에 돌입했다.

예준은 기술적인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 살려야 할 포인트들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연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들은 하늘과 그라데이션을 이뤘다.

따라서 용이 승천할 때 더 아련한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식의 팁들이었다.

“대부분은 네가 기획한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캐릭터 몇 개가 더 추가돼야 해.”

나의 스토리보드를 캐릭터별로 정리하던 무함마드가 말했다.

“어떤 캐릭터 말씀이세요?”

기획할 때 고른 캐릭터들은 인기순으로 파악한 것들이었다.

“매번 드림랜드에는 열세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어. 드림캐쳐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캐릭터 열두 가지를 거기 포함시켜야 하거든. 그중 몇 가지가 빠져 있는데…… 총 세 캐릭터만 더 추가해서 30분 안에 녹여내면 될 거야.”

“알겠어요.”

기획 영상에 포함된 캐릭터는 아홉 개뿐이었다.

1위부터 9위까지만 정리해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세 캐릭터에 해당하는 내용을 더 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건 쇼가 아니라 캐릭터 창작이지.’

나는 그저 이미 있는 캐릭터를 가져다 쓸 뿐이었다.

다시 드림랜드 퍼레이드를 돌이켜보았다.

공주는 왕자와 무도회장 약속이 있다고 했다.

‘기본적인 대답 매뉴얼 정도는 있었겠지만, 아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해서는 순발력을 발휘해서 대답한 것일 거야.’

그들도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외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창작물을 만들어 본 적이 있던가?’

어린 시절 기억은 평생을 간다고 했다.

“직접 캐릭터를 만들어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직접 만든다니?”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이미 있는 캐릭터만 가져다가 3D 아트에 대입할 뿐인 거잖아요. 물론 그 작업도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원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워서요.”

모작은 몇 번 해봤지만 그 즐거움이 완전한 창작만은 못했다.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욕심인지도 말랐다.

“우리가 직접 캐릭터를 짜서 폐장쇼에 넣는 건 불가능해.”

“아……”

“그래도 이번에 RISA대학에서 캐릭터 공모전을 하거든? 거기서 당선된 캐릭터도 새롭게 추가할 거야. 아까 열세 개의 캐릭터가 활용되는데 드림캐쳐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열두 개만 들어간다고 했잖아? 나머지 하나는 이 공모전 수상작이 차지하게 되지. 아쉬운 참에 거기라도 참가해보는 건 어때?”

그럼 거기서 수상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거 저도 참가할 수 있나요?”

“당연하지. 직원들도 참가할 수 있어.”

이렇게 큰 행사에 자신이 제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니.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네. 꼭 참가하고 싶어요! 참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 알려줄게. 별로 참가를 추천하지는 않지만.”

“왜요?”

무함마드가 작업에 열중하며 대답했다.

“나도 참가할 생각이거든. 틀림없이 내 캐릭터가 최고로 멋질 텐데, 예준은 어차피 참가해봤자 시간만 낭비하게 되지 않겠어?”

무함마드는 야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다들 참가하니 보통 규모의 공모전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함마드가 도발하건 말건 나는 바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나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하나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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