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85화 (85/241)

85화. 예준의 움직이는 성 (2)

‘총기획자’라면 드림랜드를 실제로 가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을 것이다.

나는 바로 다음 날 아버지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은 매우 넓기 때문에 용무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할 땐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비행기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나와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택시로 갈아타 드림랜드로 향했다.

드림랜드의 시그니처라는 ‘드림랜드 성’은 높이 솟아올라 먼 거리에서도 훤히 내다보였다.

“와! 예준아. 저기 봐봐라, 저기!”

아버지는 이미 내가 보고 있던 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성은 가까이 접근할수록 계속 커졌다.

그리고 드림랜드 입장 라인에서는 그 크기를 완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높이만 해도 30층 건물 정도는 되어 보였고, 디자인은 동화 속에나 있을 듯 비현실적이면서도 아기자기했다.

우리는 직원용 패스 덕분에 매표소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오래 서는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며 아쉬워했다.

그의 표정을 올려다 보니, 조금 감격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왜 그러세요?”

나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우린 작은 곳만 가봤지, 국내에서 가장 큰 놀이공원도 못 가봤잖아. 남들 다 가는 곳인데도. 그런데 이제야 이렇게 와보네.”

이제 보니 아버지는 감격 반 신남 반이었다.

자식들에게 사치를 부리지 못하게 하는 게 부모로서의 큰 죄라고 느끼는 청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야 그런 걱정은 해본 적 없었지만, 그동안 관찰해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이라면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나와 아버지는 드림랜드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성 앞에 가서 섰다.

‘바람이 그리 강하진 않겠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해.’

바람의 영향을 가장 덜 받으려면 접이식 스크린을 설치해두는 게 제일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성 뒤에 조금 낮은 크기의 건물들이 둘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도 스크린 지지대를 걸면 사방팔방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든 문제없을 듯했다.

‘그래, 기본적인 건 갖출 수 있겠어. 중요한 건 내용이겠는데.’

성에 3D아트 영상을 빔으로 쏘려면 성의 굴곡을 확인해야 했다.

빔을 쐈을 때 상이 맺히는 평면 정도는 확인이 쉬웠지만 성의 봉우리마다 간격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는 자세히 살펴야 했다.

‘한눈에 보기가 어려운데……’

폐장쇼 현장의 관객들은 성을 평면으로 인식하겠지만 기획자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성의 굴곡과 깊이까지 파악해야 했다.

‘우선 대략적으로 그려봐야겠어.’

나는 스케치북을 펴서 우선 성을 그렸다.

그 뒤 성의 깊이를 어림해 그림을 입체 형식으로 찢었다.

찢은 부분들을 세우자 스케치북 위에 성이 하나 세워진 형태가 되었다.

성을 몇 바퀴 돌며 기타 세부 사항을 거기 메모하는데,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앙! 나도 저거 사줘, 저거!”

“저거 뭐!? 팝업카드?”

부모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떼쓰는 소리였다.

‘음? 사진으로 된 카드인가?’

아이는 아예 부모 앞에 드러누워 팝업카드라는 걸 얻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빠. 팝업카드라는 게 뭔데 저렇게 원하는 거예요?”

“음……?”

아버지도 그제야 떼쓰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내 스케치북이었다.

“이걸 보고 팝업카드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내겐 그냥 폐장쇼 스케치였다.

아이 때문에 곤란해하던 아이의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정말 죄송한데, 그 팝업카드 어디서 사셨어요?”

“네? 그냥 이건 제가 만든 건데……”

“아? 직접 만드셨다고요? 파는 건 줄 알고.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예준의 그림이 너무 입체적이어서 아이랑 부모가 헷갈렸나 보다. 하고 웃었다.

그때 한 가족이 근처를 지났다.

아버지는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한테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

아버지가 가리킨 아이는 그 ‘팝업카드’라는 걸 쥐고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예준이 네가 만든 것처럼 열면 입체로 펼쳐지는 엽서야.”

아이의 엄마는 그들 가족에게 다가가 팝업카드를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멀찍이 가게를 하나 가리켰다.

많은 사람들이 줄 선 매장이었다.

“아하! 그럼 저도 그거 한 장만 사주세요. 저는 떼 안 써도 되죠?”

“뭐? 하하하! 그래! 가자.”

우리는 그들을 따라 함께 상점으로 이동했다.

***

매장에서는 팝업카드 한 장을 샀을 뿐인데 그보다 더 두꺼운 종이를 건네주었다.

매표소에서 챙기지 않은 드림랜드 지도였다.

완전히 펼지면 돗자리로도 쓸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컸다.

구역마다 어떤 놀이기구가 조성되어 있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노라가 말했던 ‘VR어트랙션 체험관’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때였다.

“이거 봐라. 이렇게 펼치면, 성이 딱 완성되는 거야.”

지도를 보고 있던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아버지가 포토 카드를 펼쳤고, 아버지 말대로 접혀있던 성이 펼쳐져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내가 만든 것과 원리는 같았다.

“어? 정말이네요!”

나는 아버지에게 카드를 건네받았다.

아이들에겐 굉장히 인기가 많은 상품이었다.

엽서를 펼쳤다 접기를 반복하며 그것이 인기를 얻는 이유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평면이었던 게 복잡한 입체로 변하니 신기해하는 것이군.’

폐장쇼가 진행될 성을 그려놓은 듯했지만 입체 표현은 실제와 달랐다.

3D아트 기획에 활용할 수는 없을 듯했다.

‘그래도 이 정도 인기라면 활용해볼 만도 하겠어.’

우선 엽서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아이들과 함께 줄을 서는 부모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성은 볼 만큼 봤어?”

더 이상 성에 눈길을 주지 않는 내게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이젠 여기 가볼까요?”

나는 지도에 적혀 있는 VR어트렉션 체험관을 가리켰다.

아버지는 가는 동안 VR이 무엇인지에 가르쳐주었다.

눈 전체를 가리는 고글 같은 걸 쓰면, 그 안에 작은 화면으로도 시야 전체를 가리게 할 수 있었다.

완전히 가상현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걸 쓰고 고개를 돌리거나 끄덕여도, 고글이 움직임을 인식해서 화면을 적절하게 바꿔주거든.”

실제 같은 착시는 4D 영화를 통해 최신 기술로 접해보았다.

‘음…… 시각 정보만 제대로 처리한다고 해서 어지간한 걸 실제처럼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물론 4D 영화를 봤을 때 당황했던 나였지만, 한두 개의 사물을 실제처럼 느끼는 것과 완전히 가상현실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4D 영화는 착시에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실제라는 착각이 깨지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체험관 앞에 줄을 섰다.

줄을 서고 있는 동안에는 모니터를 통해 체험관 내부 이용객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롤러코스터 한 칸 정도 크기의 기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모두 VR 고글을 착용한 상태였다.

“와. 엄청 실감나나 봐.”

아버지도 VR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체험담을 들을 수 없어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사람들은 기구가 조금씩만 까딱하고 있을 뿐인데도 비명을 지르며 죽는소리를 내었다.

‘도대체 저게 뭐라고……’

줄이 줄어들어 결국 기구에 탑승하게 되었을 땐 조금 더 실망스러웠다.

고글을 착용하면 가려질 풍경이기는 하더라도 기구 주변을 둘러싼 실내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탑승객 여러분.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가동하겠습니다. 타임머신에 있는 동안 고글을 착용하지 않으시면 시공간의 틈새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수납함의 고글을 꼭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아이들이 허겁지겁 VR 고글을 착용했다.

나와 아버지도 그 고글을 착용했다.

고글엔 ‘2023’이라는 숫자가 표시된 상태였다.

‘타임머신 컨셉이라고 했지. 이제 저 숫자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연출을 해 보이는 거야.’

추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공상과학적인 타임머신 내부 풍경이 숫자 뒤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2023이라는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1억 4천만 년 전]

‘1억 4천만?’

과거로 돌아가는 정도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때쯤 나는 어느 틈엔가 미지의 열대우림의 상공에 붕 떠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회전했다.

그 풍경을 쭉 둘러볼 수 있게끔 말이다.

‘뭐야, 진짜 같잖아?’

그냥 태블릿 화면 같은 걸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댄 게 다가 아니었다.

어떤 기술을 접목한 것인지 고글 속 풍경은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화질도 상당했고, 입체감도 충분했다.

손을 뻗어도 내 손이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만을 제외하면 완전한 기술이었다.

‘저기 있는 건 뭐지?’

털이 없는 파충류 동물들이 열대우림 곳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큰 나무로 보였던 것은 동물의 크기로 보아 그리 크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조금 난폭해 보이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리 큰 크기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은 가상 세계가 아닌가.

‘이건…… 이걸 예술에 이용한다면 굉장히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VR 기술을 이용한 미술에 대해 생각하려는 순간, 내가 탑승하고 있는 머신이 지면을 향해 고속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여러 아이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타임머신이 깨졌는지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깨진 타임머신 유리 너머로 몇 초 전에 봤던 동물이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크기가 작은 게 아니었다.

떨어져서 보니 아파트로 5층 높이는 되어 보였다.

곧 우렁찬 소리를 내더니 입을 벌렸고, 빠르게 나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한 이빨을 들이밀었다.

더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

타임머신에 탑승한 주인공은 고대의 보물을 확보하고 지구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두가 뿌듯한 표정으로 열차에서 내렸지만 나는 온통 기진맥진해서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던 체험관 실내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예준아, 내리자!”

아버지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드림랜드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리고 해 질 무렵 퍼레이드가 시작된다는 성 앞 중앙 광장으로 나섰다.

드림랜드 곳곳의 조명이 켜졌다.

“퍼레이드가 시작되나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도록 라인이 넓게 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길을 잃지 않도록 나의 팔을 꽉 잡았다.

키가 작아 퍼레이드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빠. 조금 앞으로 이동할까요?”

“그래, 그러자.”

비적비적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퍼레이드가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 드림캐쳐 캐릭터들이 다 모였네!”

아버지가 감탄했다.

사람들 틈에 뒤섞여 있던 동화 속 인물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펭귄 모양의 사람부터 시작해 공주 옷을 입은 여성까지.

“여기서 퇴근하면 뭐 해요!”

관광객들 중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외쳐 물었다.

공주 복장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묻는 말이었다.

“왕자님과 무도회장에 간답니다.“

공주 복장의 여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단순히 복장만 공주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 공주가 되어 있었다.

동화 속 세계에 흠뻑 빠져있는 캐릭터들을 보자 나도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드림랜드 곳곳의 앰프에서 드림랜드 애니메이션의 노래가 재생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관광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음악에 맞춰 경쾌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퍼레이드가 시작되나 봐.”

아버지가 말했다.

딱 봐도 다리에 부목 같은 걸 달아놓은 것 같은 거인이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장미꽃과 야수와 미녀>의 야수 캐릭터였다.

“사람들이 캐릭터 분장을 하고 춤을 추는 거예요?”

“그렇지. 저런 걸 보고 코스튬이라고 하는 거야. 아까 그 공주처럼 공주 역할도 수행하는 거지.”

코스튬을 입고 있는 퍼레이드장의 사람들은 모두 전문 춤꾼 같았다.

춤을 추고 있는 모습만 봐도 신이 났다.

‘역할극도 수행하면서 저렇게 춤까지. 사람들에게 추억을 심어주려 부단히도 노력하는구나.’

아이들 중에는 그들이 진짜 동화 속 캐릭터라고 믿는 경우도 많을 것이었다.

그보다 내게 더 인상 깊었던 건 어른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이 실제 동화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도 모두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다들 좋아하네요. 아이들이 좋아해서 그런가?”

“뭐. 그렇기도 하고. 그냥 캐릭터도 아니고 동화 속 캐릭터가 나오니까 즐겁기도 한 거지.”

그들은 춤을 추며 성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그럼 관광객들도 따라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행렬이 성 앞에 다 다다를 때쯤이면 완전히 해가 떨어졌다.

그렇게 음악이 끝나고, 퍼레이드장의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포즈를 취하며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와. 너무 잘 춘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는 오랫동안 박수를 쳤다.

캐릭터들은 포즈를 멈추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뜨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제 슬슬 시작되려나 봐.”

아버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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