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예준의 움직이는 성
노라는 드디어 폐장쇼 제작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일을 빠르게 진행할 생각인지 팀은 금방 공시되었다.
우선 애니메이션 총감독에 노라 스미스, 캐릭터 및 그래픽 디자이너로는 바비 오스카.
그리고 ‘무함마드 카프탄’이라는 사람이 노라의 서브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윤예준: 특별 외부 자문
고정된 역할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문’이라면 경우에 따라 총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기대되는군.’
영상 일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만들더라도 특별한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첫 회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폐장쇼 관련 기획 회의를 위한 회의실로 들어와 앉았다.
많은 직원들이 이 제작 사단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드림캐쳐가 어떤 영상을 제작하든, 이 기획보다 더 큰 규모의 제작 건은 없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네가 윤예준이구나?”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다.
누군가 재기발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한 청년이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질끈 묶은 장발에 펭귄 캐릭터 후드티를 입고 있는 사내였다.
아랍계열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함마드 카프탄이라는 사람인 것 같았다.
“네, 맞아요. 아저씨는 이번에 서브감독으로 지명되신 무함마드씨?”
“맞아, 반가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너 엄청 유명하던데?”
말투가 그리 공손하지는 않았지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말투였다.
내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도착하자마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노라는 우선 이전 폐장쇼 영상을 보여주었다.
별 모양으로 터지는 불꽃들 아래로 조명이 설치된 분수를 쏘아 눈을 즐겁게 해주는 공연들이었다.
규모가 상당히 커 보였다.
하지만 노라와 바비, 무함마드는 이미 많이 보아 온 풍경인지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매번 특별한 기획으로 실행한 것들이에요. 당시에는 굉장히 창의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별것 없어 보이죠?”
“그래도 제가 참여한 기획인데 너무하시는군요.”
노라의 말에 바비가 반발했다.
“저기 나오는 모든 영상의 총감독이 바로 저였어요. 다 함께 반성해보자는 얘기였죠.”
“맞아. 나도 작년엔 있었어요.”
노라의 해명에 무함마드가 가세했다.
“항상 했던 말을 이번에도 할 수밖에 없네요. 창의적인 기획.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기획을 이번엔 꼭 만들어보자구요.”
아마 여태까지의 폐장쇼도 많은 호평을 받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노라는 만족할 줄을 몰랐다.
노라의 혹평에 항변했던 바비도 말로나 항변했을 뿐 심히 공감하고 있는 눈치였다.
세계 최고의 영상 기획자들이라 그런지 반성에도 능했다.
“드림랜드 시그니처 건물 뒤에 불꽃을 후광처럼 쏘아 올리면 어떻습니까?”
“별론데요. 그러지 말고, 캐릭터 모양의 불꽃을 만드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요.”
무함마드는 바비의 의견을 바로 일축한 뒤 주장했다.
‘별로’라는 평을 들은 바비는 전혀 마음 상하는 기색 없이 무함마드의 의견에 대해 질문했다.
“불꽃으로 캐릭터라면…… 얼마나 정교하게 말입니까?”
“완전 진짜 캐릭터처럼 보이게 해야죠, 당연히. 지루하게 캐릭터 실루엣만 보이게 하지 말고.”
“그럼 폭죽 기술자들한테 다 떠넘기고 우리들은 손가락만 빨게 되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그만큼 정교한 불꽃을 본 적은 있고요?”
바비의 지적에 무함마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지적은 매우 타당했지만, 앞선 무함마드의 냉정한 일축 때문인지 괜한 말꼬리처럼도 느껴졌다.
가만히 듣던 노라가 나섰다.
“이번 기획은 60주년 기념행사예요. 두 분의 의견 모두 제게는 매력적이고 창의적으로 들리는군요. 하지만 눈을 감고 상상해보세요. 지금은 70주년 폐장쇼 기획 회의 중이고, 여러분의 그 아이디어들을 저 예년 자료 중에서 보고 있다고 말이에요. 눈에 띄게 신선한가요? 아니면 예년 것들과 다르지 않아 보이나요?”
노라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아본 무함마드와 바비는 조용히 말을 잃었다.
각자의 상상으로부터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이번에 새로 모셔온 윤화가님의 의견도 들어보죠. 우리 조직에 오래 계셨던 분이 아니니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실지도 몰라요.”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바비와 노라는 이 폐장쇼 기획 이력만 수십 차례 해본 듯했다.
무함마드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 충분히 오래 몸담은 눈치였다.
“조직엔 전통이 생기는 법이죠. 창의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된 조직이더라도 말입니다. 여러 화단에 수많은 파격을 안겨준 윤예준님 의견이라면 저도 매우 궁금하네요.”
바비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의견 내기 이전에. 바비 감독님과 무함마드 감독님 모두 불꽃놀이와 관련된 아이디어만 이야기하셨는데, 불꽃놀이가 메인인 건 폐장쇼의 필수 사항인가요?”
나의 질문에 세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건 무함마드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 진짜네! 필수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네, 필수 사항은 아니죠.”
무함마드의 물음에 노라도 웃으며 대답했다.
무함마드는 바비가 개인적으로 꾸려온 기획안들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는 불꽃으로 열차 만들기, 이런 것만 쭉 고안해왔는데. 바비 감독님 기획들도 다 불꽃 메인 기획들이네! 불꽃 안 쏜다고 감옥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무함마드는 콧대 높은 바비가 한 방 먹었다는 느낌이 들자 오래도록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바비는 감정을 숨기며 자신의 제안서를 멀리 치워버렸다.
***
“사실 죄다 불꽃놀이만 기획해온 데에는 불꽃만큼 화려한 건 없다는 불안감 때문도 있습니다. 윤예준님 기획은 불꽃놀이가 아예 없이도 화려한 겁니까?”
무함마드는 매사 진지한 바비가 이번에도 적절한 질문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우선 화려함이 폐장쇼의 필수라는 점은 예준도 인정하는 듯했다.
드림랜드가 가히 최고의 놀이동산이라고는 하지만, 괜히 불꽃을 쏘지 않았다가 다른 놀이공원에서 불꽃을 쏴버리면……
선뜻 불꽃놀이를 포기했다가 사람들의 인상에서 멀리 내쫓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바비의 의견이었다.
“어릴 때 아빠를 따라 여의도로 불꽃축제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예준은 우선 불꽃놀이의 장점 먼저 언급하기 시작했다.
예준에게 불꽃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 화려함은 눈을 압도했고, 요란한 폭발음은 두 귀가 먹을 만큼 컸다.
바로 옆 사람이 하는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폭탄 비슷한 게 터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게 불꽃놀이의 위압감으로 자리 잡았다.
인상에 깊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불꽃놀이라는 것이었다.
“저기 영상에 드림랜드 성 보이죠?”
“네.”
“저 성에 LED 조명을 달아놓고 3D 아트 영상을 빔으로 쏘는 거예요. 실물에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 성 자체가 스크린이 되는 거죠.”
예준의 제안에 무함마드는 가장 처음 영화관 먼저 떠올렸다.
영화관 스크린은 모니터처럼 그 자체로 빛을 내는 물건이 아니었다.
프로젝터라는 장치로 빈 천 위에 상을 맺게 하는 것이었다.
성이 실제 스크린은 아니었지만, 스크린 역할을 하는 데에 부족함은 없었다.
‘완전 좋을 거 같은데!’
무함마드가 먼저 맞장구를 치려는 순간을 노라가 가로챘다.
“오! 좋아요! 최근에 드림랜드에 VR관이 개관했다고 들었거든요. VR은 가상현실을 실제처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거잖아요?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만…… 애니메이션 속에나 나오는 환상의 나라가 실제로 구현된 장소가 바로 드림랜드잖아요?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에 덧씌우기 굉장히 적절해요!”
“와우! 딱 좋네! 그럼 음악 틀어서 그 뒤에 박자에 맞춰서 불꽃을 터뜨리면 리듬감도 얻고…… 최고의 쇼가 되겠어.”
무함마드가 뒤이어 동의했다.
메인이었던 불꽃놀이를 보조 볼거리로 격하시킬 만큼 더 멋진 볼거리가 제공된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하지만 예준은 의견이 달랐다.
“불꽃놀이는 없는 게 좋아요.”
“예?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무함마드 대신 바비가 나서서 물었다.
“불꽃놀이를 쓰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만, 환경 오염 문제가 자주 대두되지 않던가요? 차라리 불꽃놀이를 아예 안 쓰고 그 점을 홍보하면 효과가 톡톡할 것 같아요.”
뒤따르는 이견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놀이공원에서의 불꽃놀이 정도는 다들 이해해주지 않나?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을 먹먹하게 울리는 불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예준이 덧붙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불꽃놀이의 장점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아닌 듯했다.
“제가 생각했을 때 불꽃놀이의 장점은……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와 박력 넘치는 폭발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밖에 더 있나요?”
“그게 불꽃놀이의 주무기죠.”
“불꽃이 아니라면 소리가 주는 박력을 얻어낼 수 없나요? 그리고 불꽃이 아니면 하늘에 뭔가를 시도할 수 없는 건가요? 거기 착안한다면 대안을 내는 건 시간문제겠죠.”
무함마드는 감동 받은 얼굴로 책상을 탁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불꽃이 좋다면, 그게 왜 좋은지 정도는 생각해봄 직한데……!’
윤예준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다.
광고상 정도나 타려면 보통 창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던데.
과연 뉴욕 어워드 트리플 크라운다웠다.
노라와 바비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주는 장점은 모두 취할 거예요. 하지만 3D 아트와 그 주변적인 기법들로 불꽃놀이를 완전히 대체해낼 수는 없죠. 아무리 해도 그 폭죽 냄새와 불꽃놀이의 현장감은 구현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번 기획이 주는 감동과 불꽃놀이가 주는 감동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 상태로 기획에 들어가야 해요.”
불꽃놀이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오히려 불꽃놀이의 장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함마드는 예준의 의견을 빨리 듣고 싶어 조용히 입을 닫았다.
“소리는 음향에 신경 쓰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하늘은 어쩌죠?”
“드림랜드가 필라델피아라는 지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 기후가 어떤가요?”
노라의 질문에 예준이 되물었다.
“지금 계절도 계절이니만큼,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닙니다.”
“그럼 천 한 장쯤 걸어놔도 되겠네요.”
하늘에 스크린이 없다면, 갖다 걸어 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강하지만 않다면야 스크린 재질은 가벼운 걸로 쓸 수도 있을 테니까
“글쎄요. 아무리 페장쇼라고는 하지만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성 주변에 스크린을 덕지덕지 붙여 놓는 게 좋은 일일까요.”
“지금부터 미리 설치해놓는다면 미관상 문제가 되겠지만, 폐장쇼가 진행되기 전까지 감춰놓기만 하면 돼요.”
예준은 화이트보드 앞에 가서 섰다.
“하늘 전체를 덮을 만한 스크린일 필요는 없어요. 하늘에 빔을 쏠 때마다 딱 그 위치에만 맞게 스크린이 나타나기만 하면 되니까요.”
스크린이 필요할 때만 등장하고 필요하지 않을 땐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래픽 제작 단계에서 프로젝터와 스크린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야 하기는 했지만, 스크린이 이동할 장소의 거리를 모두 통일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최소 규모의 스크린만 활용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제때제때 봉을 세워 스크린을 옮길 수는 있겠어요. 비용도 그 정도는 가능할 거고요. 너무 높다고 생각되는 지점에는 대형 드론으로 스크린을 펼쳐두면 돼요. 하지만 스크린에 쇼를 진행하는 건 전혀 새롭지 않잖아요. 쇼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천들이 왔다 갔다 하면 집중이 안 되지 않겠어요?”
노라의 의견이었다.
분명 성 뒤에서 계속 무언가 움직이고 있으면 감상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해가 진 뒤 폐장쇼 시간이 되면 드림랜드의 조명은 모두 꺼져요. 안전을 위해 설치된 최소 조명만을 제외하고요. 그럼 성의 꼭대기 지점은 그 윤곽이 구분되지도 않을 만큼 어두워지죠. 그래서 성의 가장자리마다 LED 조명을 설치해둘 거예요. 성이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그것이 오히려 관광객들 입장에서는 역광으로 보이겠죠. 성이 너무 밝아 그 뒤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요.”
듣던 바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쇼가 시작되면 일대가 많이 어두워지기는 합니다. 불꽃이 터지면 더 어두워지죠. 가만 보면 밝은 밤하늘도 강한 빛과 대비되면 칠흑 같아 보이는 법이죠.”
“밤하늘 자체를 암막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동안 스크린은 뒤에서 계산된 대로 오갈 거고요. 갑자기 성 윤곽선 바깥에 상이 맺히는 걸 보면 관광객들은 아마 크게 놀라게 될 거예요.”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무함마드는 완전히 흥분해 거의 비명을 질렀다.
“난 이거 무조건 동의해요. 그럼 하늘에서 펭펭이도 볼 수 있는 거잖아요!”
무함마드는 마치 반대 의견을 낼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노라도 바비도 반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바비 교수님은요?”
“네. 좋은 기획 같습니다.”
“그럼 윤화가님 기획으로 추진하기로 결정된 거네요. 윤화가님이 총기획자를 맡아주세요. 본인의 아이디어이기도 하고…… 감도 연출력도 굉장히 뛰어날 것 같으니 저보다는 윤화가님이 더 어울리겠어요.”
예준의 기획이었으니 그가 발전시키는 게 맞았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예준이 받아들였다.
기획자가 정해졌을 뿐인데도 무함마드는 폐장쇼를 이미 성공시킨 듯 손뼉을 쳤다.
그동안 바비는 자신의 기획안을 뒤집어 메모용 연습장처럼 쓰며 작게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겠습니다. 이동식 스크린과 드론. 영상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스크린 이동지점 먼저 확정해야겠군요. 혹시 이밖에 더 필요한 것 있습니까?”
“제가 책임 기획자가 되었다면…… 중요한 건이 하나 더 남았겠네요.”
3D 아트와 비밀리에 이동하는 스크린까지.
그밖에 남은 게 더 뭐가 있다는 것인지 감독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시 예준에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