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메리칸 드림 (4)
드림캐쳐 그래픽팀 직원들은 오전부터 회의실에 모였다.
바비는 모두가 베테랑인 드림캐쳐 스튜디오 그래픽 팀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막 예준과 같은 모션 그래픽 업무를 하나 부여받은 참이었다.
물론 노라는 ‘영상 합평’이라고는 했지만 말이다.
직원들은 자신들이 준비해온 영상을 틀었다.
RISA의 천재 졸업생이라고 인정받던 직원들은 대학 시절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드림캐쳐의 제작자들은 허튼일에 시간을 버릴 만큼 한가한 인력들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가 신뢰하는 직원들의 작품이니 그 자체로 인정해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외부에서 들어온 특수 인력인 예준에게 최상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회화 이용 모션 그래픽이라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지. 마치 본질적인 한계점이라도 된다는 듯이.’
콘티마다 들어갈 작품을 정해 한 점씩 그리고, 애프터 이펙트 프로그램을 이용해 모션 효과를 주는 것.
그게 모션 그래픽 제작자로서의 유일한 제작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자연스러움을 얻어내기 힘들었다.
“모두 훌륭하지만 드림캐쳐의 작품이라고 내보이기에는 모두 부족합니다.”
접근하는 장면은 그냥 그림을 확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 속 풍경이 실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모션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물을 종이로 잘라내 따로 움직임 효과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감각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건 결과물이에요, 결과물. 발전시킬 여지가 너무 많이 보여요.”
다음은 예준의 영상을 볼 차례였다.
예준은 스크린 앞으로 나와 서서 자신의 영상을 틀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계시는 것 같던데. 결과물에는 만족하십니까?”
“글쎄요……”
바비의 물음에 예준은 득달같이 답변하지 않았다.
예준은 바로 영상을 틀었다.
‘긴말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기대되는군.’
예준이 영상을 틀자 밝은 햇볕을 쬐며 독서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오!’
아직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바비는 크게 놀랐다.
마네의 이었다.
실제 마네의 그림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굉장히 표현력이 뛰어났다.
‘역시, 리틀마네라고 불렸다던데. 컴퓨터로 그려도 이 정도군.’
곧 영상의 모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녀는 그림이었지만 움직임이 실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뭐지……? 그래픽으로 하나하나 만진 건가?”
그림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요소들을 그래픽으로 만져주는 방법이 있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일괄적으로 모션 효과를 주는 것 말고 말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질리도록 시도해본 바비였다.
어떤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지금 보고 있는 영상과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었다.
‘설마 다 손수 그린 건가? 이 완성도 높은 장면들을 하루 만에?’
편의적으로 때운 부분 없이 온전한 작품들이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하루 만에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퀄리티였다.
화면이 조금씩 회전하더니 소녀의 뒷모습을 비췄다.
그리고 소녀가 보고 있던 책장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접근하는 장면도 하나씩 그린 것인지, 단순히 확대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배우지 않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것들도 해내고 있어…… 그것도 드로잉만으로.’
드림캐쳐 스튜디오의 모션 그래픽 제작자들에겐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바로 모션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한 <12가지의 법칙>이었다.
과장 표현이 주된 연출 방식이었던 만화로부터 시작된 장르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모션을 보여주는 데 사실성에만 집착하면 안 되었다.
예컨대 그중 두 가지 법칙인 ‘사전 동작’과 ‘사후 동작’은 사물의 움직임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활용을 약속한 연출법이었다.
고양이가 달리기 이전에 준비 자세를 취한다거나, 멈췄을 때 몸이 푸딩처럼 휘청이는 모습이 각각 사전 동작과 사후 동작에 해당된다.
그 모든 걸 예준은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드림캐쳐 스튜디오만의 노하우였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졌을 리는 없었다.
‘설마 영상만으로 저 요소들을 분석해낸 것인가?’
그 천재성도 천재성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예준이 드림캐쳐 스튜디오의 업무방식을 존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다음에 등장한 건 경주마와 바다였다.
‘일일이 다 그려야 하는데 굳이 바다를 그렸어.’
경주마는 뛸 때마다 흙먼지를 강하게 일으켰다.
흙먼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예 먼지 모양의 그림을 그려 작품 위에 띄우든가, 아니면 흙먼지 색깔로 블러 처리를 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예준은 흙먼지조차도 하나하나 그려서 표현하고 있었다.
또 바다는 물결이 자유분방하고 복잡해서 그리기가 굉장히 까다로웠을 것이었다.
초당 프레임이 24fps니까 5초로 친다면 120장을 그려야 하는 건데, 그 은근한 물결의 움직임을 어떻게 하나하나 표현하느냐는 것이었다.
‘음……? 잠깐. 뭔가 이상해.’
그림의 움직임이 매우 현실감 넘치기에 일일이 그렸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도 영상은 너무 생생했다.
일단 첫째로 회화 실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고, 계속 똑같은 그림을 그리며 미묘한 움직임마다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기계적인 작업력에도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설마…… 24프레임이 아닌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바다 장면이 끝나고 화면이 공간을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장면은 성당의 모습이 짧게 그려지고 끝났다.
‘......아쉽다.’
영상이 끝난 뒤 아쉬운 마음을 가져본 건 처음이었다.
그 영상의 박약한 감각 때문에 아쉬웠던 적은 있지만,
단순히 영상이 너무 짧게 느껴져서 아쉬워했던 건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자신이 15초 제한을 주었기 때문이었지만, 예준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매우 뛰어났다.
사람들은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제 눈에는 단점이 보이지 않는군요.”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이 정도면 좋은 평가에 인색한 바비의 극찬이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모션이 주는 시각적 효과에만 집중하는 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 말은 정답이지만, 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모션 구사에 능숙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윤예준님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군요.”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표현을 해냈다.
시각효과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유의미했다.
미술사적으로 굉장히 시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고전 회화 작품을 활용했죠? 그 그림이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과거의 미술과 현대의 미술이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데에 감탄했습니다.”
자연스러움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그들이 아는 마네의 명작들이 처음부터 모션 아트였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회화도 뛰어났다.
“이 현실감은 어떻게 얻어낸 겁니까?”
예준은 바비의 말에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고른다기보다는, 특별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프레임을 늘렸죠. 30프레임으로.”
직원들은 경악했다.
바비도 마찬가지였다.
24프레임에서 30프레임으로 늘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단순히 초당 네 장씩의 그림을 추가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24등분 되었던 1초를 다시 30등분으로 나눠서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만 했다.
48프레임으로 딱 두 배를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 그럼…… 작업을 두 배로 했다는 겁니까? 저 작품들을 그럼…… 360장에 450장…… 800장이 넘게 그린 겁니까? 하루 만에?”
“그렇죠.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하루 만에 그려야 해서 단순화가 많이 됐어요. 태블릿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몰랐다.
물론 천재 화가이니 그의 눈은 조금 다르겠지만, 바비도 직원들도 그림이 단순화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예준은 정말로 그 지점에서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
같은 시각, 노라는 드림캐쳐 스튜디오 사옥 내에 있는 이사장실에서 이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드림랜드 ‘폐장쇼’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림캐쳐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활용한 놀이공원으로, 해마다 수많은 가족들이 그곳을 찾았다.
캐릭터들의 퍼레이드나 불꽃놀이 등 수많은 이벤트가 매년 기획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게 바로 폐장쇼였다.
심지어 이번엔 드림캐쳐 설립 60주년 기념행사였다.
이사장도, 노라도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시기였다.
“기획이야 감독님께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그저 창의적인 이벤트로 기획해달라는 주문만 반복할 수밖에 없네요.”
이사장이 말했다.
미디어 아트로는 거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 노라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래서 기획은 어떻게 돼 가시나요?”
이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전에 이사장은 예산이 굉장히 많이 편성될 테니 필요한 모든 걸 시도하라고 했었다.
실제로 예년에 비하면 훨씬 많은 돈일 것이다.
이렇게 이사장이 특별히 요청하는 만큼 말이다.
“필요한 모든 걸 시도하라고 하셨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호. 굉장히 궁금하네요. 솔직히 노라 감독님이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귀띔은 해주실 수 있죠?”
웬만한 건 다 시도하라.
노라는 이사장의 그 표현에 집중했다.
한두 해 진행된 행사도 아니었다.
10년 단위의 기념행사는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했다.
꼭 몇십 주년 행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창의적인 기획은 매해 요구되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보통 같으면 드림캐쳐 내부 인력으로만 제작팀을 꾸려서 전념해야 하겠지만……
‘지금쯤이면 다들 윤예준 화가의 영상을 봤겠네.’
노라는 어젯밤 보았던 예준의 영상을 떠올렸다.
예준에게 굉장히 많은 기대를 품었었고, 예준은 그 기대를 완벽히 넘어섰다.
예술로서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파격은 바로 전통을 활용한 파격이었다.
오래된 재료로 새것을 구성하는 일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웬만하면 전통의 답습, 혹은 조잡한 짜깁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예준은 달랐다.
“이번에도 실망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생각한 수는 바로 윤예준이거든요.”
“윤예준이요?”
이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이번에 뉴욕 어워드에서 기록을 쓴 그……?”
“......”
“섭외하신 겁니까?”
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사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
이사장과의 대화가 끝난 즉시 그래픽 사무실로 가보았다.
직원들은 화면에 포트폴리오로 선정된 영상들을 여럿 띄워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대부분 예준의 영상에 모여 있었지만, 예준은 다른 작품들만 살폈다.
“제 영상에 이 장면 전환 연출을 써봤어도 좋았겠네요.”
예준이 영상 하나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될 것 같던데요? 예준씨 영상은 지금 그대로가 좋아서요.”
“알고도 안 쓰는 거랑 몰라서 안 쓴 거랑은 다르니까요.”
이번 업무는 기대했던 대로 예준과 팀원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노라가 들어오자 웃으며 속삭이던 직원들이 노라에게 집중했다.
“아, 노라 감독님. 무슨 일이세요?”
“공지할 내용이 있어서 잠깐 찾아왔어요. 집중해주세요.”
성공만 가능하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에 내부 인력 외부 인력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노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 이사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윤예준 화가를 섭외했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
여태까지 드림캐쳐 인력으로만 폐장쇼 이벤트를 구상해왔다는 것은, 애초에 외부 제작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드림캐쳐 직원들이 업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에 예준만 한 예술가는 또 없었다.
“곧 드림랜드 행사 폐장쇼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방문객들에게 환상의 볼거리를 제공할 생각이에요.”
노라는 드림랜드에 대한 설명과, 아직 이사장에게는 말하지 않은 폐장쇼 기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년 그래 왔듯 ‘특별 제작 사단’을 따로 꾸려 추진할 테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지원해주세요.”
노라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예준을 보았다.
“물론 윤예준 화가님은 또 지원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이 일을 위해 우리 스튜디오에 와주신 거니까요.”
노라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직원들이 예준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이야기된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 예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이번 포트폴리오 영상을 통해 직원들에게 실력을 보여주었다.
바비가 말대로 그 실력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톡톡히 확인한 차였다.
‘다들 기대가 만만한 것 같네.’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노라가 처음 생각한 대로 영상 분야의 적은 커리어는 이제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만 보였다.
그 압도적인 실력이 세상에 별로 공개되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