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메리칸 드림 (3)
RISA대학에만 해도 신입생 때부터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뉴욕 어워드 같은 일류의 수상 이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바비는 언제나 학생들을 직접 평가했다.
그건 노라도 같은 입장이었다.
물론 예준은 바비의 학생도, 부하직원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동료를 구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노라가 협업을 선언해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지만 이야기 정도는 나눠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저는 시선을 최대한 많이 끄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바비는 예준이 첫 말을 떼자마자 즉시 질문했다.
“영상 분야가 가장 대중적일 거라는 생각의 근거는 뭡니까? 영상 예술이 고전적인 회화보다 항상 더 많은 시선을 끌어들인다면, 어느 영상대학에 졸업작품으로 출품된 학부생 예술 영화가 모나리자보다 더 대중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영상에 대한 철학을 물으면, 솔직하겠답시고 대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박약한 고민을 솔직함으로 가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예준의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빠르고 정교했다.
“저는 그 분야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도 한 가지 되묻고 싶은 게 있네요. 앞서 모션 그래픽 이야기하셨는데, 그래픽을 움직이게 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관람객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즐겁게 하기 위한 거죠.”
“단순히 움직임만으로 시선을 잡아끌 수 있나요?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왜 즐거워하는 건가요?”
예준은 영상 분야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텄다.
단순히 움직임만으로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느냐?
그랬다.
그건 누구나 동의하는 전제조건이었다.
뭐든 움직인다면 시선이 가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움직임이 ‘왜’ 즐겁냐는 질문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런 본질적인 질문은 어느 예술 분야에서든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예준이 말을 이었다.
“영상은 서사와 미술, 음악의 종합예술이에요. 하지만 서사는 종종 뭉개지고 음악은 배경으로 후퇴하죠.”
“맞습니다. 시각효과 없는 영상이란 게 있습니까? 서사 없는 영상, 음악 없는 영상은 어떻게든 상상할 수 있잖습니까. 거기다 비디오의 어원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답은 분명할 겁니다.”
바비는 그렇게 맞받아치면서도 예준에게 그에 대한 답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이유에서 영상의 핵심은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던데, 그것도 착각이죠. 오히려 영상에서 가장 비중이 낮은 건 시각적 효과예요.”
바비는 교편을 잡으면서도, 영상 직군에서 일하면서도 예준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종합예술 분야의 비중을 따지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가장 많은 시간이 투자되는 만큼 무의식중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게 시각효과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음악과 서사에는 시간성이 있죠. 하지만 그림은 찰나의 시간에 멈춰있어요. 거기서 무언가 시간성이 발견되더라도, 그건 그림에 표현된 서사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이지 미술 자체의 속성이 될 순 없어요.”
영상 비평가들이나 할 법한 소리였다.
예준의 말뜻은 영상 속 시각과 청각, 서사 감각이 적절하게 섞여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제대로 알고 느끼는 것은 전문가들뿐이었다.
‘노라 감독님 말로는 이번 세 개의 작품이 영상필드의 첫 활동이라고 들었는데…… 무명 생활이라도 있었던 건가?’
영상 제작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뭘 만들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만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이는 ‘드림캐쳐 스튜디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모션 그래픽 작품들도 몇몇 봤어요.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봤죠. 현란한 모션에만 집중하는 것들 말이에요. 모션은 결국 정지한 그림들을 빠르게 나열하는 과정일 뿐이에요. 영상 속 모션이란 착시이자 허상인 거죠. 그러니 모션에만 집중한다는 건 허상에만 집중한다는 뜻이에요. 정작 중요한 건 그 착시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하느냐는 고민인데 말이에요.”
바비는 뜨끔했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눈을 즐겁게 하는 모션은 따로 있었지만 예술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경우, 바비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감하게 모션에만 집중했다.
예준의 말이 맞았다.
‘그런 것까지 통찰해낸 거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드림캐쳐 스튜디오였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동료는 한 명도 없었다.
지적하기 불편해서가 아니라, 모두 몰랐기 때문일 것이었다.
바비만이 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뉴욕 어워드 3관왕에 빛나는 유명 작가이기는 하지만 결국엔 11살 꼬마였다.
그 사실을 11살 꼬마가 파악하다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였다.
“역시 소문의 윤예준 화가님이시군요. 영상이 가지는 근원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겠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상의 핵심은 시각효과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비는 예준의 컴퓨터에 작업용 태블릿을 연결해주며 계속 이야기했다.
“화가님이 생각하시는 영상의 예술화 방안엔 어떤……”
“좋아요. 대화는 충분해 보이는데, 이제 슬슬 영상 합평으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노라가 바비의 말을 자르며 제안했다.
“각자가 어떤 영상을 만들어왔는지는 봐도 별 의미가 없다는 바비 감독의 말엔 공감해요. 하지만 같은 주제의 영상을 만들어 서로의 것을 비교해본다면? 이런 식의 소모적인 대화보다는 몇 배 효과적인 활동이 될 것 같은데요. 윤예준 화가님께는 첫 번째 영상 의뢰가 되겠습니다.”
***
노라가 제안한 영상 합평이란…… 바비의 말에 의하면 사실상 업무였다.
드림캐쳐 스튜디오는 상업물로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업체에 보여주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돼도 너무 오래되었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대외용 포트폴리오를 최신화해서 드림캐쳐 오리지널 스토리 외 새로운 작품을 만들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호흡을 맞추는 시간을 가지자고 해놓고는…… 호흡을 실전으로 조절하는군.’
생각보다 과감한 인물이었다.
그래픽 팀의 역할은 각자 퀄리티가 높은 모션 그래픽을 제작해오는 것이었다.
그중 좋은 작품들을 포트폴리오에 업로드하기로 했다.
바비는 드로잉(손그림)을 활용한 모션 그래픽을 제안했다.
“영상으로 성과를 내시기 이전에는 수준급의 전통 회화로 먼저 실력을 증명하셨더군요. 하지만 회화 실력 없이 그래픽 손질로만 제작을 진행하는 영상 제작자들이 삼류이듯이, 반대로 회화 실력만으로 모션 그래픽에 임하는 것도 별로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 저희 팀원들과 윤예준 화가님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작업일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나는 회화로도 영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바비도 그 점을 잘 알면서도 제안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카산드라 스튜디오에서는 주로 ‘카산드라 언리시드’라는 프로그램을 만졌지만, 다빈치 리졸브 같은 프로그램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다.
‘말이야 시니컬하게 해도 내게 큰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경우 보통 같아서는 기대에 부응하는 게 고작이겠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신임을 얻는 데엔 별로 매달릴 필요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영상 제작 요령이야.’
여태까지 보아 왔던 애니메이션의 연출을 모두 동원해 어엿한 작품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 뒤 다른 직원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초당 24프레임이야. 15초짜리를 만들라고 했으니…… 360프레임이 필요하겠어.’
그 이상의 조건은 없었다.
15초 영상을 만들되 드로잉을 활용할 것.
나는 마네였던 당시 그렸던 그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새로운 분야의 예술을 하고 있었지만, 과거의 그림을 모션 그래픽으로 재해석해 세상에 나오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360장의 그림을 그린다. 내일까지라고 했으니 하루 만에 완성해야겠군.’
나는 우선 작품을 태블릿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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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를 준비할 필요도, 붓을 제때제때 세척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색을 수치를 조작해 만들어내고, 태블릿 전용 펜으로 그려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을 계속 그려낼수록 시청자의 시각은 소녀가 들고 있는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소녀가 책 속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건 다섯 마리의 경주마가 경기장을 내달리는 사진이다.
에두아르 마네, <롱샴에서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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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마들은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대열을 이룬다.
서로 덩어리처럼 뭉쳐 하나의 역동감을 과시하며 내달린다.
빠르게 다가든 경주마들이 화면을 완전히 가렸다가 지나치면 푸른 바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에두아르 마네, <헨리 로크포르의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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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와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를 들춰낼 것처럼 불길하게 일렁이지만,
거기 작은 조각배를 띄워 타고 있는 남성들은 강한 확신을 갖고 바다를 가로지른다.
특히나 마지막에 활용한 그림은 1881년경 쿤스트 하우스 취리히에서 그렸던 작품이었다.
조각배를 탄 남성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화면은 비행기처럼 빠르게 날아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앞에 멈췄다.
롱샴의 경주마들에게서 시작된 역동감은 대성당에 솟은 쌍둥이 탑과 그곳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에까지 남도록 했다.
‘한번 볼까?’
그새 퇴근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모두가 퇴근했지만 내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프레임 간 간극을 확인했다.
1초 24프레임으로도 한계가 있는지, 움직임에 현실감이 없었다.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었지만 내 생각과는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24fps지.’
환상적인 영상을 표현할 땐 프레임 수가 가장 적은 24fps가 적절했다.
하지만 영화는 실사 사진의 나열이기 때문에 이대로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그림으로 그렸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들이었다.
그림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굳이 환상성을 잡겠다고 프레임 수를 낮출 필요는 없었다.
회화적인 인상을 유지한 채로 프레임 수가 현실감을 준다면, 그 부조화가 오히려 환상에 기여할 터였다.
‘30fps로 늘리자.’
나는 다시 편집프로그램을 켰다.
***
그래픽 사무실의 불은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노라는 문을 열어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 살폈다.
윤예준뿐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꽤 컸을 텐데도 예준은 노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굉장히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네.’
노라는 웃으며 예준의 작품을 함께 살폈다.
누구나 열정 있는 첫 출근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오늘 업무를 하나 맡겼는데…… 그걸 하고 있는 건가?’
노라는 예준의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전 회화에서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 바 있다고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태블릿으로 하는 작업에서도 이렇게 느낌을 잘 살려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매우 익숙한 도구를 쓰듯 작업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예준의 펜은 색깔 조정 키와 드로잉 패드를 빠르게 넘나들며 시간 단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보통 사람 같으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은 그림을……’
이 영상작업은 말하자면 스톱모션이었다.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야 하기 때문에 프레임 퀄리티를 낮출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만약 프레임 퀄리티를 유지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쏟아야만 했다.
하지만 예준은 작업 속도도 굉장히 빨랐고, 무엇보다 프레임마다의 퀄리티가 무시무시했다.
이 그림이라면, 프레임마다 쪼개 전시회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는 작품마다 명작이라고 했지.’
카산드라의 추천사를 떠올렸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