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80화 (80/241)

80화. 아메리칸 드림

미국은 프랑스만큼 먼 곳이었다.

기내 와이파이를 이용해 어머니가 사준 태블릿을 사용해보았다.

태블릿 사진첩에는 내 그림들이 저장돼 있었다.

내게 선물하기 전에 어머니가 미리 다운로드해놓은 것이었다.

나의 작품들을 한눈에 살펴보기 편하다는 점에서 좋은 아이디어였다.

물론 여태 그린 작품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설령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을 땐 이미 미술관을 차린 상태겠지만 말이다.

‘내 작품들 모두 후보에 들었다고 했지. 어떤 상을 받게 될까?’

뉴욕 페스티벌 광고 어워드.

내가 세 작품이나 후보로 내보냈으니 상을 탈 확률은 굉장히 높았다.

역대 수상작들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올해 심사위원 명단이 공개되어 있기에 확인해보았다.

‘노라 스미스’라는 사람이 대표 심사위원으로서 인사말을 게시해둔 상태였다.

‘노라 스미스라면··· 그때 카산드라가 이야기했던 그······’

RISA 대학교수이자 ‘드림캐쳐 스튜디오’의 감독이었다.

미디어 아트 분야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산드라의 추천을 일축한 사람이기도 했다.

작품이나 예술가를 평가하는 데에 유명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

적어도 내가 세 개의 작품을 어워드 후보에 올린 게 천재로서의 유명세 때문인지 아닌지 그녀가 가려내 줄 것이었다.

드림캐쳐 스튜디오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3D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만드는 제작 업체였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대표작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목록이 끝도 없었다.

‘애니메이션이라······ 기억나는 게 몇 가지 있긴 한데.’

내 기억에 예준은 어려서부터 애니메이션을 자주 봤다.

드림캐쳐 스튜디오가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건 사실인지 예준이 본 기억이 있는 작품들도 많았다.

초창기엔 2D로 제작하다가, 이제는 3D를 주로 제작하는 듯했다.

그 중 <장미꽃과 야수와 미녀>라는 애니메이션을 검색해 구매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군. 영상이야 카메라로 녹화해서 움직인다지만, 그림은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 거지?’

카산드라 스튜디오에서 3D 그래픽 모션을 제작해본 적이 있었다.

3D 그래픽은 눈앞의 물체가 실제로 움직이는 느낌이라면

애니메이션은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주 어딘가에 있는 그림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해온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3D 작업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장미꽃과 야수와 미녀>는 3D와 2D가 적절하게 혼합됐다.

<장미꽃과 야수와 미녀> 속 여자 주인공이 중세 네덜란드풍의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그녀는 노란색과 파란색 꽃들로 장식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벽면에는 여러 명작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 저 작품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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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있었다.

성의 전체적인 모습도 실제 네덜란드의 성처럼 잘 묘사된 상태였다.

첨탑 표현이 실제 같았고, 무엇보다도 페르메이르의 작품 특유의 푸른빛이 애니메이션 전체의 색감을 뚫고 빛을 발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닮은 여자주인공이 작품들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우연인가?’

나는 드림캐쳐가 제작한 다른 애니메이션들도 찾아보았다.

<헤라클레스>라는 작품에서는 <밀로의 비너스> 같은 그리스 조각들이 자주 등장했고, <인어공주>라는 작품에서는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예술 작품들이 작품 서사의 메타포로 활용되고 있구나.’

그 작품들의 느낌은 작품에 전체적으로 반영되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부터 야수와 미녀의 사랑이 결국 이어질 것임을,

<밀로의 비너스> 등의 조각을 통해 불완전한 반인반신인 헤라클레스의 목표가 좌절될 것임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인어공주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이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전달하고 예술 작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건 반대로 작품 속 숨겨진 이야기를 개발해내는 일이기도 했다.

신화와 같은 거대 서사는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삶을 은유해내는 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은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드림캐쳐는 작품에 대한 미학적 시선을 통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꼭 이 사람들과도 협업을 해보고 싶어.’

이번 뉴욕 어워드 심사위원이라면 노라도 내 작품들을 자세히 봤겠지.

내가 얼마나 많은 상을 타느냐가 바로 노라의 답이라고 생각해도 될 터였다.

***

광고제에서는 후보로 오른 사람들의 의전을 전담해준다고 했다.

광고제에서 제공하는 밴이 호텔 바로 앞으로 시간 맞춰 마중을 나와주었다.

호텔에서 마음 편히 푹 잤기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긴장을 풀기 위해 얕은 잠을 청했다.

나는 이미 해가 다 떨어진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부터 맨해튼입니다. 뉴욕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곳이죠. 곧 도착하겠네요.”

운전기사가 말했다.

안 그래도 도로변에 ‘Manhattan’이라 적혀 있는 팻말이 서 있는 걸 보았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맨해튼으로 들어서니 건물들이 눈에 띄게 높고 화려해졌다.

서울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건물들이 숲처럼 밀집해 있었다.

건물들이 번쩍거려 밤에도 밝은 아침 같았다.

나는 태블릿을 켜 그곳 풍경을 그렸다.

시상식장에 들어서자 비슷한 종류의 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사는 앞차가 시상식장 정문으로 들어설 때마다 조금씩 차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앞선 차들에서는 차려입은 사람들이 한 명씩 내렸고, 기자들은 그럴 때마다 플래시를 터뜨렸다.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잠을 청하기 전보다 더 긴장한 아버지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우리가 탄 밴은 시상식장 정문 앞에 섰고, 나와 아버지는 차에서 내렸다.

앞선 후보들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던 기자들이 눈에 띄게 다가와 섰다.

“제작하신 작품 세 개가 모두 후보에 올랐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오늘 결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먼저 와 있던 카산드라와 직원들이 우리를 반겼다.

“역시 윤화가님이 오시니까 반응이 완전히 다르더군요. 아시아인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가능성 때문인가 봐요.”

기자들은 나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바로 다음 후보자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시상식장에 들어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내부 모습은 일반적인 홀과는 확연히 달랐다.

단순한 모양의 직사각형이 벽에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는 인테리어였다.

뉴욕 어워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는데, 거기 있으니 빈 광고판으로 가득한 도심에 놓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선 진행자 뒤 큰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백수십 편의 영상들이 그 안에 분할되어 재생되었다.

수상은 부문별로 진행되었다.

브랜드, 예술&디자인 등등의 부문이 나뉘어 있었고,

상은 모든 부문을 합쳐 ‘Best of Show’, ‘Grand Award’ 그리고 부문별로 ‘1st Prize(금상)’, ‘2nd Prize(은상)’, ‘3rd Prize(동상)’, ‘Finalist’, ‘Shortlist’ 순으로 높았다. 그 중 파이널리스트 이상에 선정되면 뉴욕 페스티벌 웹사이트, 이메일,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광고 산업 최고 업계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마지막으로 예술&디자인 부문 후보들 만나보시겠습니다.”

앞선 백수십 개의 영상들 중 예술&디자인 부문의 후보로 오른 작품들만 추려서 재생되었다.

그 안에 나의 세 작품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진행자는 낮은 상부터 수상자들을 호명했다.

Shortlist부터 은상까지, 나의 이름은 계속 불리지 않았다.

“지금 남은 게 금상이랑 부문 통합 1등, 2등상뿐인데······”

아버지가 말했다.

나의 세 작품이 모두 최고상을 받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음으로 금상입니다. 금상에······”

진행자가 결과를 확인하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일부러 발표에 뜸을 들였다.

기대감을 부추기기 위한 것인 듯했다.

“윤예준의 <반전>! 축하드립니다.”

진행자의 입에서 나온 ‘윤예준’ 발음에 아버지와 카산드라가 뛸 듯이 기뻐했다.

첫 수상은 케니 광고였다.

내 위치는 어떻게 알고, 후보를 포함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돌아보며 박수를 보내왔다.

나는 앞선 수상자들이 했듯이 단상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걸었다.

“드로잉 퍼포먼스를 통해 보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깊은 미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두 개의 반전으로 이르는 기승전결이 매우 깔끔했던 수작 중의 수작이었습니다.”

수상자가 심사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그 장대한 규모를 체감할 수 있었다.

무대 방향을 바라볼 때는 특유의 실내 디자인으로 인해 도심의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반대로 관객석을 바라보면 도심 전체를 두루 살펴보는 기분이었다.

거기 수많은 관객과 기자들, 예술가들이 앉아 있었다.

인정.

그토록 바랐던 인정이라는 것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트로피를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카산드라 스튜디오 직원들이 채 자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행자는 통합 2등상인 Grand Award 수상자를 발표했다.

“Grand Award도 예술 부문에서 나왔습니다. 영광의 수상작은 바로······ 윤예준의 입니다!”

통합 1등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을 연달아 받느라 자리에 앉지 못하는 우리를 사람들은 존경에 찬 눈빛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영예, 2023 뉴욕 페스티벌 광고 어워드 Best of Show! 그 영광의 수상자는 바로······!”

진행자는 자신의 대본 카드와 방청객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꽤 긴 시간이었다.

“어떡해. 설마 예준이가 아닌가?”

아버지가 불길한 이야기를 했다.

카산드라는 처음으로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진행자만 올려다볼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30초 뒤에 노라 스미스씨께서 발표해주시겠습니다!”

방청객들은 당황했지만 진행자가 박수를 유도하자 이내 웃으며 노라 스미스를 맞이했다.

노라는 고급스러운 파티 의상을 입은 상태로 무대 뒤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 사람이 바로 노라 스미스씨군요.”

“그러게 말이야.”

무대 중앙에 선 노라는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노라 스미스입니다.”

그녀가 걸어 나오는 동안 박수를 보냈던 이들은 노라의 인사에 다시 큰 호응을 보내주었다.

“매년 이 뉴욕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그동안 많은 작품들을 만나왔어요. 후보로 오른 작품들은 모두 최고의 상을 받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광의 Best of Show는 그 모든 창작자분들에게 드리는 상이며, 저는 단지 수상 대표자를 뽑는다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해왔죠.”

카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라 선생님답다’라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대표로 아주 제격인 작품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모두 일어나서 축하해주세요. 당대의 모든 예술가들이 완성시킨, 2023 Best of Show! 바로 윤예준의 <예술가의 눈>입니다!”

내 이름을 호명하는 탄탄한 발성과 함께 일행을 훑는 노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잠깐 사이 마주친 그녀의 시선에서 나는 직감했다.

‘됐다.’

노라가 수상작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그 잠깐 사이 내가 금상과 은상을 받았다는 걸 잊었는지, 아버지와 카산드라는 완전히 흥분해서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가 상을 받는 동안 박수 소리는 한시도 끊이지 않았고, 세계 언론에서도 나의 수상 사실을 실시간으로 알렸다.

[한국인 최초 뉴욕 어워드 ‘트리플 크라운’ 달성! 예술&디자인 부문 상 싹쓸이]

[2023 뉴욕 어워드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은 11살 천재 화가 윤예준]

내가 수상 소감까지 마치고 내려오자 아버지는 밝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결국 어워드가 끝이 났고, 시상식장을 떠나려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저기요. 윤예준님!”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귀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매우 부유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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