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낭중지추 (5)
[정장 입은 어린 천재 윤예준, 모스크바CMC 라이브쇼 성황리에 종료.]
[윤예준의 드로잉 쇼, 하루 만에 전 세계 1억 명이 봤다]
[모스크바CMC, 브랜드 선호도 급등. 윤예준 효과 톡톡히……]
라이브쇼가 끝난 뒤로도 기사는 계속 쏟아져나왔다.
‘작품을 튼튼한 배에 태운 기분이야.’
전생에는 누군가 내 작품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살롱전에 도전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말이다.
살아서는 말년이 되기 전까지 내게 영광을 주지 못했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환생을 하고 나니 오히려 거장이 되어 바위처럼 돌변해버렸다.
‘살롱전을 깨기에는 너무 약했고, 현생의 내가 넘기에는 너무 단단하다는 건가?’
부조리한 일이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나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작품 평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전생의 경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 이름부터 알렸다.
작품에 좋은 홍보거리가 있으니 평가도 보장받는 기분이었다.
내 작품에 대한 홍보가 성공했듯 모스크바CMC도 큰 수혜를 보고 있었다.
그들 기업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오래 달성하지 못한 일을 이번에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반은 내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반과 에바와 함께 모스크바 번화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화려한 만찬.
음식들을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비프스트로가노프입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는데,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에바가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는 육류 음식을 권했다.
길게 썰어놓은 소고기에 처음 보는 소스를 듬뿍 섞어둔 것이었다.
“19세기 귀족 스트로가노프 집안에서 고안된 음식입니다. 소스는 러시아 고유의 소스인 스메타나 소스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형시켜 먹기도 하는 국민 음식이죠.”
소스의 맛이 강했지만 고기의 향이 완전히 덮이지 않았다.
고급 식재료를 사용했는지 기분 좋은 끝맛을 남겼다.
‘뵈프 부르기뇽이 떠오르는군.’
뵈프 부르기뇽은 와인으로 진하게 졸인 프랑스 전통 소고기 찜이었다.
소고기 육수, 화이트 와인, 유럽식 사워크림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한 요리였다.
나는 특히 그 음식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어떤 음식들 중에서도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에바가 처음 권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식사는 중요한 자리였다.
허기를 어느 정도 달래고 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과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
“이번 광고는 전적으로 윤예준 작가님 덕분입니다. 광고 수익도 굉장히 크고, 이번 라이브 쇼만 해도 하루 만에 1억뷰를 돌파했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다 값을 받고 하는 건데요 뭐.”
이반과 에바는 미소를 짓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광고는 사실 매년 합니다. 그런데 이번 광고만큼 성공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기업 PR 광고를 만들고 싶은데, 만약 함께해주신다면 ‘Future of Innovation’의 두 번째 시리즈로 만들고 싶습니다.”
두 번째 광고 제안이었다.
나로서도 이번 광고 성공으로 얻은 게 컸지만, 그렇다고 계속 모스크바CMC의 광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계속할 셈이 아니라면 두 번 할 이유도 없었다.
아메리카로 직접 들어가 이름을 알려야 했고, 또 뉴욕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면 더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정중하게 거절하자 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이번 광고비는 바로 지급될 겁니다.”
이반은 다시 웃었다.
이제 슬슬 내 쪽에서 이야기를 꺼내 볼 차례였다.
“감사합니다. 요즘 파리 법인 통해서 ‘화학 기업 한 군데’를 골라 투자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투자금을 늘리고 싶었던 참이었거든요. 잘 쓰겠습니다.”
“오……! 벌써 파리에 법인까지 두고 투자를 하고 계시군요. 하긴. 그림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돈을 벌고 계실 테니……”
화학기업이라는 말에 이반은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어쩌면 모스크바CMC와 비슷한 계열이었기 때문이리라.
“제가 아니더라도 크게 성장할 기업일 거예요.”
이반은 궁금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선뜻 기업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기업이라면 이반의 관심을 자극하기 충분할 테니.
***
예준과의 만찬이 끝나자마자 이반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즉시 컴퓨터를 켜서 기업별 대주주 명단을 하나씩 일일이 살폈다.
‘작은 화학기업이라면……’
이반은 ‘바로크’라는 기업의 대주주에 ‘YJ’라는 이름의 법인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들어보지 못한 법인이었지만 윤예준과 이니셜이 똑같았다.
CEO를 더 자세히 찾아보니 역시 윤예준이었다.
’바로크?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
이반은 그제야 기억났다.
일전에 파이프라인 관련 제안을 위해 이반을 찾아온 작은 기업 중 하나였다.
‘대표 이름이, 막스인가 하는 친구였지.’
호남형 인상의 젊은 리더였다.
지금은 주식회사로 상장한 상태였지만 당시엔 가족 경영의 유한 회사였다.
하지만 기업관이 폐쇄적이지 않았고 야망도 있었다.
그리 큰 기업도 아닌 바로크의 대표로서 이반을 독대했다는 건 막스로서도 큰 기회였다.
하지만 막스는 모스크바CMC와 함부로 맞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기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협력을 제안하는 데에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인상 깊은 사내였지.’
막스는 이반에게 파이프라인 구축을 제안했다.
바로크는 그 파이프라인 구축에 큰 비용을 보태줄 수 없지만, 만약 지어만 준다면 오랫동안 충실한 소비자가 되겠다고 했다.
이반은 의아했다.
바로크는 물감만으로도 안정적으로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들여오는 원재료의 단가를 낮춘다고 하더라도, 물감의 가격도 함께 낮춰버리면 결국 제로섬(zero-sum)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갑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바로크 입장에서는 또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기반 사업을 벌이지 말고 지금처럼만 운영하는 게 안전할 것이었다.
‘파이프 라인을 구축하면 그 비용은 언젠가 메워지겠지요. 하지만 저희로서는 굳이 할 이유도, 안 할 이유도 없는 사업입니다. 오직 대표님의 회사에 대한 투자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인데, 파이프라인을 지었다가 바로크가 도산해버리면 우리는 어디서 비용을 충당하겠습니까?’
당시 이반은 막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막스는 강경하게 대답했다.
‘우리 바로크는 모스크바CMC보다도 더 오래된 기업입니다. 쉽게 도산하지 않죠. 하지만 이반 회장님께 그 점을 설득시킬 재간은 없습니다. 200년이든 500년이든 제아무리 역사가 깊은 기업이라고 할지도 내일 당장 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 현대의 경제니까요.’
‘......’
‘하지만 바로크만 보고 투자해달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땅에, 그리고 유럽에 투자하라는 겁니다. 파이프라인을 일단 지어놓으면 어딘가엔 쓰게 돼 있습니다. 저희 바로크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그 파이프라인을 통해 모스크바CMC와 거래하려 하겠지요. 왜 유럽 석유 수입의 40%밖에 차지하지 못하는가? 왜 더 많은 양의 석유를 공급할 수 없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건을 더 팔고 싶다면 점포부터 더 들여라.
그전까지는 어떡하면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을지 고민할 계제도 되지 않는다.
그게 막스의 말이었다.
한 40대 중후반쯤 됐을까.
그 정도로 젊으니 그 정도 행동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40%라고는 하나 이미 유럽 석유 최대 공급처인 모스크바CMC에게도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바로크…… 규모는 작지만 물감 업계에서는 1등이야. 그러나 거기 만족하지 않고 있지.’
이반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막스보다 훨씬 더 큰 트럭을 몰고 있었다.
함부로 가속했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막스보다 더 큰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었다.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야. 가능성을 보는 계기가 있었던 거지.’
기업은 늙기 시작하면서부터 도태되는 법이었다.
젊은 도박꾼의 실패는 확률적이지만, 늙은이의 실패는 운명적이었다.
막스와 같은 젊은 CEO와의 협업은 모스크바CMC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윤예준 작가가 눈여겨본 기업이야.’
복원, 위작 감정, 회화, 영화, 그리고 이젠 광고까지. 예술가로서의 예준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그런 그가 큰 호의를 품고 있는 기업이라면, 적어도 망할 일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윤예준이라는 뒷심을 떠나서라도.
윤예준이 왜 그들을 고평가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바로크를 재고할 여지는 여전했다.
바로크의 최고 주주는 평범한 전문 투자자가 아니었다.
윤예준이라는 천재의 안목에는 실패가 없을 것이었다.
‘젊은 예술가와 젊은 기업가의 협업이라…… 간만에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군.’
직원들에게 혁신, 혁신, 지독하게도 외치던 그였다.
이반은 언행을 일치하기로 마음먹었다.
***
세계 3대 광고제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뉴욕 페스티벌 광고제(International Award Group) 시상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종합예술학교 건설에는 현재가 특별히 더 박차를 가해주었다.
덕분에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에 착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 뉴욕 방문에는 평소와 달리 붓과 물감뿐만 아니라 카메라와 같은 현대 미술을 위한 도구도 챙겼다.
내가 짐을 싸는 동안 어머니는 바쁘게 음식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옷을 채워넣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다가가 보니 어머니가 고기 요리를 식탁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 다 돼서 방금 부르려고 했는데. ”
“네.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던데요? 무슨 음식이에요?”
“응. 갈비찜이야. 명절 때 본 적 있지? 예준이가 매운 거 좋아하니까 맵게 만들어봤어.”
냄새에 이끌렸는지 아버지도 주방으로 나왔다.
“요즘 해외 갈 일이 너무 많네. 저번에 프랑스에서 입국한 뒤로 러시아도 다녀오고. 비행기 타는 거 힘들 테니까 밥 든든하게 먹고 가.”
어머니가 식탁에 앉으면서 말했다.
“다음번에 해외 갈 일이 있으면 엄마랑도 가고 싶어요.”
일전에 프랑스로 갈 때보다는 마음이 조금 가벼운 것 같았다.
이번 일로 노라의 연락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예정보다 해외에 더 오래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확정된 일은 아니라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갈비를 한 점 집어 베어 물었다.
혀가 살짝 아릴 만큼 매웠다.
내가 다급히 물을 마시자 어머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너무 맵게 만들었나?”
아버지도 따라 먹어보더니 동의했다.
“예준이가 먹기엔 맵긴 하네. 최근까지만 해도 김치전도 맵다고 했으니까.”
“그런가? 갈비 소스를 좀 더 섞어야겠다.”
하지만 매운맛은 얼마 안 가 입 안에 기분 좋은 통증으로 남았다.
“잠시만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마찬가지로 매운맛이 혀를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바로 그 맛이 좋아 매운 음식을 즐기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래. 먹기에 맵지 않다면 이 정도로 속이 상하지는 않을 거야. 아, 내 정신 좀 봐. 그보다.”
어머니가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고는 방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종종 보는 기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태블릿이었다.
“예준이 보니까 휴대폰으로 그림 많이 찾아보던데, 지금부터는 큰 화면으로 찾아봐. 이것도 연결하면 인터넷 되거든. 예전처럼 스케치 도구들을 챙겨 다닐 필요 없이 이거 하나면 그림도 편하게 그릴 수 있어.”
“아, 정말요?”
선물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더군다나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도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그 안에 있는 갤러리 탭 있지? 한 번 열어봐. 엄마가 특별한 선물을 넣어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