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낭중지추 (4)
시연회는 모스크바CMC의 본사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이반은 이번 시연회를 올해 최고의 쇼로 만들어주겠다며 거듭 언급했다.
공연장은 따로 빌리지 않고 본사에 있는 특별 공간에서 진행한다고 했다.
아버지에 의하면 모스크바CMC 본사의 규모가 굉장히 크다기에 굉장히 많은 기대를 품었다.
그렇게 실제로 방문해본 모스크바CMC 건물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와. 진짜 크네요.”
아버지가 감탄했다.
‘필립영화사’나 ‘케니’ 본사, ‘카산드라 스튜디오’ 등 많은 건물을 들락거려봤지만 그들 모두 모스크바CMC 건물에 비하면 작은 기업들이었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많구나.’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 국제업무지구 일대에서 가장 높았고 면적도 넓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크다면, 유럽에서도 최고 수준이겠네요.”
카산드라가 덧붙였다.
일전에 카산드라 스튜디오에 보내진 많은 광고 제안 기업들 중 규모가 제일 큰 모스크바CMC였다.
그들의 사업 규모라면 사옥도 위압감 넘치게 지을 법했다.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라이브쇼가 예정된 홀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만 해도 층별로 여러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건물 높이 때문인지 이동에만도 오래 걸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카산드라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에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선 대기실로 안내해드리죠.”
에바의 뒤에는 국제 기자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에 일제히 이곳을 돌아보았다.
에바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질문을 하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에바를 따라 대기실로 급히 이동해야만 했다.
“이곳이 구조가 복잡해서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홀 내부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많죠.”
그래서 복도에 나와 있었구나.
“모두 기자는 아닐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시청 목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도록 했어요. 그들 대부분이 전업 아티스트겠지만요.”
카산드라 스튜디오에서처럼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분장실로 들어갔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드로잉 쇼야. 더군다나 쌍방 소통은 이번이 처음이고. 최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내가 화장을 받는 동안 에바는 드로잉 쇼에 준비되어 있을 설비에 대해 설명했다.
먼 곳에서는 내 얼굴과 작품이 잘 안 보일 테니 현장에서 송출할 수 있는 화면도 두 대나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준비가 제때 끝났군요. 지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대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예준아. 화이팅!”
아버지가 응원했다.
나는 에바를 따라 대기실을 나서서 실내 통로를 따라 복잡하게 걸었다.
그동안 아버지와 카산드라는 홀 입구를 통해 관객석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마치 미로 같군.’
한참을 걷자 진행하는 행사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꽤나 가까워졌다고 느껴질 때쯤, 에바가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무수한 촬영 장비들과 직원들이 공연 준비로 한창이었다.
‘와. 이런 거대한 공간이 실내에 있다고?’
촬영 장비 건너편엔 무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무대의 측면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중장년의 남성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모스크바CMC의 CEO 이반이었다.
“네, 그럼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윤예준 화가님도 준비가 끝나신 것 같군요. 제가 소개 드리면 박수로 맞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관객들이 큰소리를 내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어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여기서도 귀가 저릴 지경이었다.
“소개합니다. 데뷔부터 한국 화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천재 화가이자 프랑스 바티뇰가의 영웅, 세계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미디어 아티스트, 화제의 아트버타이저 윤예준 화가님 모시겠습니다!”
나는 이반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약속된 타이밍에 맞춰 무대로 걸어 올라갔다.
박수 소리가 너무 커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무대 위엔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멀리서 플래시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조명과 분간이 되지 않아 그들 중 어디를 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볼 사람들은 어디서든 나를 보는 법이지.’
나는 무수한 조명으로 가려진 관객석 쪽을 빤히 내다보며 걸었다.
어차피 카메라는 많을 테니 그중 하나를 골라 마주 보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걷는 사이에 무대 뒤 초대형 스크린에서는 이번 광고의 메이킹 영상이 재생되었다.
카산드라 직원들과 내가 한국어로 상의하는 내용에 러시아어 자막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광고 촬영용 카메라 말고도 카산드라가 따로 찍어둔 작업 영상이 있었던지, 메이킹 영상은 작업 중인 나의 모습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럼 관객들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림이 바뀔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같은 그림이기는 하지만, 공개된 광고와는 다른 각도에서 촬영된 것이라 느낌이 또 달랐다.
영상이 끝나고 모든 조명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반과의 간단한 질의 시간이 끝나면 나의 드로잉 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럼 이반은 무대에서 내려갔고, 나는 미리 준비된 물감들과 수조 앞에 남겨졌다.
‘물감들은 이미 일러둔 대로 섞어뒀다고 했지.’
나는 수조의 잔잔한 물을 보다가, 다시 관객들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 수만 명의 사람이 숨어 나를 관찰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나는 붓과 물감을 들어 올렸다.
다시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
예준은 처음 방송하는 사람답지 않게 입담이 좋았다.
무대를 기준으로 좌우에 큰 모니터가 달려있어, 뒤에 있는 관객들도 예준의 얼굴과 수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반과의 질의가 진행되는 동안 예준은 나이에 맞지 않게 진지하기도,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CMC의 광고에서처럼 수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 말이다.
물보다 밀도가 높은 글리세린을 물감에 풀어서 입체 표현을 한다고 들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수중 그림과 수면 그림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기 위해 물 안으로 팔을 담그면 수면 위의 그림이 흐트러졌는데, 그 흐트러짐까지도 다음 그림에 확실히 반영되었다.
광고에서보다 기법이 더 발전된 것이었다.
이곳의 카메라 구도는 카산드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을 때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도로 진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이렇게 물에 그리는 건 종이에 그리는 것과 다른 매력이 있어요. 이야기할 게 많지만, 가장 매력적인 건 모든 작업 흔적이 결과물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거예요.”
예준은 물감을 뒤섞기 위해 붓을 움직이면 그 모든 게 그림에 흔적으로 남는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덧칠이 안 된다는 것인데, 예컨대 사람들 그리면 그 사람들 둘러싸고 있는 경치의 흐름도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사람을 빠르게 그리면 천천히 그렸을 때보다 경치의 흐름이 빨라졌다.
붓을 들어도, 물감을 바로 떨어뜨려도, 선뜻 무엇도 하지 않고 고민하는 것까지도 예준의 그림엔 모두 흔적을 남겼다.
그림을 발전시켜나갈 때마다 감탄하던 관객들은 예준이 수조 밑 조명을 켜자 완전히 기립박수를 쳤다.
마치 그것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라는 듯이 말이다.
그제야 수중 그림과 수면 그림이 진가를 보였다.
수면 그림에 가려져 있던 수중 그림은 수면 위로 음영이 졌고, 그제야 그림이 완성되었다.
예준은 무대 담당자들에게 신호를 보내 무대 위 조명을 모두 껐다.
그럼 미리 형광 도료를 섞어둔 물감들이 형형색색 빛을 냈다.
“무대에 빛이 많을 텐데 형광 도료를 섞어달라고 한 이유가 있었군요.”
카산드라는 그 요구사항을 직접 전달한 사람이었지만 의도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덕분에 검은 물감으로 수면을 채워도 광채는 눈부셨다.
예준은 검게 칠한 뒤 하얀 물감을 섞어 그곳에 흐름을 표현했다.
여러 방향으로 오가는 검은 물의 흐름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잘 어우러졌다.
그 뒤 다른 물감을 동원해 빛나는 별을 표현하면, 그게 그림의 마지막이었다.
“미래지향적인 모스크바CMC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해. 심지어 모스크바 CMC가 좋아지려고 한다고. 이런 게 바로 아트버타이징이라는 건가?”
기자들이 의견을 나누며 기사 작성에 전념했다.
민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여태까지 예준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그림 실력이 매우 뛰어나고, 어린아이의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신기함 때문이 클 것이었다.
예준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퍼포먼스를 하고 나니, 사람들은 예준의 예술성에 전보다 더 크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네의 붓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게 생각나는군.’
어쩌면 예준은 이제 마네와 같은 반열에 일찍이 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살아서, 그것도 매우 어린 나이에 말이다.
공연이 끝나면, 예준의 요구사항대로 실시간 방송 시청자들과의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종이로 찍어내지 않는 마블링(대부분 예준의 그림을 마블링이라고 불렀다)의 보존 방법에 대해 물어왔다.
또 어떤 예술가는 물감을 캔버스의 ‘부착’을 통해 가능한 종이 회화와 ‘반발’을 통해 가능한 이 마블링 사이의 유의미한 미학적 차이에 대해 물었다.
그 밖의 모든 질문이 11살짜리 아이에게 할 법한 질문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언어로 주어지는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굉장히 유창하게 답변했다.
답변 수준도 질문의 의도에 정확하게 맞닿았다.
어떤 난해한 질문이 있어도 답변을 에둘러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시간을 예준이 스스로가 원했으니까. 답변은 성의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새삼스럽긴 해도, 예준의 언어 실력과 남다른 예술관에 민제는 크게 놀랐다.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 80만 명의 시청자가 예준의 라이브를 시청하고 있었고, 모두 그 질의응답을 지켜봤을 것이었다.
뉴스 기사와 광고로는 예준의 천재성을 모두 짐작할 수 없었다.
이번 라이브를 통해 예준이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가 될 인물인지 세계인이 알게 되었을 것이었다.
***
RISA대학 영상과의 석좌교수이자 미국 ‘드림캐쳐 스튜디오’의 필름디렉터 노라 스미스. 그녀는 며칠 전 뉴욕 페스티벌로부터 최종 파이널리스트 후보작들을 전달받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뉴욕 페스티발 광고 어워드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엔 대표 심사위원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후보 중엔 이례적으로 한 작가의 작품이 세 개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점이 지금 노라를 꽤 힘들게 하고 있었다.
‘윤예준이라는 작가군.’
카산드라가 추천해준 어린 예술가.
이미 그의 광고 세 편은 여러 번 돌려 봐둔 상태였다.
많은 사람이 윤예준의 천재성을 칭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라는 선뜻 그러지 않았었다.
그의 소문을 애써 무시하려 노력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노라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계속해서 내 귀에 들어오는 거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확실히 그의 광고들은 인정할 만했다.
누구나 처음 몇 작품 정도는 좋게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업계에 익숙해질수록 신선함은 평이함에 매몰되어갔다.
그럼 그들의 이후 작품들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자신의 초기 작품에 대한 복제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게 초년 성공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그들은 자신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던 작풍이 가장 위대했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슬럼프를 겪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흉내 내려 애쓸 뿐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초년 성공을 거둔 예술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대두되는 경우는 본 적 없었다.
‘내가 뭔가를 간과했다는 뜻인데……’
노라는 머리를 질끈 감쌌다.
또, 예준은 애초에 화가였다.
일반적인 미술작품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관람객들만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자신의 작품을 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만 작품을 보여주는 장르가 바로 순수미술인 것이었다.
하지만 광고는 달랐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우선 끌어야만 했고, 그 뒤에 예술을 시도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깐깐한 장르가 바로 어드버타이징인 것이었다.
그런 장르에 있어서만큼은 윤예준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했다.
-곧 윤예준 작가의 라이브 쇼가 시작됩니다. 이 작가를 평가하는 데에 좋은 근거가 될 테니 시간이 되신다면 꼭 시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카산드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카산드라가 그런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도 노라는 그의 라이브쇼를 봤을 것이다.
신중하게 평가하겠다면서 그를 나 몰라라 하는 교수들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
노라는 라이브쇼를 보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라이브 쇼가 끝났을 때 카산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산드라는 떠들썩한 장소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현장에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전화하신 거 보니 공연을 보셨군요?
“네. 봤어요. 굉장히 인상적이더군요.”
-드디어 데려갈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카산드라가 기뻐하며 물었다.
“윤예준 작가의 의사가 어떤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이미 카산드라 스튜디오와 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예의상 물어보러 전화한 거예요. 가장 아끼는 제자의 인재를 빼앗는 것 같아서 마음이 썩 좋지 않거든요.”
카산드라와 노라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를요! 천재의 족쇄가 될 순 없죠. 교수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