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낭중지추 (2)
나는 카산드라의 사무실에서 ‘모스크바CMC’의 광고에 대해 카산드라와 의견을 나눴다.
우선 모스크바CMC 측에서는 제안서의 기획안을 자유롭게 수정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제작비 또한 많이 들어온 편이라 웬만한 건 다 시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번 광고는 15초에 모두 담아내야만 해요. 하지만 모스크바CMC에서 제시한 기한이 충분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석유화학회사이니 유화를 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바로크 물감을 노출시킬 기회는 없었다.
‘케니’ 광고 때엔 메이킹 필름에 짧게 노출된 것을 시청자들이 포착한 것이라서 홍보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번 광고는 모스크바CMC만을 위한 광고로 만들어 성공시킨 뒤, 바로크는 그 뒤에 소개해 주는 게 나았다.
‘유화를 여러 점 그려서 예술성을 잡아낼 수는 있겠지만 조금 지루해질 거야.’
카산드라는 기획안을 잠자코 읽더니 말했다.
“혁신과 친환경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내려면 현지로 촬영을 나가서 여러 풍경을 드론으로 잡아내는 게 가장 무난한 방법이에요. 최소한 중간쯤의 성공은 보장되어 있죠.”
내가 원하는 건 어중간한 성공이 아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니 카산드라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물…… 친환경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물이지.’
나는 유화 물감을 챙겨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면대를 막고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물이 세면대에 가득 찼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감을 그 위에 조심스럽게 풀어보았다.
카산드라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카메라를 가지고 와 물감이 번지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이건 뭔가요?”
“물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확인해본 거예요. 기름 성분의 물감은 물 위에 뜰 테니까요.”
항상 종이에만 그리는 그림을 물 위에 그린다고 생각하면 꽤 재미있는 형태의 작품이 탄생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보기 좋게 뜨지는 않는군.’
내가 떨어뜨린 물감은 응집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지 잘 풀어지지 않았다.
조금 휘저어 모양을 만들어 보려고 해도, 다시 뜬 물감이 모여드는 바람에 뭔가를 시도하기 어려웠다.
“재미있는 시도 같았는데, 뭔가가 잘 안 되네요.”
“그러게요. 이를 어쩐다……”
나는 뭉친 물감이 수면 위를 떠도는 걸 보며 생각해보았다.
서로 섞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물 위에 물감을 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성질로 인해 마음대로 풀어낼 수도 없었다.
‘붓 세척용 오일을 많이 풀어볼까?’
그렇게 하면 점성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기름기는 여전할 거였다.
그러나 ‘혁신’을 살리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일은 그림을 희석할 때도 쓸 수 있는 것이었으니, 그 외의 세정 도구를 활용할 수는 없을까?
물과 기름의 중간쯤의 성질을 띠게만 할 수 있다면…
“아! 천연 산(Acid)!”
천연 산을 물감에 섞어서 물에 부어본다면 뭔가 다를지도 몰랐다.
“혹시 레몬즙 같은 거 있나요?”
“네? 레몬즙이요?”
카산드라는 직원 사무실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며칠 전에 직원 중 하나가 다이어트용으로 잔뜩 사놓은 게 냉장고에 있을 텐데. 물어보고 가져올게요.”
“네. 레몬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나는 카산드라가 레몬을 얻어오는 동안 팔레트에 유화 물감을 충분히 짰다.
카산드라는 몇몇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레몬을 사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카산드라에게 받은 레몬을 조금 짜서 물감에 섞었다.
아직 끈적한 점성은 세척용 오일을 섞어 낮췄다.
그리고 앞서 물을 받아둔 세면대에 뿌려보았다.
“오. 레몬이 뭔가를 해냈네요!”
물감은 내가 뿌린 모양 그대로 떠올라 형태를 유지했다.
앞서 떨어뜨려 본 물감이 가장자리에 뭉쳐 있는 것과는 비교되었다.
예준은 붓을 가져와 물감들을 휘적거려보았다.
종이에 그릴 때처럼 제법 의도대로 모양이 잡혔다.
시험 삼아 모스크바CMC의 로고도 그려보았다.
레몬즙 농도를 올린다면 복잡한 패턴의 무늬도 그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괜찮은 작품이 하나 나올 것 같네요.”
***
카산드라와 직원들은 촬영장에 큰 수조를 가져다 놓았다.
예준이 그리는 모습을 잘 담아낼 수 있도록 천장에 수직으로 카메라를 달았다.
‘물감 성분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정확히 알고 있어.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회화라는 기법 자체를 재구성해본 거야.’
예준은 색깔별로 물감을 짜 비율 맞춰 레몬즙을 섞었다.
“씬이 몇이나 있죠?”
“4씬입니다. 씬마다 3초 정도씩 할애되는 거죠.”
예준이 물감을 물에 타는 모습을 보자마자 카산드라는 씬 연출 모두를 한 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작업하는 모습은 빨리 감기로 처리하고 장면을 진득하게 보여주자.
그럼 매우 혁신적인 형태의 광고가 탄생하는 거야.
“친환경 기업이라고 했죠. 낭비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으니, 한번 활용된 물감은 바로 다음 씬에 그대로 들어갈 거예요.”
1씬에 세 가지 색을 썼고 2씬에 다섯 가지 색을 써야 한다면, 추가로 두 가지 색만 섞어 2씬을 구성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걸 지금 즉석에서 구성한다고? 쉽지 않을 텐데.’
안 그래도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예준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카산드라는 스케치북을 챙겨와 펜과 함께 예준에게 건넸다.
“여기 스케치북이요. 적으면서 고민해보세요.”
“아뇨, 방금 생각 끝났어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예준의 말에 놀란 직원들은 바쁘게 카메라를 켰다.
차근차근 구성을 발전시킬 필요도 없이 머릿속에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모양이었다.
그건 마치 밑그림 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콘티 없이 바로 촬영에 나가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연습도 없이 바로 촬영을 시작하다니.
물방울 소리를 더 섬세하게 담기 위해 음향 감독이 수조 주변 곳곳에 마이크를 설치하자,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수조 아래 조명을 켜는 즉시 예준은 푸른 물감과 초록 물감, 그리고 붉은 물감을 조금 부었다.
예준이 붓으로 조금 휘저으면 마치 고흐의 그림 같은 풍경화 하나가 완성되었다.
콘티에 의하면 ‘#1. 당신의 일상’ 파트였다.
‘물 위에 그리는 그림인데도 수준급이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물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건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예준은 오랫동안 그 방식으로 작품을 내본 사람처럼 해내고 있었다.
영상 편집도 바로바로 익혔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준의 그림을 보고 시각적으로 감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뒤이어 예준은 초록색을 뭉쳐 갈색을 조금 섞었다.
그동안 하늘을 표현하고 있던 파란 물감이 그들을 둘러쌌다.
바다였다.
해를 표현했던 붉은 물감은 수평선 멀리 치우고 해 질 녘 바닷가처럼 물결에 부서지도록 했다.
콘티상 ‘#2. 우리의 열정’ 부분이었다.
예준이 말했던 대로 낭비되는 물감은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법 복잡한 석유 채굴 현장도 뚝딱 그려냈고, 끝내 물감이 전체적으로 탁해졌을 땐 완전히 검은 물감을 섞어 우주를 표현했다.
우주치고는 조금 얼룩덜룩했는데, 얼룩마다 물감을 몇 개 더 찍어 별을 표현하니 감각적인 우주 그림으로 변했다.
거기 흰색 물감을 섞어 우주선을 그렸다.
콘티상 ‘#4. 세계의 미래’ 파트였다.
마지막 씬까지 본 직원들은 멍하니 그려지는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결 소리가 녹음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감탄도 내뱉지 못한 채로.
예준은 마지막 씬이 카메라에 충분히 잡히도록 기다렸다.
그리곤 미련 없이 물 위에 뜬 물감들을 팔뚝으로 확 쓸어서 수조 바깥으로 걷어냈다.
그럼 수조 안엔 티 없이 맑은 물만이 남았다.
직원들은 저마다 카산드라의 눈치를 살폈다.
“컷!”
“와아!”
카산드라가 ‘컷’을 외치자 직원들은 그제야 환호성을 지르며 예준에게 달려들었다.
팔에 검은 물감이 묻어 있는 예준이었지만 그를 껴안고 들어 올리는 데 망설이는 사람은 없었다.
드론을 들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뻔했던 카산드라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걸로 촬영 끝난 건가……?”
“네. 촬영은 한 5분쯤 걸렸는데 이제 편집해야죠.”
5분을 15초로.
어려운 일이 남아 있기는 했다.
작업하는 모습을 빨리 감기로 처리하려는 생각까지는 해두었지만 5분씩이나 시간을 줄일 수는 없었다.
직원들은 촬영 도구와 수조를 정리하며 편집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작업하는 부분을 좀 잘라서 완성 직전부터만 빨리 감기 할까요?”
“그럼 물감 낭비를 안 한 티가 안 나잖아요? 꼭 살려야 하는 포인트인데.”
“30초짜리 광고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모크스바CMC 쪽에 연락해보면 안 돼요?”
모두 소모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듣고 있던 예준이 끼어들었다.
“꼭 제 작품 전체가 다 드러나지 않아도 돼요. 씬 단위뿐만 아니라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을 그릴 때마다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작업했으니까, 작업하면서 영상 확인하시다 보면 편집 지점이 눈에 띌 거예요.”
“와…… 그런 것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카산드라도 예준이 이 그림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다.
일부러 뜸을 들였다면 지금보다 더 빨리 작업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작품이 아니라 광고를 만드는 거니까요. 당연히 편집까지 고려하면서 그려야죠.”
영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과 작업하는 건 그래서 힘든 법이었다.
하지만 ‘카산드라 언리시드’를 통해 실제로 작업을 진행해본 예준은 팀원들과 ‘호흡’이라는 걸 맞춰줄 줄 아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호흡을 맞춘 정도가 아니야.’
카산드라는 모든 직원이 예준에게 달려들어 찬사를 늘어놓을 동안 영상 속 편집점들을 확인했다.
예준은 그림을 통해 완곡한 방식으로 편집을 지시하고 있었다.
카산드라와 직원들은 예준의 편집 의도를 캐치해 그대로 작업하기만 하면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물결소 리와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작업해 영상에 첨부했다.
그러자 물을 열심히 휘젓는 예준의 붓은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보였다.
카산드라와 편집 감독은 예준의 의도를 파악해 컷과 클로즈업, 되감기와 빨리 감기, 정지와 페이드 효과를 적절히 활용했다.
작업은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완성본입니다. 마지막 검토를 받은 후 모스크바CMC에 전송하면 되는데 어떠십니까?”
카산드라는 예준에게 작업 결과물을 보여줬다.
예준은 결과물을 보고는 마음에 드는 듯 싱긋 웃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포인트만 더 추가하면 훨씬 좋겠는데요.”
“네. 뭔가요?”
카산드라는 바로 편집 파일을 켰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인데……”
예준은 카산드라가 프로그램을 만지는 동안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해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수정에 임하던 카산드라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렇게 최종본 확정을 마쳤을 땐 둘 다 환히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 그야말로 혁신입니다. 이 광고, 아니 이 작품은 뭐라고 이름 붙일까요?”
예준은 기획안을 보며 적절한 키워드를 골라냈다.
“‘Future of Innovation’으로 하는 게 좋겠네요.”
혁신의 미래.
그 짧은 명사형의 문장은 의문문이었다.
예준과 카산드라 스튜디오 직원들은 짧은 15초의 영상에 그 물음과 답을 모두 제시했다.
“바로 전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