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75화 (75/241)

75화. 낭중지추

같은 시각, 러시아 최대의 석유화학기업 ‘모스크바CMC’의 마케팅 총 책임자인 에바 채플린은 만성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소엔 괜찮았다가도 밤새 골머리를 썩이고 난 다음 날이면 이렇게 어김없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트레스야 항상 받았으니 두통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몇 년은 되었다.

‘혁신이라……’

방금 회의에서 회사의 CEO 이반이 요구했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었다.

모스크바CMC는 자원 채굴지를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장지 근처 국가들과 투자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만 했다.

‘혁신’을 키워드로 잡아 이반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을 줄 참신한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광고란 광고는 다 시도해봤잖아. 다른 영업을 잘할 일이지 이게 광고로 가능한가?’

석유 문제는 정치까지 개입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광고 몇 편으로 정치적인 변화를 꾀할 수는 없었다.

이반에 대한 미담 기사도 흘려보았고, 모스크바 레드 스퀘어에 마스코트 인형도 설치해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그럭저럭이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직원들이 분석한 레퍼런스와 기획안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본 나머지, 이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광고가 레퍼런스인지 아이디어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이 일을 너무 오래 했어. 창의력을 다 탕진한 거지.’

에바는 한숨을 쉬며 레퍼런스 분석을 다시 읽어보았다.

‘음?’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자료가 추가되어 있었다.

아마 직원 중 하나가 오늘 제출한 것일 터였다.

‘어디 보자……’

한 한국인 아이가 물감으로 얼룩진 벽을 등지고 카메라맨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특히 뉴럴 엔진에 의해 구현되는 새로운 이미지 프로세싱 시스템인 딥퓨전 기능이 활용되었다. 이 딥퓨전 기능을 영상 그래픽 속에 적절히 녹여냄으로써 흥미뿐만 아니라 홍보 효과까지 완벽하게 확보해내고 있다.

직원의 분석에 의하면 광고의 키워드인 ‘반전’을 200% 활용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기존 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었고, 그를 통해 활기찬 분위기를 선사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했다.

광고 마케팅만으로 매출을 끌어올린 모범사례였다.

에바는 윤예준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최근 그는 <장대한 파장>이라는 작품으로 ‘케니’ 공모전에 우승해 큰 이슈를 몰았다.

직원이 분석한 레퍼런스 광고뿐만 아니라, 최큰 ‘카산드라 스튜디오’와 협업한 작품도 각계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광고 한 편으로 기업의 모든 목표를 이뤄버렸군.’

에바는 다급히 전화를 들어 해당 레퍼런스를 분석한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제출하신 ‘케니’와 윤예준 광고 있죠? 제작사로 참여한 ‘카산드라 스튜디오’라는 곳까지 해서 주요 광고, 작품, 마케팅 내용들 전부 조사해서 제출해주세요. 이 기획으로 추진하게 될 것 같으니 어서요!”

생산은 기업의 몫, 공급은 마케터의 몫이었다.

카메라 품질을 올려 큰 이목을 끌 수는 있더라도, 결국 마케팅이 잘되어야 고객의 이목을 끄는 법이었다.

하지만 에바로서는 ‘우리 석유 품질 좋아요.’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도 아닐뿐더러 석유엔 품질 같은 건 없으니.

‘이반이 말하는 ‘혁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

에바는 그들에게 협업을 제안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이 광고로 큰 주목을 받고 있을 터라 이미 계약은 늦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솔직히 모스크바CMC라면 그들 광고 이력 중 가장 큰 건일 테니까.

담당 직원은 퇴근하기 전에 조사 결과를 에바에게 공유했다.

급히 내린 업무 지시였다.

에바는 주저 없이 자료를 검토했다.

그리고 각각 영상의 매력지점, 광고의 마케팅 전략, 윤예준 작품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에 대해 직접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스크바CMC와 어떤 방식으로 어울릴 수 있을지를 모두 기획해 ‘카산드라 스튜디오’에 전송했다.

이제 남은 일은 ‘카산드라 스튜디오’로부터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카산드라 스튜디오는 케니 광고를 시작으로 광고 요청 건이 상당수 늘었다. 특히 <예술가의 눈> 송출을 기점으로는 전화통이 거의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눈치가 빠른 기업들은 메일로 무기한 제안서를 보내왔지만, 모두 검토하기 어려울 만큼 양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여러모로 좋은 일이지.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건.’

이전에도 물론 여러 광고사의 제의를 받아온 카산드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기획들 중 카산드라 스튜디오가 원하는 제안서를 골라서 진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상당히 커졌다.

계속 다음 기획을 고려하며 광고 제작 제안서들을 검토했다.

그렇게 가장 매력적인 시나리오를 몇몇 추려낸 뒤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 요즘 예술학교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필요할 것이었다.

“광고 제의가 꽤 많이 들어왔어요. 혹시 생각이 있으시다면 스튜디오로 한번 방문해주세요.”

<예술가의 눈> 이전에 제안서를 보낸 광고주들도 지금은 예준과의 협업을 바라고 있었다.

은연중에 진행 중이던 것을 다시 찍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카산드라 스튜디오도’ 이름값이 굉장히 많이 올랐지만, 예준과 함께한다면 세간의 관심이 몇 배는 더 뜨거울 테니까. 그럴 만도 했다.

***

예준은 연락받은 다음 날 오전 카산드라의 사무실을 찾았다.

“요즘 바쁘신 것 같아서 늦으실 줄 알았는데, 빨리 오셨네요.”

“네. 이런 기회가 항상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리고 예술을 널리 알리는 데에 광고가 좋은 기능을 한다는 걸 겪어보기도 했구요.”

광고가 예준으로서 좋은 매체이기는 했다.

이름도 알리고, 작품도 알리기에는 광고만 한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예준은 그림을 300억에도 팔아본 화가였다.

돈으로만 치자면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수익이 클 것이었다.

“광고 수익을 많이 챙기게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화가님 그림을 팔아서 버는 게 더 수익이 좋지 않나요? 저희야 물론 화가님과 함께하는 게 좋지만, 좀 궁금해서요.”

예준은 그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죠. 일단 오직 돈을 벌 생각으로만 작품을 만들면 오히려 원하는 만큼 비싸지지는 않을 거예요. 예술은 장사가 아니니까요. 좋은 작품은 진정성을 담아야 그려지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학교를 지어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당장은 제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미디어 아트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이쪽 일로도 수입이 안 나는 건 아니니 차근차근 하려구요.”

“그림을 팔아서 얻게 되는 인지도는 별 의미 없다는 건가요?”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한데, 그림으로 얻을 수 있는 호의는 절대적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이 지금은 제 그림을 좋아해줄지 몰라도…… 앞으로는 다를 수도 있죠. 계속 다른 그림을 그리는 한 달라지는 시선들이 생겨날 거예요.”

전생의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의 평가 변화를 경험했다.

그들은 가끔 호평하다가도, 성에 안 차는 그림을 그려오는 순간 헐뜯기를 즐겼다.

모두 내 눈에 비치는 것들을 그린 그림인데도 말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터였다.

예술가에겐 개인적인 영감이 가장 중요했다.

해야만 해서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어서 해낸 것이 결과가 좋았다.

그리고 지금 예준은 여전히 영상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어떤 기획들이 있는지 볼까요?”

예준이 화제를 돌렸다.

카산드라는 인쇄해둔 제안서들을 예준에게 하나씩 건넸다.

“별 볼 일 없는 제안서들은 제가 미리 걸렀어요. 그래도 분야별로는 하나씩 남더군요. 자동차, 아파트, 노트북, 에어컨, 식기세척기, 가구 등등. 이 중에서라면 윤 화가님이 뭘 고르시든 전적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예준은 꼼꼼히 제안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화가의 사실적인 묘사력을 내세운 UHD텔레비전, 패션 유행은 미술 사조를 따른다고 선전하는 의류 브랜드, <시간을 거스르는 자>의 화제성을 염두에 둔 시계 광고 등 대부분이 예준을 의식하고 기획된 것들이었다.

예준은 그중 하나의 광고를 골라잡았다.

“음…… 그건?”

“다른 광고들도 매력적이지만, 전 이게 끌리네요. 제 작품뿐만 아니라 ‘카산드라 스튜디오’의 영상 작품들까지 오목조목 분석해서 셋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을 찾아내고 있어요. 이런 게 바로 진정성 아니겠어요?”

예준이 지목한 것은 모스크바CMC라는 기업이었다.

러시아 최대 석유화학 회사로, 환경 오염 문제에 대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는 친환경 기업이었다.

“명품 브랜드들처럼 귀족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자금력만으로는 비견할 기업이 흔치 않죠. 게다가 큰 규모의 청정에너지 분야에 투자하고 있기도 하구요. 석유 회사이기는 하지만 환경문제에 책임감도 가지고 있더군요. 미래 먹거리인 ‘그린수소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업의 이미지에 따라 광고 제작사의 이미지도 달라지기 때문에 웬만하면 고급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의 광고를 맡는 게 좋았다.

굉장히 시장 가치가 높은 기업이기도 하고, 더욱이 친환경 기업이라는 점은 카산드라의 개인적인 선호에도 잘 들어맞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도 진정성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번 광고를 통해 러시아에서는 유명해질지 몰라도, 우선 노라 교수님과의 접점은 크게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단점이 있는데 괜찮겠어요? 다른 기업들 중엔 미국 기업도 많아요.”

접하기야 하겠지만 미국 거리에서 종일 재생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훨씬 덜할 것이었다.

“괜찮아요. 별로 노라 스미스 씨에게 크게 매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러시아에도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죠. 그리고 잘만 만들면 결국 누구든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혹시 모르죠. 이번 광고로 오히려 먼저 연락해 오실지도요.”

물론 예준의 말대로 먼저 연락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예술가의 눈> 기획보다 더 크게 성공시켜야 할 텐데. 카산드라는 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에 압도되었다.

“결정하신 것 같으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실 팀원들도 ‘모스크바CMC’를 원할 거예요. 제안들 중 가장 자본금이 큰 회사거든요. 바로 계약 진행해볼까요?”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산드라는 제안서에 적혀 있는 담당자 번호로 전화했다.

-네. 모스크바CMC 마케팅 총 책임자 에바 채플린입니다.

전화를 받은 여성은 자신이 마케팅 총 책임자라고 했다.

침착하고 낮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카산드라 스튜디오’ 총괄 미술감독 카산드라입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기획서를 보고 연락드렸는데,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네! 당연하죠.

에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보내주신 기획서 재미있더군요. 추진하기 전에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싶은데, 일정 잡을 수 있을까요?”

카산드라는 에바와 계약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협의를 마쳤다.

가장 큰 기업이었으면서도 연락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에바는 감격에 찬 말투로 그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굉장히 기뻐하는군요.”

“세계적인 스튜디오의 광고를 받게 됐으니 기쁘겠죠.”

예준의 치사에 카산드라는 즐겁게 웃었다.

“그런데, 이름을 알리는 건 둘째 치고, 윤 화가님의 예술적인 능력을 보여주려면 그 부분을 살리는 방식으로 기획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케니’ 의 카메라 광고는 예준의 사진 예술에 도움을 줬다고 했다.

<예술가의 눈> 전시 기획은 예준의 영상 예술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모스크바CMC는 예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까 돈을 벌기 위해 그리는 작품은 오히려 비싸지지 않는다고 했죠?”

“네.”

“하지만 사업은 언제나 불확실하죠. 그럼에도 확실한 건 제가 이번 모스크바CMC 광고에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성공할 거라는 점이에요. 그리고 ‘Une pierre deux coups(일석이조)’가 될 수도 있어요.”

예술 분야의 기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CMC처럼 큰 회사와의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예준에게 큰 이익을 안겨다 줄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주 큰 이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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