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감각의 부활을 위하여 (2)
메건은 정년 후 계획으로 미술품 복원 관련 대학에 교수로 갈 계획이었다고 했다.
일섭처럼 후학 양성에 꿈이 있었으니 예술학교 건설에도 필요한 자문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근무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 섭외는 성공한 것이었다.
메건이 수락한 즉시 현재에게 메건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현재는 더욱 열정적이어졌다.
열정만으로는 환생관을 하루 만에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바로 다음 날 현재에게 전화를 받았을 땐 굉장히 심각한 목소리였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다시 감각건축 사무소를 찾았을 때 현재는 내가 그려준 예술종합학교 건물 배치도와 환생관 도면을 번갈아 검토하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불러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현재는 미국의 유명한 건축사인 ‘스털링 건축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번 예술종합학교 프로젝트의 소식을 접한 그들은 혹시 협력할 수는 없을지 의견을 물어왔다고 했다.
“일단 답변을 미뤄뒀습니다. 저 혼자 하는 프로젝트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건 고객님 의사니까요.”
“의뢰비는 얼마나 받겠다던가요?”
현재는 굉장히 고심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쪽에서는 업계대로만 받아도 좋답니다. 아니면 그냥 자문 형식으로 참여만 해도 좋다고 하고요. 아마 한국과 중국에는 지사가 없어서 진출 전 입지 다지기로 활용할 생각 같은데…… 저희로서는 나쁠 것 없죠. 윈윈입니다.”
당신들의 프로젝트가 흥미로우니 자신도 껴달라는 것이었다.
“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털링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들이 참여한다면 예술종합학교는 더욱 훌륭해질 겁니다. 건축 경험 면에서 저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기업이라 건축 노하우도 무궁무진할 거구요. 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들 도움 없이 직접 진행하고 싶습니다.”
예술종합학교를 감각건축에서만 진행한다면 현재의 커리어는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었다.
스털링의 도움을 받으면 그 명성이 깎여나갈 게 뻔했다.
그래서 그들을 거절한 뒤 욕심을 부려보고 싶을 터였다.
“소장님에게 예술학교 건축을 맡긴 건 소장님의 건축 철학이 저와 잘 맞아서였어요. 스털링이 어떤 기업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스털링이 제게 제안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그분들과 함께했을지는 대화를 나눠본 뒤에야 결정할 일이었겠죠.”
거대 건축사무소라고 무조건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작에 연락해서 건축을 맡겼겠지.
의뢰비가 얼마나 비싸든 지불할 능력을 될 터였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 소장님의 협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이 기회에 소장님이 그들의 노하우 중 뭐든 흡수하신다면 제게도 좋은 일일 것 같거든요. 앞으로 계속 건축을 맡기게 될 테니까요.”
착한 건축은 세계적으로 여럿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한국과 중국에 입지를 쌓고 싶을 것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분석이었다.
굳이 예술학교 건축 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건 감각건축을 좋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알겠습니다. 연락해보죠.”
“네. 지금 바로 해보세요.”
설득이 된 모양이었다.
현재는 휴대폰을 들고 잠시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곤 얼마 뒤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이 일 참여에 진심이었나 봅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스털링 본사 대표이사가 직접 오겠답니다. 내일 오전 중엔 뵐 수 있겠다더군요.”
***
밤늦게 현재의 전화를 받은 샐리는 바로 출국을 준비했다.
비즈니스용 전용기를 준비시킨 뒤 운행신고를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의 허가를 받았다.
시간 맞춰 바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을 땐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어디로 오라고 했더라……’
샐리는 비행기에서 내린 후 현재가 보내준 주소를 확인했다.
서울이 아닌 서울 변두리였다.
예술종합학교 프로젝트가 얼마나 진행 중인지 모르는 샐리였다.
‘건축이 예정된 곳인가?’
공항에서 그곳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아무래도 학교가 들어설 공간이니 서울 시내에 자리 잡기는 어려웠겠지.
‘어쩌면 큰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며칠 전 샐리는 CEO 제임스 스털링을 포함한 스털링의 최고 결정권자들을 모아놓고 착한 건축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었다.
한국에서의 착한 건축 이력이 스털링에게 얼마나 이로운지를 중심으로 말이다.
윤예준과 진현재 입장에서는 투자금 유치를 고려하고 있는 사안이 아니기에 대대적으로 잘 알려진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오히려 샬롯이 그 일을 어쩌다 알게 됐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을 자세히 발표할 수도 없었고, 대부분 샐리의 사변적인 자기주장으로 가득 채운 회의가 되었다.
어차피 샐리가 하는 말이라면 이사들로서 뭘 반대하고 어쩔 도리는 없었을 터였다.
제임스 스털링의 경우 윤예준이라는 화가의 유명세를 높게 평가했다.
‘때로는 권위 있는 남의 안목을 빌려 생각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샐리를 지지하는 제임스의 한 마디였다.
윤예준이 선택한 일이니 시간을 투자해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부지는 지도로 미리 봐두었다.
굉장히 최근 것으로 보이는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일대의 모든 건물들이 공사 중이었다.
‘아직은 철거 정도만 진행한 모양이네.’
샐리는 기사에게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차에서 내렸다.
약속 시간이었던 오전 9시가 한참 안 된 상태였다.
‘시간이 될 때까지 이 일대나 먼저 살펴볼까.’
샐리는 예의 그 신축 건물을 향해 걸었다.
그 건물도 건축 예정지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뭐. 미리 지어졌을 수도 있지. 철거 예정인 곳 같지는 않고……’
어떻게 된 일이든 샐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철거까지 그녀의 역할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신 그 근처에 이미 잘 다져진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간이 사무실로 보이는 컨테이너박스가 하나 있었다.
‘음……? 저 사람들은 뭐지?’
훤한 인상의 한 남성과 어린아이가 벌판만 남은 그 일대를 가리키며 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철거업체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려는데 그 남성이 샐리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굉장히 이른 시간인데, 빨리 오셨군요. 스털링 홈페이지에서 사진 봤습니다. 샐리 스털링 씨 맞으시죠?”
“네?”
샐리는 당황했다.
‘벌써 나와서 업무를 보고 있었던 건가?’
멀리서 어린아이가 다가왔다.
윤예준이라는 화가가 굉장히 어리다고 들었는데, 동양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혹시나 했던 마음은 그 아이가 말을 꺼낸 뒤 확신으로 변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의뢰인인 윤예준이라고 합니다. 우선 자리를 옮길까요?”
예준은 근처의 신축 건물을 가리켰다.
멍청히 서 있을 겨를도 없이 샐리는 한자 현판이 달려 있는 그 멋스러운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자리를 옮기는 동안 예준은 그 신축 건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현판의 글자는 한국어로 ‘도약’이라는 뜻이었다.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아직 자재 냄새가 남아 있었고 사용 흔적도 없었다.
이번에 완전히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심혈을 기울여 리모델링한 건물이라고 했다.
물론, 담당 건축사는 감각건축이었다.
“동양화 학교로 쓰일 예정인 건물이에요. 아직 아무도 없으니 조용히 대화할 수 있을 거예요.”
예준이 말했다.
동양화 학교라…… 그림을 가르칠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스타일이 낯설고 독창적이네.’
우선 한옥풍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었다.
건물 외부 디자인도 아름다웠지만, 외양만 제대로 꾸밀 줄 아는 삼류 건축가는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 건 내실이었다.
하지만 실내 디자인까지 완벽했다.
‘짜맞춤 기법을 그대로 적용했군.’
짜맞춤 기법이란 나사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자재끼리 홈을 끼워 맞춰 건물을 지어 올리는 기법을 의미했다.
한옥은 서양 건물처럼 내벽과 외벽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내에서도 짜맞춤 미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이 건물은 가짜가 아니야.’
역시 감각건축이었다.
‘도약관’은 샐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멋과 화려함에만 치중하지 않고 이곳을 사용할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성에 큰 힘을 쏟은 것 같군요. 그러면서도 전통과 현대의 조합은 놓치지 않고 있어요.”
샐리가 평하자 그들은 고맙다는 듯 싱긋 웃을 뿐이었다.
도약관 내부에 마련된 휴게 공간에 모여 앉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예준은 건축을 진행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많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이 건축을 원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학교는 법인도, 건물도 별로 돈이 되지는 않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샐리 님은 왜 동참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예준이 웃으며 반문했다.
샐리야 착한 건축에 대한 꿈 때문에 이 일을 마음먹은 것이지만 지금 샐리는 회사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차라리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러자 예준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저 같은 경우엔…… 전에 프랑스의 바티뇰 거리를 방문해본 적이 있어요. 그곳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수많은 대화를 나누는 곳이었죠. 한국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동양화와 서양화, 현대 실용미술까지.
옛 그림에 대한 진정한 감상만이 새로운 예술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예준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종합예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조성하는 게 그의 꿈이었다.
‘도약관’이라는 이 건물에서는 동양화를, 그리고 바로 다음 건축 예정인 ‘환생관’에서는 미술품 복원과 감정을, 그 이후 건물들에서는 서양화와 조각, 영상까지.
나아가 먼 미래엔 미술뿐 아니라 음악부터 문학까지 두루 가르치는 거대한 종합학교가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그의 계획은 ‘환생관’을 지어 올리려는 이유로 대표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미적 감각의 예술적 부활을 위한 일인 것이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포부와 말재주에 휴게 공간에 모인 모두가 예준의 말에 매료되었다.
예준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설계도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쭉 늘어놓았다.
‘환생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현재 소장님이 설계하신 건가요?”
샐리가 물었다.
하지만 현재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예준을 보았다.
“제가 우선적으로 설계해둔 것들이에요. 물론 진현재 소장님 옆에서 많이 배우긴 했죠.”
예준의 말에 제임스와 샐리는 크게 놀랐다.
예준이 보여준 설계도면은 전문 건축가가 한 것만큼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정말인가? 기껏해야 열 살이나 먹었을 것 같은 아이가…… 그 유명한 게리 윈스턴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도 모자라 그림을 위한 공간 구성까지 완벽하게 한다고?’
예준의 설계도면은 그대로 공사를 진행해도 될 정도로 구체적이고 엄밀했다.
형식은 스털링 부녀의 방식과 달랐지만, 그야 건축사무소마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법.
“......유명 화가라고 듣고 왔습니다. 그림이야 당연히 잘 그리실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건축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알고 계실지는 몰랐군요.”
전문가가 아닌 의뢰인들은 건축에 이상적인 요구들을 많이 늘어놓는 편이었는데, 예준은 그렇지도 않았다.
“너무 까다롭나요? 그래도 제가 아는 세계 최고의 건축사 스털링이라면 손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종합예술학교가 빨리 완성됐으면 좋겠군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모든 건물이 이 ‘도약관’처럼 세워지는 건가요?”
예준은 그렇다며, 옆에 있는 ‘진현재’가 도맡아서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예준의 이 구체적이고도 전문적인 요구사항들을 모두 지켜가며 일하는 건축가야. 이전 건물을 지을 때도 이 정도의 실력과 꼼꼼함을 겸비하고 임했겠지.’
실력이 뛰어난 건축가에겐 두 개의 길이 주어졌다.
사업가의 길과 예술가의 길.
스털링은 사업가의 길을 걸어왔지만, 진현재라는 이는 예준과 함께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사실 이 건물만 해도 굉장히 인상 깊습니다. 저 또한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옥에 대해 잘 아는 편인데, 그것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녹여내는지는 자세히 고민해본 적이 없거든요. 감각 건축과의 협업이 굉장히 기대됩니다.”
그렇게 샐리와 현재, 예준은 예술학교에 관한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장 시작할 건축 건은 ‘환생관’과 예술고등학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