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72화 (72/241)

72화. 위기의 반대말은 (3)

“여기 피켓에 쓰여 있는 거 보니까 건물 용도의 40%를 이동 약자들을 위해 쓰기로 약속했다는데, 지금 안 그러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남자는 당황하는 한편으로 즉답했다.

“건물 용도의 40%를 어떻게 계산하는지부터가 애매하잖아요. 애초에 엄밀한 기준도 없는 사안을 어떻게 칼같이 지켜요? 도의적인 책임 정도는 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건물주가 사기를 쳤다는 식의 비난은 좀 심하죠.”

남자는 완강했다.

간편한 복장으로 미루어보아 이 근처에 사는 수혜자인지도 몰랐다.

“자네 말 한번 잘했군. 우리가 법관이 아닌 이상 불법 합법 따지기 전에 도의적인 책임 먼저 묻는 게 먼저겠지.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건……”

“이분들이 조금 과격한 어휘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건물주를 감옥 보내야 한다는 얘기는 안 하고 계세요. 이 건물에 투자한 인권활동가로서 저 정도 행동은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저것도 불법인가요?”

일섭이 가세했다.

놓치지 않고 함께 몰아치자 사람들은 조용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남자가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뭐, 그럼 건물주가 정말 도의적인 사기라도 쳤다 이거예요?”

“건물 세워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모양이면 사기라고 봐도 무방하죠.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건데, 참……”

내가 말하자 박수 소리가 더 커지며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솔직히 단체 기부금 없었으면 못 지었을 건물인데.”

“맞아, 맞아.”

남은 건 이 일이 소문나는 것뿐이었다.

나 혼자도 아니고 일섭까지 있으니 소문만 난다면 효과는 확실할 것이었다.

하지만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는 무례를 감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번쩍, 하고 건물 전면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기자입니다. 모자이크는 확실하게 할 테니 너무 동요하지들 마세요.”

빛이 난 방향을 돌아보니 한 남성이 카메라를 든 채로 웃고 있었다.

일전에 이일섭-이수경 동일인물설 기사를 냈던 F.C코리아 기자였다.

“어? 저 사람은……”

“아까 제가 미리 불러놨어요. 저분 기사 잘 쓰시잖아요.”

내가 말하자 일섭이 당당한 표정으로 웃었다.

***

개인 SNS를 통해 소식이 퍼지는 것도 좋겠지만 단기적인 효과로는 인터넷 일간지가 최고였다.

미우나 고우나 이일섭-이수경 동일인물설이 정확했던 덕에 해당 기자는 나름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했다.

나와 일섭이 일선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도 오랜만이거니와 소소한 이슈였던 착한 건축 건이 다시 대두되면서 큰 여론몰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논란의 착한 건축. 장애인협회와 연예인 강모씨 중 최후 승자는?]

[케니의 윤예준, 연예인 강씨에게 ‘약속을 했으면 지켜라’ 일침.]

단 하루 만에 크게 곤란해진 연예인은 조악한 해명글을 게시하기도 했지만, 이미 마이크를 얻어버린 인권단체에서는 그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감각건축사무소로 공격성을 표출하던 팬덤은 이제 인터넷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데에 전념했다.

덕분에 본격적으로 예술종합학교 건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날 우리는 일섭의 집에 모여 의견을 나눴다.

“그러고 보니 부지 위치는 어떻게 하기로 했냐?”

“아. 아직 후보 정도만 정해뒀어요. 일이 마무리됐으니 소장님이랑 같이 돌아보러 가야겠죠.”

나는 아버지에게 공유받은 후보 부지들을 일섭에게 보여주었다.

꽤 여러 군데였지만 일섭은 면밀히 살폈다.

“음……? 여긴 우리 집 근처인데.”

“그런가요?”

조금 고민해보던 일섭은 아예 자신의 집을 예술종합학교의 일부로 활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에겐 어차피 별채도 있기 때문에 혼자 살기에는 공간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했다.

어차피 현재는 아직 대외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종합적인 건축 계획부터 시간을 쏟고 있었다.

부지와 비용이 확정되면 바로 착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매력적인 이야기였지만 매물로 올라오지 않은 땅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려면 이 근처 땅도 다 확보가 되어야 하는데 소유자가 있지 않을까요?

“한적한 게 좋아서 일부러 이쪽으로 집을 지은 거야. 이 근처엔 방치된 땅들이 대부분이니 조금만 값을 쳐주면 팔아주지 않겠냐?”

서울 근처라는 점은 매력적이었지만 당장의 전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일섭의 집만 리모델링하면 건축비용 하나쯤은 절감할 수 있었고, 이쪽으로 부지를 확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소장님한테 전화를 해봐야겠네요.”

나는 휴대폰을 들어 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응?”

“왜? 안 받냐?”

“그러게요. 아직도 전화 문자 테러를 받고 계신가?”

직접 찾아가야 하나 싶어 준비를 하려던 차에 현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네.’

전화를 받자 현재는 법석을 떨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기사 봤어요! 위험하다니까 기어코 거길 찾아가신 겁니까?

“네. 봤는데 굉장히 멋진 건물이더라구요. 곧 용도도 원래 의도대로 돌아오겠죠?”

-아……

현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감사하다고 하면 앞으로도 위험을 무릅쓰실까 봐 뭐라 말씀드리기가 망설여지네요. 그래도 제가 고객님께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천만에요.”

-......인터뷰 요청이 굉장히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권단체와 연예인 간 인테리어 복구가 중재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답니다. 연예인은 건물에 들어선 업체들과의 계약이 끝난 뒤까지만 공사를 미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현재는 차분한 말투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전했다.

말투는 그랬어도 굉장히 홀가분해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현재의 감각건축은 이번 사건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준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위기 상태였지만 금방 뒤집어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의 성공적인 예시가 되었구나……’

그런 면에서 위기의 반대말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물론 앞으로는 예술종합학교에 쏟아붓느라 다른 의뢰를 받을 틈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럼 또 당장은 바빠지시겠네요?”

-아, 아닙니다! 문자테러 때까지만 해도 시공사 컨택이 어려웠죠. 직접 방문해도 거절당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전에 괜찮다고 말씀드렸을 땐 조금 무리를 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로 아니에요. 중재까지 한참 남았고, 만약 인권단체에서 양보하지 않아 당장 실행한다고 해도 저는 자문만 해주면 됩니다. 이미 이전 인테리어 자료는 완전히 남아 있어서요.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현재에게 일섭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뒤 일섭의 근처 부지를 매입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가지고 계신 부지에 더해서 추가로 매입하는 거라면 비용도 절약되고 너무 좋겠죠. 이일섭 화백님의 집을 리모델링한 교육관이라면 그 의미도 크고요. 그 근처 땅은 그리 비싼 편은 아닐 테니 문제될 건 당장 없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부지 매입 비용인데, 여전히 500억이 맞습니까?

“네.”

-그럼 간만에 운신의 자유를 얻었으니 활동 시작해보겠습니다. 그 일대 부동산중개인부터 만나야겠군요.

그동안은 조금 피곤해 보였는데, 이번 일을 통해 다시 열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내가 추진하는 일이니 나도 뒤져선 안 될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일섭에게 물었다.

“이 집에 그동안 정도 많이 드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정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에게 드는 거야. 혼자 살았던 집에 무슨 정이 남아 있겠냐?”

일섭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작업실 쪽을 올려다보았다.

우선 이 집을 학교 건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할 것이었다.

그럼 예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일섭은 오히려 이 건물이 붐비게 되는 걸 바라는 모양이었다.

“저는 좀 정이 들었는데. 그럼 저 혼자 작별 인사를 하고 있을 테니 잠시 자리 좀 내주시겠어요?”

“뭐? 외국 다녀오더니 어른 놀리는 데에 완전히 도가 텄구나.”

일섭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섭섭한 마음을 해소하는 데에는 함박웃음이 제격이었다.

***

“오…… 굉장히 잘 지어진 집이네요. 아직 외관밖엔 보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탁월합니다.”

바로 다음 날 현재와 함께 일섭의 집을 방문했다.

마당에서부터 집 내부까지 구석구석 살피던 현재가 감탄했다.

“내가 지은 집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칭찬으로 들리는군.”

정원 한쪽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던 일섭이 말했다.

현재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감각건축소장 진현재입니다.”

둘은 초면이었다.

현재가 인사하자 일섭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해주었다.

착한건축에 대한 일로 일섭은 현재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별채가 따로 있기는 하셔도 공사하는 동안에는 조금 시끄러우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방음이 좋은 건물들이거든. 평생 살 집으로 생각하고 디자인한 건물이라 사소한 데서부터 신경을 많이 썼지.”

겉만 봐도 파악할 수 있는지, 현재는 별채와 본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내부로 들어온 현재가 나와 일섭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개조해드릴까요?”

프로 건축가의 시각으로 머릿속에 일섭의 집 도면을 그려 넣은 현재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일대를 예술종합학교로 바꿀 거예요. 그리고 이 건물 리모델링은…… 우선 1층에 부엌이 있죠? 거기 배수관을 조금 넓혀서 개수대처럼 이용할 수는 없을지,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그림이 많이 그려질 예정이기 때문에 보관 장소가 더 넓어야 하는데, 혹시 따로 창고를 낼 수는 있을지. 아이디어는 많아요.”

나는 현재의 도면을 함께 들여다보며 설명했다.

일섭이 거들었다.

“음…… 일단 개수대 문제는 크게 무리 없을 거야. 이 건물은 용도가 법적으로 가정집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바꾸면 물을 더 끌어올 수 있겠지. 무거운 물건들과 많은 사람들의 하중을 견딜 수 있을지 내구성 검토도 필요할 거고. 아마 무리는 없겠지만…… 그 외 이 집이 가지고 있는 기타 가능성들에 대해서는 전문가께서 좀 더 면밀히 조사해줘야겠어.”

일섭이 말하는 동안 현재는 종이를 꺼내 집 구조를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소에서만 사용할 법한 기호들이 도면에 복잡하게 그려졌다.

“예술종합학교 중에서도 용도가 어떻게 됩니까? 이일섭 화백님 집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동양화 건물이겠죠?”

“네, 맞아요.”

“그나저나 종합예술학교라…… 동양화 건물부터 서양화, 영상, 조각, 현대미술까지……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도 크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합예술학교는 성장하는 족족 규모를 키워나갈 것이었다.

“제 커리어 중 가장 큰 규모의 건축이 되겠군요.”

“당장의 재정적 조건과 전망상으로는 충분해요.”

나는 이곳이 한국 미술계의 주축이 된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과거 프랑스의 폐쇄적인 화단과는 다를 것이었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아카데미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의 미술사도 이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겠지.

그 사조 변화를 기록할 수 있는 전용 갤러리도 필요할 것이었다.

“말씀하시는 모든 게 제겐 아이디어가 됩니다.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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