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70화 (70/241)

71화. 위기의 반대말은 (2)

다음 날 즉시 ‘화담 갤러리’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예술종합학교와 관련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굉장히 오랜만이구나.’

화담으로 가는 동안에는 마치 옛날 집을 방문하는 기분이 들었다.

거의 1년 만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해왔던 일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온 것만 같았다.

‘오. 특별 전시관을 새로 짓는다고 했는데. 벌써 끝났네.’

특별 전시관이 지어지면 그곳에서 이일섭 특별전을 진행한다고 했다.

이일섭 특별전이 시작된 지 지금 벌써 두 달 차였으니 지어진 지는 꽤 됐을 것이었다.

내 개인전 당시 수익이 컸기 때문인지 제법 크게 지어져 있었다.

건물 외관은 본관과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 튀는 디자인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벽면에 유리가 더 많았고 층마다 구조가 달라 마치 장난감 큐브 같은 느낌이었다.

일섭은 특별전시관이 아닌 본관에 있었다.

“오. 예준이구나.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던데. 여기까지 와줬구나.”

“네, 할아버지. 귀국하자마자 갑작스러운 사건을 겪어버려서 바로 연락을 못 드렸어요.”

일섭은 매우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진행하고 있던 일들은 대충 마무리가 되는 것 같던데. 앞으론 뭘 할 생각이냐?”

광고처럼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일들은 대부분 시도할 생각이었다.

계속 그림만 그리더라도 다른 활동도 병행하는 게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없다면 작업실에서 그림을 충분히 그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가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 추진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종합학교를 만들 생각이에요.”

“예술종합학교?”

내가 구상한 예술종합학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바티뇰과 영화 예술가 등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교류의 장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동양화와 현대미술의 절충을 시도한 일섭으로서도 그 구상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거 정말 훌륭한 일이구나!”

일섭은 굉장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예술종합학교에서는 동양화도 가르치게 될 것이었다.

이일섭은 이수경으로서 전통 한국화의 최대 권위자에 올라본 사람이었다.

일섭으로서의 커리어만 보더라도 동양화 교육관을 담당하기에 그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겠니? 후세 양성에 아예 뜻이 없었던 건 아니라서, 그냥 한 번 부러워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로 보이는구나.”

“저야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너무 큰 힘이 되죠.”

일섭이 굉장히 기뻐했다.

“그럼 이번에도 너한테 잘 보여야겠구나. 화가에게는 작품만큼 직접적인 이력서도 없지. 자, 따라와라.”

동양화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걱정할 일이 없게 되었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일섭만 한 조력자를 구하는 게 가능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일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특별 전시관을 가리켰다.

[모던 그라데이션]

일섭의 작품은 특별전시관 1관에 있었다.

입구에선 ‘모던 그라데이션’이라고 적힌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시관 외부 현수막에서도 보았던 사진이었다.

한복을 입은 여성 그림의 한쪽 어깨가 블러 처리된 상태였다.

내부는 좁았던 본관보다 구조가 좀 더 틔어 있었다.

더 많은 관람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공간이 크니 조명도 더 밝게 느껴졌다.

“현대 동양화에서 가장 활용성이 높은 기법은 공필화다. 누가 그렇게 정해둔 건 아니지만 내 경험으로 알게 되었지. 물론 정답은 아니다.”

일섭은 전시관을 거닐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새로운 작품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도약>과는 다른 느낌의 동양화들이었다.

‘일섭의 작품이 익숙한 나로서는 오히려 새롭지만…… 좀 더 현대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어.’

‘공필화’가 무엇인지 일섭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알 법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특별전시에 공개된 작품들은 일반적인 서양화처럼 선을 먼저 딴 뒤 채색해둔 것들이었다.

붓질에서 느껴지는 멋은 조금 적었지만, 동양화로서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되어 있는 형태였다.

“와. 다들 너무 섬세한데요? 쓰시던 채색필붓을 더 세필로 바꾸셨나 봐요. 색채묘사가 영상처럼 보여 훨씬 더 대중적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역시.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다더니 안목이 전보다 훨씬 넓어졌구나.”

현대 대중문화에 대한 감각은 분명히 트인 것 같았다.

작품들은 한복을 입은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거대한 두꺼비가 빌딩을 끌어안고 있는 등의 그림들이었다.

“동양화는 역사가 굉장히 깊지만, 현대와의 단절도 그만큼 큰 분야야. 그래서 연구가 가장 많이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지. 이번엔 공필화를 통해 현대와의 타협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타협’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을 거다. ‘타협’보다는 현대적 ‘발전’이 더 유의미한 일이니까 말이다.”

일섭이 자신의 화가적 고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고민을 내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예술종합학교는 그 고민도 이어나가기에 적절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일섭 나름대로 어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민을 다른 동양화가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이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동양화의 발전은 지금보다 훨씬 빨라지겠지.”

예술적 교류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는 기존의 것에 대해 계속 반문하는 태도였다.

대가의 지위에 오른 이들에게는 잘 발견하기 어려운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섭은 이수경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까지 해본 이였으니, 예술종합학교를 이끌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그 예술종합학교 건설은 진행 중에 있는 거냐?”

“네. 일단은 잘 아는 건축가에게 부지 계획을 맡겨둔 상태예요. 일이 조금 더디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요.”

“왜?”

현재는 아직도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전보다는 나아진 편이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려면 차라리 직접 사무소를 방문하는 게 나았다.

착한 건축에 기부한 인권단체의 지속적인 항의로 연예인과의 다툼이 장기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서도 그 갈등을 내버려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촛불과 같지. 불을 꺼트리지 않는 한 결국 그 신념에 의해 몸이 고갈되어버리니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굉장히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구나.”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일섭이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초는 불붙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람 앞의 촛불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좀 도와주려구요.”

“어떻게?”

“전시회와 광고로 저도 꽤 많은 인기를 얻게 됐어요. 이 정도면 그 연예인처럼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

“이 위치에 이 정도 크기의 주차장이라니.”

일섭이 반대편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제때 반응하지 않아 궁금했는지 일섭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응? 뭐 하고 있느냐?”

나는 휴대폰으로 하던 일을 빠르게 마치고 주머니에 넣었다.

“아. 잠시 연락할 곳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주차장이 크기는 하네요.”

현재가 지은 건물이 바로 그 건물이었다.

1층에는 말로만 듣던 ‘알렉스 커피’가 성황리에 장사 중이었다.

건물 입구엔 인권단체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저 사람들인가 봐요. 연예인에게 기부했다는 단체요.”

“흐음……”

우리는 차를 세운 뒤 일단 그들을 지나쳐 알렉스 커피로 들어갔다.

아르바이트 점원만 열 명은 넘는 것 같았다.

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은 휠체어가 오를 수 있도록 굉장히 완만한 오르막이 길게 설계돼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조성된 층계참엔 찻잔이나 텀블러 같은 굿즈 진열대가 틈틈이 세워져 있었다.

‘듣던 대로군.’

보고 있으면 조금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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