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69화 (69/241)

70화. 위기의 반대말은

다음 일정이 생기기 전에 예술종합학교 건축 작업을 슬슬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일단 부지부터 확보를 해 놔야겠지.’

그렇다고 땅만 아무렇게나 사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예준 예술종합학교를 우선 계획해둔 뒤에야 어느 부지를 얼마나 사둘지 돈을 확실히 분배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아버지와 함께 작업실에 앉아 매입할 수 있는 땅을 먼저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처음 나의 작업실을 알아봐 주었을 때처럼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이곳저곳 전화를 돌렸다.

“웬만한 크기 정도 되려면 파주나 의왕 정도 있는데…… 예준이 보기에는 어때?”

한국에 얼마간 살면서 지도는 이제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한두 군데 돌아다녀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도만 보고 중요한 부지를 덜컥 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이 일을 맡아줄 적임자도 분명하겠다…. 바로 추진해야지.’

나는 예술종합학교 건설을 생각했을 때 즉시 현재를 떠올렸다.

그라면 내 뜻에 알맞은 건축을 진행해줄 터였다.

그럼 그와 함께 후보지를 돌아보며 적당한 곳을 찾는 게 나았다.

감각건축사무소로 향하는 동시에 휴대폰에 저장된 현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지? 무슨 일 있나?’

지금은 한참 바쁘게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다니.

큰일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일을 겪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감각건축으로 가는 발길을 멈추지 않고 문자메시지 한 통을 남겼다.

도착할 때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던 현재는 사무소 문을 두드렸을 때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피곤한 안색이었다.

“아, 오셨군요. 혹시 연락하셨습니까?”

“네. 안 받으시기에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죄송합니다. 지금 휴대폰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일단 들어오시죠.”

그의 안내를 받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피곤한 안색이기에 바쁜 와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원들은 별일 없는 듯 일반적인 서류 검토만 하고 있었다.

“응?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한가한 거 같은데요?”

“사정이 있어서 일을 못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 명함을 통해서 전화 의뢰가 들어오는데, 지금 상황이 굉장히 곤란하게 되어버려서요.”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어쩌면 나의 의뢰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능한 건축가들이야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몰랐다.

현재만큼 나의 의도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몇 번 캐묻자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고객님 댁 공사를 마친 직후 한 친장애인 시설 건축 작업에 바로 착수했습니다. 제 오랜 꿈이었으니까요.”

어머니와 함께하게 된 작업이라고 했다.

보통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용을 고려한 건축은 공공기관에서 추진하는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설계하곤 했다.

하지만 현재의 경우 ‘착한건축’이라는 프로젝트를 내세워 민간 건축에도 친장애인 설계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건축의 경우 평소 장애인 인권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던 한 연예인이 제안한 일이었다.

공사 도중 건설사 부도로 인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건물 뼈대를 보충한 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여러 장애인 협회와 인권단체의 기부로 인해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재와 어머니는 그곳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공사가 완료되었을 땐 협회로부터 무수한 감사 인사를 받고 뿌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건축이 가능한 건 제가 알기로 소장님밖에 없어요. 정말 좋은 일을 하셨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하네요. 솔직히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자부심도 굉장히 큽니다. 보람만 있었다면 당연히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겠죠.”

해당 연예인은 건물 공사가 끝나자마자 건물 내 대부분의 공간에 유명 상업 시설들만 줄줄이 들여왔다.

기부자들은 항의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현재도 나서서 해당 의뢰인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미 그 건물은 연예인 소유의 상업 건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미 벌어진 일, 건물 용도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는 판국이었다.

“방송에 나와서 눈물로 호소하더군요. 건물 4층에 장애인복지센터를 내어줬으니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도대체 더 무엇을 원하시느냐고. 1층만 해도 연일 사람들로 붐벼서 정작 장애인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다 이미지 메이킹이었던 거였죠.”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욕심이 많다며 장애인협회를 비난했고, 연예인을 두둔했다.

최초 설계만 착한 건축 디자인일 뿐 그 쓰임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남의 선의와 간절함을 이용하려는 이들을 보면 치가 떨립니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동네에 유명 프렌차이즈 ‘알렉스 커피(Alex coffee)’가 들어왔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코너 하나만 돌면 카페만 서너 군데가 나오는데도요. 어쩌면 커피에 마약 같은 걸 섞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현재는 조금씩 울상이 되었다.

알렉스 커피.

프랑스에서도 한두 번 본 적 있는 카페였다.

그 체인점은 아마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들어올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설마하니 마약을 타고 있을 리는 없었고,

비싼 브랜드를 입점시키면 집값도 오를 테니 주민들과 손발이 척척 맞았을 것이었다.

“제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위로도 쉽게 드리지 못하겠네요.”

“위로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연락을 받지 못한 점만 양해해주시면 저야 감사한 일이죠. 보여드릴까요?”

현재는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자 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즉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정도면 전원이 꺼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 전화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와…… 전원을 얼마나 오래 꺼놓으신 거예요?”

“어제 껐으니까 20시간은 넘었습니다. 아직도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전화가 걸려오는 동안에도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수신되어 왔다.

화면에서 보이는 메시지 미리 보기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개 건설 인부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덤벼?

-좋은 마음 가지고 장애인 건축을 마음먹으신 분한테 부끄러운 줄 알라니. 당신은 그만한 돈도 못 대주면서 누가 누구한테 쓴소리야?

-진현재 죽어라.

과격한 내용에 당황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쿠, 이런. 고객님께 보여드릴 만한 메시지들이 아닌데. 메시지까지 이렇게 여전히 폭발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문자들을 보내는 거예요?”

“그 연예인의 팬들입니다.”

현재는 다시 굳게 표정을 다잡았다.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두들 광기에 사로잡혀 있군.’

보이는 대로만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걸 직시하는 건 누구도 선뜻 해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사실 건축 의뢰를 드리러 왔는데. 이 상태로는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가 없겠네요.”

“아닙니다. 말씀하시죠.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들어온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언제 끝날 매질일지는 모르겠지만, 감수하고 조금 피곤하게 일을 진행할 뿐이죠.”

여론의 뭇매.

그 강도가 너무 지나쳐 직접 매질을 당할 뻔했던 때도 있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부터 <올랭피아>까지.

나는 현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의연할 수 있다니.’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닐 터였다.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을 대할 때만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전생의 내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온갖 비난 문자로 휴대폰에 불이 붙을 지경이었겠지만, 현재에게는 그리 익숙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일도 다 있네요.”

현재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뉴스는 보셨나요? 요즘 위작도 잡고 광고도 성공하고, 한 일이 많은데요.”

“아. 네. 휴대폰은 못 쓰더라도 인터넷은 많이 보고 있습니다. 고객님 소식 덕분에 제 소식이 묻혀서, 외려 덕을 좀 보고 있었죠.”

현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이야기가 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개인전을 열었을 때 일이에요. 양다오예라는 중국 사업가가 제 그림을 비싸게 사갔었죠. 저는 사람들이 저의 순수한 예술혼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 그림들을 그린 거였는데, 그 사람은 제 성장 가능성을 믿고 미리부터 사들였을 뿐이었어요. 뭐, 그리는 사람의 입장과 사가는 사람의 입장에 차이가 있을 뿐인 거죠.”

양다오예는 인상주의, 그중에서도 후기 인상주의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의 그 기호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가장 인기가 많고 잘 팔리기 때문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기분 나쁘다고 해서 그림을 팔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선 세상에 내보인 뒤, 덤덤하게 다음 작품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면 되었다.

최근엔 그녀가 나의 그림을 비싸게 되파는 데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내 그림을 전망 좋은 투자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계속 나타날 것도 분명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항의했습니까?”

“아뇨. 그냥 받아들였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투자 목적으로 나의 그림을 산다고 해도, 제가 어쩔 도리는 없죠. 하지만…… 오히려 그중 제 그림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적지 않을까요?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가치 있는 표현을 한 거죠.”

나의 그림을 봐주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샬롯과 백 마담, 바티뇰의 예술가들과 게리, 테레즈.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보면 만날 수밖에 없는 감상자들이었다.

“예술은 넓은 바다를 향해 목놓아 외치는 일이라고 했어요. 바다 너머의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말이죠. 처음엔 절대 들릴 일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수천 명 중의 한 사람은 분명 듣게 되어 있어요. 언젠간 멋진 배를 타고 누군가 다가와 말하겠죠.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노라고.”

낙선의 저주를 맞은 삶이란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생이었지만, 내 목소리는 마침내 사람들의 귀에 가 닿았다.

오래 묵살된 목소리일수록 들렸을 때 더욱 절절해지는 법이었다.

현재라면 언젠간 분명히 인정받게 될 것이 뻔했다.

그의 성장은 시간문제였다.

누구도 감히 그의 건축을 훼손할 수 없을 만큼의 성장 말이다.

“그거 정말 좋은 말입니다.”

“그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그동안 제 의뢰를 받아주세요.”

“네? 어쩔 생각이십니까?”

그야 뻔했다.

해당 연예인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 건물을 찾아가거나.

하지만 그 생각을 현재에게 공유한다면 그는 나를 뜯어말릴 게 뻔했다.

언론의 폭격이 심한 와중이기 때문에 11살의 신체를 가진 내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

‘하지만 몸이 11살이라고 해서 정신까지 11살인 건 아니야.’

사람들의 비난을 돌파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생의 나로서는 계속 그림을 그릴 도리밖엔 없었지만, 고민한 시간만 합쳐도 현재 나이만큼은 됐다.

“어떻게 할지는 지금부터 고민해봐야죠. 그보다 일단 건축 이야기부터 나눠요.”

“네? 아…… 예, 예! 그러시죠.”

내 의도를 잘 이해해주는 현재였다.

그와의 대화는 짧더라도 마음을 공유하기는 충분했다.

현재도 나와 건축 이야기하는 것을 즐길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 현재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의 꿈과 사조에 대한 원대한 계획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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