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착시인가 생시인가 (2)
나는 다음 날 즉시 스튜디오를 다시 찾았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하려고 했지만 나는 1층이 좋았다.
휴게공간도 마련돼 있었고, 무엇보다 고래 영상이 주는 무한한 영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노라 스미스 씨 추천 건 말이에요. 사실 받아주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이야기 꺼내놓고, 죄송하네요.”
노라가 거절한 것을 그녀로서 어쩔 수가 있었겠는가.
“영상 쪽으로는 이렇다 할 작품이 없으니. 그분의 인정을 받으려면 영상 결과물을 많이 만들어놔야 하겠죠.”
“......사실 맞아요. 지금으로서는 아직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노라 교수님의 신뢰를 얻는 일이야 윤 화가님껜 시간문제일 테니, 우선 이번 일부터 잘해내 봅시다.”
나는 이번 <예술가의 눈>을 어엿한 미디어 아트로 발전시켜보고 싶었다.
유럽에서는 복원과 필립 영화로 이름을 알려 놓은 상태였다.
이번 광고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하니 미국에도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기회쯤은 가진 셈이었다.
“저도 화가님이 미디어 아트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노라 선생님과 작업하게 되실 때까지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이번 작품도 미디어 매체를 활용해 완성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생각하신 형태가 있나요?”
아직 전시회에 찾아갈 여유는 없었다.
대신 집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미디어 매체가 활용되는 선에서 대부분의 것들이 제한 없이 시도되는 것 같았다.
마치 붓과 물감만으로 수많은 사조가 시도되어 왔듯이 말이다.
나는 <헤엄치는 고래>를 가리켰다.
“일단 촬영된 영상으로 저렇게 입체적인 영상을 만들고 싶어요. 대각에서 봤을 때 입체적으로 보이는 작품 말이에요.”
카산드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픽 작업은 저희가 팀을 꾸려서 100%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어요. 촬영도 문제없죠. 중요한 건 저 스크린이겠네요. 한국에 하나 있긴 한데, 섭외가 가능할지 확실치는 않아요.”
프레스코 천장화를 생각하면 스크린은 크면 클수록 좋았다.
“이번 작품을 꼭 훌륭한 미디어 아트로 만들어내고 싶어요. 그러려면 기술적인 모든 시도가 가능한 팀이 꾸려져야 하겠죠. 대표님께서 그런 팀을 꾸려주세요. 그동안 저는 영상 내용을 구체화시켜 놓을게요.”
대화를 마친 카산드라는 즉시 사무실로 향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디어 아티스트와의 작업이었다.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
카산드라는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삼성역 대형 스크린을 관리하는 ‘스퀘어 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준과의 합작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큰 스크린이 필요했다.
돈을 들여 스크린을 제작하는 거야 무리해서라도 가능은 했지만, 삼성역처럼 유동이 많은 곳에 스크린을 설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네, 삼성동 스퀘어 홀입니다.
“‘카산드라 스튜디오’ 대표 카산드라입니다. 이번에 새로 기획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삼성역 옥외 광고는 언제부터 사용 가능합니까?”
-오늘 일자로 3개월 이후부터 바로 광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화제의 ‘카산드라 스튜디오’라니. 굉장히 기대되는데요?
빨라야 3개월.
아직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3개월은 너무 느렸다.
“혹시 일정 조율은 어렵겠습니까?”
-예…… 그, 이미 계약까지 완료된 건들만 해서 3개월이라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건 담당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묻고 들었다.
-그런데 어떤 영상이기에 제작사에서 직접 전화를 주신 겁니까?
“윤예준 화가와 미디어 아트 합작에 들어갈 겁니다.”
-윤예준 화가요?!
담당자는 윤예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매우 반기는 음색이었다.
-광고 일정은 변경이 어려워요. 대신 일정 정도는 공유해드릴 수 있습니다. 광고주들 계약 담당자 번호도 개인정보라 사업자명밖에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요. 원하시는 일정에 들어 있는 광고주를 제게 일러주시면 계약을 조율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산드라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전화를 끊었다.
이마저도 윤예준의 이름 덕분에 받아낸 배려일 터였다.
하지만 광고 일정 조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담당자로부터 휴대폰 메시지가 전달되어 왔다.
‘신상품 광고는 일정을 절대 바꿔주지 않을 것이고…… 식품사 광고 위주로 컨택해봐야겠어.’
카산드라는 담당자가 보내준 광고 일정을 살펴보며 상시 광고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업자들을 추려보았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한 사업자를 발견했다.
‘이런…… 천운이 있나.’
굳이 다시 담당자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업자와는 이미 친분이 있었으니까.
카산드라는 바로 ‘케니’의 윌리엄 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카산드라입니다. 삼성역 대형 스크린 광고 일정을 봤는데 ‘케니’사 광고가 포함돼 있더군요. 혹시 그거 이번에 촬영한 신제품 광고인가요?”
-아, 네. 입체 스크린에 어울리도록 최소한만 편집해서 다음 달 초부터 재생될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광고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숀은 면적이 작은 좌측면에는 케니 로고와 신제품 사진, 면적이 넓은 우측면에는 이번에 촬영한 광고 영상이 들어가도록 편집된 영상을 스퀘어 홀에 보내뒀다고 했다.
그래서는 그냥 두 개의 영상을 동시에 튼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윤예준 화가와 함께 삼성역 스크린에 어울리는 미디어 아트를 제작할 거예요. 저로서는 이번 광고의 화제성이 잦아들기 이전에 바로 작품을 게시하고 싶은데, 혹시 그 광고 일정을 조율할 수 있을지 묻고 싶거든요.”
카산드라는 자세히 설명했다.
이번 예준의 작품에도 카메라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케니의 협조를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저희 쪽에서 여러분들 작품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하면 흔쾌히 스크린을 양보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또 미디어 아트라면 단순 평면 광고로 제작된 이번 광고보다 더 적합할 거구요.
‘케니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하겠다’라는 건, 이번 작품을 케니의 홍보용으로 활용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건 시간이겠습니다. 윤예준 화가의 첫 미디어 아트라면 굉장히 매력적인 기획입니다. 케니 지원은 충분히 얻어낼 수 있으니 바로 작업에 돌입해주세요.
예준에게 푹 빠져 있는 숀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숀도 케니사 광고의 최고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이 정도로 장담한다면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야.’
케니 쪽에서 윤예준을 좋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이번 광고 성공으로 사내에서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겠지.
“네, 알겠습니다.”
카산드라는 전화를 끊자마자 직원들 앞에 섰다.
“자,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만 긴급 공지가 있습니다.”
업무에 열중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카산드라를 돌아보았다.
“이번에 ‘케니’ 광고가 큰 인기를 끌고 있죠? 이 기세를 몰아서 윤예준 화가의 첫 미디어 아트를 제가 진행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따로 특별팀을 꾸릴 생각이니, 사내에서도 원하시는 분들은 고민해보고 지원해주세요.”
오늘 퇴근 전까지 신청해달라고 덧붙이려는 찰나, 수많은 직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팀에 들면 윤예준이랑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겁니까?”
“제 일생 최고의 커리어가 되겠는데요!”
특별팀 같은 건 꾸려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로서도 이런 특별팀 같은 건 겪어본 적 없는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팀에 지원했다.
그들을 포함해 카산드라가 평소 눈여겨보았던 외부 영상 전문가들에게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수많은 희망자들 중 적임자를 선정하는 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렇게 최고의 팀을 꾸렸다.
촬영, 연출, 음향, 조명, 소품, 편집까지. 업계 최고의 인력들만 모아서 말이다.
‘이 정도면 전력을 투입하는 셈이겠어.’
카산드라는 최종 선정된 직원들을 사무실에 불렀다.
외부 전문가들은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기로 했다.
“윤예준 화가가 지금 구체적인 영상 내용을 구상하기 시작했어요. 곧 그 구상이 끝나겠죠. 하지만 그 구상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윤예준 화가의 그림 작품이 지금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함께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예준은 작품을 스튜디오에 맡기겠다고 했다.
카산드라는 사무실 한쪽에 잘 세워둔 <예술가의 눈>을 가져와 직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일단 한번 감상들 해보시죠.”
예준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을 해올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모티프를 최대로 표현해낸 작품이 바로 <예술가의 눈>이었다.
이 그림에 앞으로의 작품의 모든 게 담겨 있을 것이었다.
“와. 최근에 사진과 구분되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고 화제던데, 그 소문이 진짜였네요.”
“이렇게 밤하늘 같은 검은색은 어떻게 표현하는 거지?”
“렌즈에 유성우가 비치고 있는 모양새네요. 그런데 카메라 몸통은 어디 있죠? 렌즈 자체에 상징성이 있는 건가?”
카산드라는 예준에게 작품명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지만, 함께 영상을 작업할 직원들은 이 작품의 메인 아이디어를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임팩트가 영상엔 더 극적으로 담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봐주세요. 지금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건 이 그림뿐입니다.”
직원들은 깊은숨을 내쉬며 작품을 뚫어져라 감상했다.
마치 퀴즈를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어?! 이거 설마……”
“아! 맞네, 맞네. 와……”
“왜요? 뭔데요? 난 아직 모르겠는데.”
알아차린 직원들은 입을 막고 감탄했고, 아직 알아채지 못한 직원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발상을 바꿔보려 애썼다.
“지금 여러분들이 느끼신 그 반전의 감각. 그게 저희 영상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크기나 비율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1층에 있는 <헤엄치는 고래>와 같은 비율에, 크기는 무조건 조금이라도 더 커야 합니다. 아마 삼성역 옥외 광고 크기에 맞추면 될 겁니다.”
삼성역 옥외 광고라는 말에 모든 팀원들이 말을 잃었다.
***
예준과 카산드라, 직원들, 그리고 숀까지.
그들은 스튜디오 내 회의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건 숀이었다.
“케니에서 여러분들의 기획을 돕게 되었습니다. 조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고요. 그것만 지켜준다면 윤 화가님의 작품을 케니사 광고로 간주하고 특수팀 인건비까지 전부 지원한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 조건이 뭔가요?”
“단 두 가집니다. 하나는 ‘케니’사 카메라만 사용해서 촬영하고 그 사실을 홍보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스튜디오에 있는 카메라들 대부분은 ‘케니’ 카메라였고 웬만한 카메라 회사들보다 품질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광고 영상을 케니 홈페이지와 케니사 계정의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겁니다.”
그 또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작품은 <헤엄치는 고래>처럼 입체 스크린 전용으로 기획될 것이었다.
인터넷에 게시되는 평면 영상으로는 반쪽짜리 작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홍보는 최대한으로 해주세요. 저희도 준비 단계부터 관심을 끌어놔야 작업이 끝났을 때 성과가 극대화될 테니까요.”
“네. 그럼 인터넷 기사는 저희 마케팅팀에서 시끌벅적하게 몰아치겠습니다.”
영상 제작에 대한 투자금 확보만 해도 굉장히 큰 메리트였다.
예준의 그림을 보고 들떴던 직원들은 숀이 전하는 기쁜 소식에 더 흥분했다.
“저 근데 질문 하나 있는데요.”
그때 예준이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화가님.”
“작품 전시를 위한 전시장과 스크린 제작 비용도 다 케니에서 지원해주는 건가요?”
예준의 질문을 들은 숀은 조용히 예준과 직원들을 두루 돌아보았다.
“이번 신제품 광고를 기획하면서 삼성역 옥외 스크린 상영도 미리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원래 같으면 이번 윤 화가님의 ‘반전’ 광고가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입체 광고라면 여러분들의 새로운 기획으로 바꾸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스크린을 쓰시면 됩니다.”
삼성역 옥외 광고에 대해 잘 모르는 예준에게 카산드라가 설명했다.
“저희 회사 1층에 있는 스크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변에 있어서 눈에도 훨씬 잘 띕니다.”
카산드라가 설명하는 동안 숀은 프로젝터로 삼성역 옥외 광고판을 검색해 예준에게 보여줬다.
“완전 큰데요!”
스크린 크기가 건물을 다 덮을 만큼 커서 그 안에 들여다보이는 영상은 건물 내부의 모습처럼도 느껴졌다.
예준은 놀라워하는 한편으로 더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죠? 이 정도 규모면 멀리 제주도에서도 내다보일 겁니다.”
“그건 좀 아니다.”
다른 직원들이 숀의 과장에 딴지를 걸었다.
물론 옥외 광고판이 제주도에서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화제성만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가보지 않은 미국에까지도 전해질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광고 수익에 작가님 몫까지 포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케니로서는 광고이긴 하지만 작가님껜 작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