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광고(光告) (3)
카산드라가 안내해준 곳은 사방이 온통 하얀 스튜디오였다.
한쪽에 정리된 테이블 위에는 큰 물감통이 여럿 놓여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제공하는 옷을 입고 나오자 앞치마를 입은 여성이 거울 앞에 놓인 의자로 안내했다.
그곳에 앉자 내 얼굴에 붓과 정체불명의 스펀지를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와, 예준이. 옷도 잘 어울리고. 완전 연예인 같은데?”
뒤에서 바라보던 아버지가 칭찬하자 직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피부도 깨끗해서 화장이 별로 필요 없네요. 조명에 맞게끔 피부톤만 조금 손볼게요.”
조명에 맞는 피부톤이라면……
영상 속 색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뜻으로 들렸다.
“자. 바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타트!”
내가 준비실에서 나오자마자 카산드라가 외쳤다.
그녀는 준비작업에서부터 모두 촬영한다고 했다.
촬영 감독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이동하며 나의 모습을 찍었다.
“자, 여기 우선 케니 신제품 있습니다. 촬영 카메라들은 웬만하면 직접 응시하지 않는 게 좋구요.”
카산드라에게 붓과 물감들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숀에게 미리 내가 조합한 색감 정보를 받아 그 둘을 우선적으로 준비했고, 나머지는 혹시 몰라 더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물감도 많으니 더 조합해서 쓰시면 될 겁니다.”
미리 빌린 카메라로 색을 더 만들어뒀었다.
이곳에서도 금방 만들 수는 있었지만, 스튜디오에 준비된 물감들은 바로크 물감이 아니었다.
“바로크사 물감은 없나요? 그게 색감이 더 좋은데.”
스튜디오에는 바로크 물감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차에 있는 물감들을 넉넉히 챙겨둔 상태였기 때문에 가져다 쓸 수 있었다.
그 중엔 지난번에 내가 조합해둔 색도 있었다.
확실히 스튜디오에서 준비해준 것보다 질이 좋고 조합도 완벽했다.
‘일단 물감부터 섞어야겠군.’
주황색은 카드뮴 오렌지와 버밀리온을 정확히 반씩 섞였다.
울트라마린은 조명을 고려해 반짝임을 담아낼 수 있도록 코발트 블루에 가깝도록 했다.
그밖에도 대부분의 물감을 밝고 연한 색으로 만들어냈다.
“종이는 어디에 있나요?”
카산드라는 세트장 전체를 가리켰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모두 하얀 색이었다.
‘어쩐지. 왜 카메라마다 비닐을 쓰고 있나 했더니……’
숀에게 부탁한 대로 완전한 하얀색이었다.
이 정도라면 ‘케니’ 본사의 작업실에서보다 더 신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파란 계열의 물감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벽을 향해 힘껏 던지니 푸른 물감이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적은 용량의 물감이었지만, 온 바다를 다 끼얹은 것처럼 속 시원했다.
‘크리스탈 아트 페어에서 본 작품들이 생각나는군.’
그곳엔 이렇게 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표현한 작품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이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카메라를 들어 올려 물감이 묻은 모양새를 살폈다.
줌을 당기자 눈까지 시려올 정도의 푸른 색감이 파인더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촬영기사들이 카메라를 들이밀며 나의 얼굴을 찍었다.
‘저기 찍히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게 되겠지.’
나는 바로 다음 물감을 집어 들었다.
저 작은 장비 안에 수천, 수만 명의 관람객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굉장히 가까이서, 자세히 보여줄 수 있었다.
***
예준은 물감을 던지거나, 붓에 묻혀 뿌리거나, 물감이 묻은 곳으로 가서 붓으로 모양을 내곤 했다.
바로크 물감을 더 구해와 건네니 바구니 여럿을 가져다 놓고 물감과 물을 마구 뒤섞었다.
아무렇게나 뒤섞는 것처럼 보였지만, 금세 숀에게 전달받은 두 개의 색을 포함한 여러 색깔들이 바구니 안에 담겼다.
카산드라는 촬영 대기실에 앉아 예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구니째로 뿌리거나 벽에 강하게 붓질을 할 때 예준은 스스로도 굉장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촬영장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준의 모든 액션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마치 감상하듯 영상을 담아냈다.
‘저 윤예준이라는 화가의 예술혼은 오미크론처럼 빠르게 전염되는구나.’
자신의 기획을 다급히 바꾸고도 만족해하는 필립과 숀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예준은 주변 사람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칠 만큼 거대한 예술 세계를 가지고 있는 화가였다.
“잠깐, 화가님 메이크업 좀 고치고 갈게요.”
하마터면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뻔했던 카산드라가 정신 차리고 외쳤다.
그러자 예준은 뺨으로 땀을 한 방울 흘리며 멈춰 섰다.
예준은 손에 묻은 물감을 씻은 후 준비실에 앉았다.
예준이 입고 있는 검은 바지와 하얀 셔츠, 그리고 ‘케니’ 신제품엔 물감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영상 속 즐거운 분위기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예준의 얼굴을 검토하는 동안 카산드라는 옷과 카메라에 묻은 물감을 최대한 유지해달라고 부탁했다.
“저 필요한 건 있으세요?”
“음…… 지금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뭔가 조금 더……”
예준은 고민하더니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스프레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 저거. 혹시 저거 더 있나요?”
“네? 스프레이 말씀이세요?”
카산드라가 되묻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요령껏 끼어들었다.
“제1촬영장 분장실에 보면 엄청 많아요. 스프레이는 소모성 비품이라서.”
“가져다 쓸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여러 개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예준의 메이크업 검토가 끝난 뒤 1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예준은 그녀가 쓰던 스프레이에 물감과 물을 함께 담기 시작했다.
촬영기사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물을 더 섞어서 연해지는 대신 공중에 있을 때 빛을 많이 투과할 수 있을 거예요.”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공간을 의도한다.
예준에게는 사물뿐만 아니라 공중의 색채도 활용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빛은 어디에나 있어. 이 스튜디오에도 가득해.’
예준은 물감을 잘 섞은 뒤 공중에 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노란빛에 둘러싸인 예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렘브란트로부터 시작돼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빛에 대한 천착.
거기 멈추지 않고 예준의 액션은 역동적이었고, 그 추상주의적 결과물은 불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점찍는 예준의 카메라.
미술사의 모든 예술성이 이번 예준의 작품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예준은 그 후로도 물감을 벽에 몇 번 뿌리고, 붓질하고, 끼얹었다.
그리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가져온 스프레이에 물감들을 색깔별로 넣었다.
“저, 혹시 삼각대 있나요?”
“네, 물론이죠.”
촬영 보조 직원이 삼각대를 가져다주자 예준은 바로 카메라를 고정시켜 높낮이와 위치를 조정했다.
스프레이와 카메라를 동시에 들기에는 힘이 모자랐을 것이었다.
이윽고 스프레이를 뿌리기 시작했고, 예준은 심혈을 기울여 셔터 버튼을 눌렀다.
“완성됐네요.”
카메라를 확인한 예준이 고개를 돌려 촬영기사에게 손짓했다.
“거기서 찍으면 각도가 안 나올 텐데. 이리로 와보실래요?”
각도?
카산드라와 직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촬영기사는 직원들을 등지고 자신에게 손짓하는 예준의 모습을 담았다.
예준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 바닥에 스프레이를 뿌려 원형 표시를 했다.
“이 위치에 서보세요.”
촬영기사는 그 위치에 서서 벽 모퉁이를 찍더니 감탄했다.
“와!”
“왜? 뭔데?”
직원들도 궁금해서 예준이 표시한 자리로 가서 섰다.
모서리를 기준으로 하는 두 개의 벽.
그리고 바닥에 묻은 물감까지.
예준이 표시한 자리에서 바라보자 세 면의 얼룩들은 뒤늦게 균형을 찾았다.
그냥 보기에도 카메라 무늬는 조금 희미하게나마 눈에 띄었는데,
공중에 뿌려진 물감들과 겹치며 더욱 선명하게 찍힌 것이었다.
“어때요? 이 반전은.”
아무렇게나 뿌리고 끼얹은 게 아니었다.
1층 로비에서 고래 영상을 보고 바로 영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카메라를 그렸어……”
벽의 기울기와 모서리를 이용해 다른 각도에서는 카메라 형상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예준의 그림은 추상화로도 보였고, 그래피티로도 보였다.
‘뉴스 기사를 보니 바티뇰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도 교류했다더니……’
하지만 잠깐의 교류였을 뿐이었다.
고래 영상에서 즉시 영감을 얻었듯 그래피티도 완전히 예준의 예술적 자산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공중에 흩뿌려진 형형색색의 물감들은 작품에 한 치의 공백도 남기지 않고 빛을 채워 넣었다.
“이게 다가 아니에요.”
예준은 카메라를 조작한 뒤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카산드라는 놀랐다.
‘숀이 보내준 기획안에서 봤다.’
예준의 마지막 결과물은 ‘케니’의 반전 효과까지 적용시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예준은 반전모드로 벽을 다시 찍은 거였다.
‘궁금하다……!’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카산드라는 재빨리 사바티에 필름을 가져와 촬영기사의 카메라 렌즈 앞에 댔다.
사바티에는 반전 인화된 네거티브 필름 앞에 겹쳐 영상물의 원래 색상을 확인할 때 쓰는 도구였다.
물론 작업 간에만 편의로 사용하는 것이라 확실한 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카산드라는 촬영기사와 함께 화면을 확인했다.
“미쳤네……”
반전 촬영된 예준의 그림은 카산드라와 촬영기사를 당황시켰다.
일반 모드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색들이 반전모드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은근했던 카메라는 더욱 선명해졌고, 단순한 명암까지도 표현되었다.
이젠 영락없는 카메라 그림이었다.
당황해서 필름을 떨어뜨리니 그림은 곧 원상태로 돌아왔다.
뒤늦게 예준의 사진을 확인한 직원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카산드라는 예준이 선사한 두 개의 반전에 눈앞이 흐려질 지경이었다.
윤예준은 보통의 천재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종합적인 미술이 가능한 화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건…… 광고의 기승전결과는 완전히 달라.’
상업적 목적으로 찍은 광고였지만, 하나의 영상 예술로서 카산드라의 커리어를 뒤바꿀 역작이었다.
***
촬영이 끝난 뒤 예준은 다시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고래 영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카산드라는 예준 옆에 앉으며 음료수를 건넸다.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하네요.”
예준이 음료수를 받아 들며 말했다.
굉장히 호평이 많은 작품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 예준이 보여준 퍼포먼스나 반전은 없는 작품이었다.
“오늘 화가님께서 보여주신 작품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번 광고…… 기대뿐만 아니라 제 모든 것도 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촬영에만 다섯 시간이 걸렸다.
길어야 5분짜리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규모 광고 기획이기 때문에 메이킹 필름도 제작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있었던 다섯 시간 중 편집하고 싶은 부분은 단 1초도 없었다.
“저는 이런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매력적이잖아요? 지금도 영감이 막 떠오르고 있어요.”
“영감은 이미 받으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 촬영 때 그린 작품이요.”
“......그건 참고만 한 거죠. 대체 이걸 만든 사람은 누군가요?”
아무래도 예준은 고래 영상을 생각보다도 더 좋게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작품이에요.”
“정말요?”
“네. 작품명은, 그냥 직관적으로 <헤엄치는 고래>죠. 영상기술적인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아 로비에 배치했는데,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예준은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그럼 이런 장르의 예술을 많이 하시는 거예요?”
“네.”
카산드라는 예준에게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에 대해 알려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했다.
“기술적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현대의 매체예요. 기술이 발달할수록 예술적 시도의 자유도도 높아지기 때문에 미디어는 굉장히 매력적인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 매체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걸 ‘미디어 아트’라고 불러요.”
“굉장히 잘 알고 계시네요.”
예준이 감탄하며 말했다.
“저건 제 첫 작품이나 다름없어요. 이후로도 많은 작품을 만들었죠. 미디어 아트에 대해서라면 빠삭하게 알고 있죠.”
<헤엄치는 고래>에 이렇게나 큰 감명을 받았다면, 아마 미디어 아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윤예준 정도의 천재라면 열정을 가진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엄청난 성장을 이뤄낼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건 윤 화가가 차세대 일류 미디어 아티스트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해줄 기회인지도 몰라.’
미술에 대해 계속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아이였다.
카산드라가 알기로 천재들 중엔 예준 같은 화가가 드물었다.
일반적인 천재들과도 다르다는 방증이었다.
예준의 데뷔는 예술계 전체에도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저는 오랜 시간 미디어 아티스트를 해왔지만, 대학 시절 교수님이었던 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굉장히 대단한 아티스트였죠.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셨어요.”
“그게 누군가요?”
바로 ‘드림캐쳐 스튜디오’ 대표이자 메인 제작자 노라 스미스.
카산드라가 졸업한 RISA(Rhode Island School of Art) 대학의 영상과 교수 중 업계 일을 병행하고 있는 유일한 교수였다.
그녀는 대학과 업계를 동시에 섭렵하며 자신과 뜻이 맞는 제작자만 선별했다.
미디어 아트계 노라의 커리어와 권위를 생각하면, ‘드림캐쳐 스튜디오는’ 영상 쪽 최정상 스튜디오라고 볼 수 있었다.
카산드라가 설명하자 예준이 흥미를 보였다.
“본격적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예요. 그런 분이라면 확실히 배워볼 수 있겠네요.”
예준은 인터넷에 ‘노라 스미스’를 검색해보며 말했다.
‘색감에 대한 이해도나 타고난 아이디어만 봐도 금방 미디어 아트계의 탑에 오를 만한 예술가야. 그런 데다가 욕심까지 있군. 완벽해.’
노라는 미디어아트의 권위자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길 마다하지 않았다.
노년에 이르러서까지 대학 교편을 놓지 않는 것은 그 이유였다.
그녀라면 예준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여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표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하면 노라 스미스와 카산드라가 동시에 나오는데, 이건 대표님 이름이죠?”
카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라 교수만큼 카산드라도 끈질기게 미디어아트를 해온 결과였다.
“맞아요. 하지만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은 노라 스미스 교수님이에요. 연세가 있으신 분이지만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는 현역 작가로서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없죠. 지금은 어른들의 마음까지 설레게 하고요. ‘드림캐쳐 스튜디오’만큼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곳은 없어요. 좋은 경험이 되실 것 같은데, 소개시켜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노라 교수라면 예준을 굉장히 좋게 볼 것이었다.
좋게 보는 정도뿐이겠는가.
아마 이번 광고만 봐도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