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광고(光告) (2)
이때까지만 해도 숀은 예준과 함께하게 된 이 광고가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지. 기왕 윤예준 같은 예술가와 함께하는 광고인데. 더 많은 것들을 시도할 수 있겠지.’
광고는 어떤 영상 장르보다도 냉혹한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건 기본적인 기획 정도는 작가가 하지 않던가.
하지만 광고는 그 기획부터가 회사의 의뢰에서 시작되었다.
홍보해야 할 상품도, 광고 컨셉도, 담당자 마음이라는 게 없었다.
숀 생각에 홍보 효과가 뛰어난 기획이라고 하더라도 사장과 투자자의 컨펌부터 받아내야 했다.
그것도 전 과정에 걸쳐서 말이다.
‘얼마나 오래 고심해서 통과된 기획이었던가.’
말이 최고마케팅책임자(CMO)였지 투자자들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광고를 파악해 더 발전된 형태의 결과물을 내놓는, 점쟁이 역할부터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기존 기획도 반려되는 기간만 한 달이 넘었다.
그렇게나 오래 준비해온 기획이 지금 윤예준 한 명으로 인해 완전히 뒤집어져버린 것이었다.
숀은 하루 만에 새로 쓴 기획안을 들고 사장실을 직접 찾았다.
비정기적인 기획안을 수시로 주고받을 때엔 이렇게 사장실을 다이렉트로 방문하곤 했다.
‘사장실로 가는 걸음이 이렇게 가벼웠던 적이 있던가?’
마케팅 일을 한 지 20년이 넘은 베테랑이었지만 기획안을 검토받을 땐 아직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가뜩이나 그게 하루 만에 빠르게 쓴 기획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빨랐던 만큼 졸속 기획안은 아니었다.
‘이 기획은 무조건 먹힌다.’
사장실에 도착한 숀은 변경된 기획안을 건네며 변경 사유를 설명했다.
사장은 기획안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여기 영상 샘플이라고 적어놓은 건 뭡니까?”
“새로운 기획의 아이디어가 될 만한 영상이 있습니다.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윤예준이라는 이름에 흥미를 가진 사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메일을 확인했다.
영상은 종이에 물감을 마구 뿌리는 예준의 모습을 담아놓은 것이었다.
사장은 영상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예준이 카메라 화면을 보여줄 때, 그리고 반전 촬영한 사진을 보여줄 때, 총 두 번 놀랐다.
“이 아이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겁니까?”
대부분 그랬다.
“마지막에 들어가는 문구도 윤예준 화가의 제안을 그대로 넣은 것입니다.”
예준은 기존의 모델 독백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카메라 안에 예술의 심오함도 담을 수 있을까? (웃고) 당신만의 반전을 만들어보세요.
사장은 그 문구를 소리 내어 읽어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습니다. 광고 카피라면 이렇게 임팩트가 있으면서도 곱씹어 생각해볼 만해야 하는 거지요.”
“기한에 늦지 않게 진행하겠습니다.”
“이번에 공모전으로 개인 사업을 하려는 놈이 있어서 노이즈가 조금 있었는데. 골치 좀 썩을 뻔했더니 잘됐군요. 바로 시작하세요.”
공모전 심사위원장 고지마 야스오 이야기였다.
몇 년째 케니의 공모전을 담당해왔지만, 이번 윤예준의 그림을 사진으로 착각한 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비난을 피할 수 없었지만 왜인지 해명하려 나서지 않았다.
사장으로서는 말 그대로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숀은 사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즉시 휴대폰을 들었다.
“‘카산드라 스튜디오’에 전송할 준비 끝났나?”
-네? 그렇긴 한데, 수정사항 없다고 하십니까?
그랬다.
이례적이게도 기획안이 바로 촬영 시안이 되었다.
-......방금 전송했습니다. 다음은 최고실적 달성 파티 예약하면 되겠습니까?
***
광고 제작으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은 카산드라는 ‘케니’ 측의 최종 기획안을 메일로 전달받고는 의아해했다.
이번 기획에 대해서만 벌써 두 차례의 참고용 가안을 전달받았는데, 이번 최종본은 완전히 새로운 기획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컨셉이 바뀌었다.
조금 더 예술적이어졌고,
‘훨씬 더 좋아지긴 했는데. 기획을 어떻게 이렇게 급하게 바꿀 수 있었지?’
보통 최종본은 그 직전 기획안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카산드라는 메일을 완전히 검토한 뒤 숀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검토가 끝난 모양이네요. 어떻습니까?”
숀은 전화를 예상했다는 듯 굴었다.
“좋긴 한데. 극비에 진행된 프로젝트예요? 갑자기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뚝딱 나왔지?”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광고모델은 공모전 수상자로 하게 돼 있잖아요? 그 공모전 우승자가 꽤나 화제의 인물이라서 말이에요.
카산드라는 바로 인터넷에 케니 공모전을 검색해보았다.
같은 키워드로 수많은 기사들이 검색되었다.
[천재 화가 윤예준, 사진 예술 권위자 고지마 야스오에게 한 방 먹이다!]
[케니에 진짜 반전 선사한 윤예준, 수상작 어떤가 보니…… ‘충격’]
윤예준.
그것도 리틀마네 윤예준이라면 샬롯에게 그림을 판 바로 그 아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영화계 거장 필립 뷔르티와 협업을 했다는 바로 그 천재 화가!
‘유럽에서는 이미 흥행가도에 있고…… 이번에 한국에서도 영화관마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를 틀고 있지.’
카산드라는 숀과의 전화를 끊고 필립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립의 영화는 카산드라도 최근에 봤다.
거기 나온 <식물원에서> 모작과 포스터의 작업실 그림을 그린 일화는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윤예준의 영웅담이었다.
-이게 누구야? 카산드라 감독님 아니신가.
필립과는 일전에 특수효과 감독으로 함께 일한 적 있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는 여전히 카산드라를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감독은 무슨. 영화 보고 연락해봤어. 굉장히 바쁘겠던데?”
-그럼. 바랐던 일이지만 몸이 버텨주질 못하는군.
“이전에는 꽤 흥행하고도 별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이번 건 좀 다른가 봐?”
카산드라가 공치사를 좀 떨어주자 필립은 갑자기 겸손해졌다.
-당연하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스탭들과 배우까지. 열심히 했어. 그리고 윤예준 화가님 덕을 가장 많이 봤고.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윤예준 일로 내내 떠들썩하긴 했다.
“사실 그 윤예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번에 광고를 같이 하게 될 것 같거든.”
카산드라는 필립에게 윤예준과 함께하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하하하. 그래? 하긴. 이번 영화도 윤예준 화가님이 좀 바꿔놨지. 그럴 만한 인재거든.
“필립, 네 영화도?”
숀이야 윤예준의 화제성에 발맞춰 재빨리 기획을 바꿨다고는 하더라도, 필립은 달랐다.
필립은 칼같이 계획대로 진행하는 감독이 아니었던가.
작업 현장에서 수많은 영감을 주는 화가라는 뜻인데, 카산드라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소통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 아무튼. 요즘도 영화 쪽 외주 좀 맡나?
“뭐, 종종. 근데 어느 위대한 감독님께선 빈말이라도 같이 하자고 안 하시더군.”
-하하하. 그런 거 아냐. 그래도 당분간은 여행이나 다니며 머리 좀 식힐 예정인데, 나중 차기작 때 기회 되면 또 한번 보자고. 자네가 필요해질 수도 있으니까.
카산드라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작품 욕심이 많은 필립이 한가롭게 여행을 다닐 생각을 한다는 건…… <시간을 거스르는 자>로 많은 돈을 번 건 물론이고 그의 예술 욕심까지 충분히 충족했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 모든 게 윤예준 덕분인가?’
카산드라는 기획안에 기입된 번호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다.
***
광고 제작은 ‘카산드라 스튜디오’라는 곳에서 맡게 되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통해 촬영 장소와 일시를 전달해주었다.
숀이라는 사람은 기획 담당자고, 직접 영상을 찍어서 만드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카산드라 스튜디오’로 향했다.
‘카산드라 스튜디오’의 건물은 ‘케니’ 본사만큼 컸고, 조금 더 화려했다.
건물을 올려다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항상 큰 건물들 볼 때마다 뭐 하는 곳일지 궁금했는데. 예준이 덕분이 하나씩 알아가는 것 같다.”
“그러게요. 이렇게 큰 건물이 온통 영상을 만들기 위한 곳이라니.”
공모전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협업을 하러 올 일도 없을 것이었다.
입구 앞으로 도착하자 한 담당자가 우리를 알아보곤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케니 본사엔 카메라 역사관이 있었다면, 이곳엔 그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건 바로 고래였다.
굉장히 비좁은 수조에 가두어져 있었는데, 고래는 쉬지 않고 몸을 계속 움직였다.
‘영상이다……’
영상 속 고래는 두 개의 면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90도 각도로 꺾인 화면이었는데, 좌측부엔 고래의 머리, 우측부엔 고래의 몸통과 꼬리가 보였다.
조금 자리를 바꾸면 그냥 평범한 고래의 영상처럼 보였지만 바닥에 표시된 위치에 가서 서면 정말로 수조처럼 보였다.
‘사실은 두 개의 평면일 뿐인데. 그를 통해 입체감을 얻어내고 있어.’
왜 그것이 더 생생해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스크린 자체의 형태가 수족관의 돌출부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3D영화는 안경을 껴야 입체감이 느껴졌지만 고래는 달랐다.
그래서 좀 덜 기술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따로 3D 안경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는 범용성이 뛰어난 아이디어였다.
‘입체감을 살린 그 방법 자체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지만, 매체가 영상이라 훨씬 좋은 효과가 나네.’
그림은 굳이 저렇게 꺾어서 그릴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영상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던 기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고래 영상을 보고 있는 도중, 한 흑인 여성이 다가와 웃었다.
전생에 스페인에서 많이 봤던 아랍인 얼굴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혼혈인인 듯했다.
“윤예준 화가님이시군요? 그리고 윤민제 님.”
“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유창한 한국어였다.
“‘카산드라 스튜디오’ 대표 카산드라라고 합니다. 윤예준 님이 참여하실 광고의 제작 담당자이기도 합니다. 저 영상을 보고 계셨군요?”
그녀가 함께 고래 영상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네.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잡아끌던데요. 착시도 신기하고, 화질도 너무 좋아서 진짜 물결치는 것처럼 느껴져요.”
“맞습니다. 화질부터 입체감, 생동감까지 모두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니까요.”
단순히 시선을 잡아끄는 거라면 단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내 구미를 잡아챈 것은 그것의 예술로서의 활용 가능성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할 영상도 저 작품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예요. 제가 듣기로는 기획부터 함께하셔서 따로 손발을 맞출 필요가 없다던데 정말인가요?”
얼마나 멋진 명연설이라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어야만 가치를 얻었다.
영화면 영화, 광고면 광고까지.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부터 성취해내야 했다.
“네. 준비가 다 돼 있다니 바로 촬영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촬영장은 어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