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61화 (61/241)

62화. 광고(光告)

나는 ‘케니 공모전’의 투고 조건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역대 모든 수상작이 사진 작품이었지만, 출품 조건은 따로 없었다.

후원가들의 요구 때문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투고 조건은 디지털 파일이었다.

사진작가들도 인쇄해서 제출하고 싶었겠지만, 주최 측에서 조금만 신경 쓰자면 인쇄는 제출 이후에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은 원본이 아닌 사진 복사본만을 제출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수상을 고려한 심사위원들도 나의 작품이 사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물론 그 자체로 심사위원들의 안목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작품을 디지털로 제출받아 벌어진 실책일 뿐 그들의 역량 부족이 아니었다.

“와…… 누가 봐도 사진이었는데. 진짜 그림입니까?”

“그래서 심사위원장님께서는 그게 사진인지 그림인지 알았다는 겁니까, 몰랐다는 겁니까?”

“대중성으로 보나 예술성으로 보나 1등감이던데, 심사위원장은 왜 윤예준의 작품을 저평가한 겁니까? 우리가 일반인이라 보는 눈도 없을 줄 안 겁니까?”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기자들이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자 나와 심사위원장은 단상 위에 나란히 선 상태가 되었다.

“여태 그림 작품에는 단 한 번도 수상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그림인 걸 이제야 알았으니 수상은 취소하시는 겁니까?”

심사위원장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가 몰랐다는 사실은 뻔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그림 작품에 1등상을 준 이유는…… 그게, 아까 말씀드렸듯 예술계의 창작 다양성에 기여하기 위해……”

심사위원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는 탓에 안내원의 통역도 더듬더듬 지체되고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거라면, 사진 예술계의 창작 다양성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예술계 전반의 창작 다양성을……”

“그럼 왜 윤예준 화가의 작품을 사진이라고 부르신 겁니까?”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심사위원장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있는 게 없다고 빠르게 판단한 기자들은 바로 내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반전이라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신 겁니까?”

“사진 원본도 있는 겁니까?”

“도대체 저기 있는 보석 같은 건 뭡니까?”

“어떻게 그리셨습니까?”

나는 그제서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게리 윈스턴의 아트 페어에서 본 작품들에 감명을 받고 작품에 보석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부터 그 작업 과정까지 낱낱이 설명했다.

어머니에게 배운 카메라 작동 요령을 바로 활용했다는 데에 그들은 크게 놀랐다.

“30분에 한 번씩 촬영해 빛을 분석하고 최고의 셔터 타이밍을 찾는 게 관건이었죠. 물론 ‘반전’이라는 주제도 중요했어요. 카메라는 프레임 안에 있는 모든 소재를 일시에 포착하기 때문에 반전을 주기 굉장히 까다로운 도구예요. 하지만…… 까다로운 만큼 카메라를 통해서만 가능한 반전 표현도 있겠죠. 저는 거기에 주목하려고 노력했어요.”

기자들은 노트북에 나의 말을 모두 받아적었다.

모든 정보를 얻은 기자들이 자리를 뜨자 시상식은 빠르게 종료되었다.

“휴. 예준이 너 때문에 아빠 심장이 나날이 약해지는 것 같다.”

질의가 오가는 동안 마음을 많이도 졸였나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광고 모델은 따로 연락 주는 걸까요?”

“글쎄다. 시상식 때 다 처리가 된다고 들었는데.”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정장 차림의 한 남성이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일전에 연락드렸죠? 최고마케팅담당자, 윌리엄 숀입니다.”

숀은 내게 악수를 권하며 활짝 웃었다.

통화할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활기찬 사람이었다.

“윤예준입니다.”

“작품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설마하니 물에 담가놓은 아쿠아마린이었을 줄이야. 많은 사람들이 후련해하겠어요.”

이후로도 내 작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더니 곧 명함을 내밀었다.

“화가님 전화는 제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제 명함 받으시고, 지금은 장소가 어수선하니 1차 회의 때 이야기를 바로 나눠보시죠.”

“네. 지금 바로 회의 날짜를 잡나요?”

“네. 화가님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진행하고 있는 일은 많지만 대부분 장기적인 일들이었다.

광고 건 먼저 처리하는 게 좋았다.

“저는 당장 내일부터라도 상관없어요.”

“그럼 내일 당장 합시다.”

추진력이 있는 사내였다.

***

“우선 광고는 5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합니다. 인터넷 게재용이고, 총 세 가지 버전으로 제작될 텐데, 그건 편집자가 할 일이기 때문에 촬영할 때엔 한 편의 긴 영상을 찍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숀은 나와 아버지를 ‘케니’ 본사의 마케팅 부서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는 우선 5분 길이의 영상을 제작한 뒤 쓰임에 맞게 15초, 30초, 1분, 2분, 5분 길이로 다양하게 편집할 계획이라고 했다.

15초짜리 광고는 텔레비전, 30초와 1분은 영상 플랫폼 광고, 2분은 영화관 광고, 5분은 ‘케니’ 홈페이지, 다시 영상 플랫폼에 쓰인다고 덧붙였다.

“촬영도 하루면 바로 끝날 것 같은데, 이미 작가님 일정에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도록 저희 쪽 준비가 끝난 상태입니다.”

숀은 영상 기획안과 대본을 건넸다.

기획안 아이디어란엔 ‘반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공모전 주제와 같네요?”

“네. 이번 저희 신제품만의 최고 자랑이 바로 ‘반전’ 기능이거든요. 타사의 어떤 카메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성능의 반전 기능이 탑재돼 있기 때문에 그걸 중심으로 홍보할 수 있도록 공모전 담당자들과 손발을 맞춘 겁니다.”

생각보다 계획적인 공모전이었다.

기획안에서 보여주는 광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높은 빌딩엔 수상 작품이 크게 걸려 있고, 모델은 카메라를 든 채 거리를 거닌다.

모델은 곳곳의 풍경을 보며 사진을 찍고, 그때마다 화면은 칼라와 흑백을 오간다.

그러던 도중 모델이 ‘당신은 얼마나 많은 풍경을 놓치고 계십니까?’라고 독백하며 렌즈 너머 시청자와 마주본다.

카메라를 조금씩 들어 올리며 눈에 가져다 댄다.

‘카메라의 새로운 가능성. 직접 확인해보세요.’라는 독백이 나오며 셔텨 버튼을 누르면, 셔터 소리와 함께 암전.

검은 화면에 ‘케니’의 상호와 신제품이 노출된다.

“화가님의 작품은 제게도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보통은 반전의 순간을 포착한 뒤 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을 사후적으로 이끌어내잖습니까? 하지만 <장대한 파장>은 달랐죠. 그 절묘한 일순간의 장면에 반전의 감각을 포함시켜서 바로 잡아냈죠. 가장 능숙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어요.”

반전의 효과를 담아내기 위해 해 질 녘을 끈질기게 기다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 나오는 칼라-흑백 전환이 반전을 표현한 건가요?”

“네. 영상에 표현하기에는 이만한 연출 외엔 없었습니다.”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흑백 전환은 반전도 아니었고, 아이디어는 조금 단순했다.

“기왕 저와 함께 작업하시는 거 예술적인 광고를 만드는 건 어떠세요?”

미술계에서 유명한 윤예준과 함께한다면 예술적으로 하는 게 옳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어떻게……?”

카메라로 빛을 포착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었다.

카메라에도 왜곡이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보았을 때와 카메라로 들여다 보았을 때의 색채 감각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다는 건, 카메라로 담아냈을 때 더 아름다운 색채가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아빠. 지금 물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직 차에 있죠?”

“물론이지. 왜, 지금 써야 할 것 같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빠르게 눈치를 챈 숀이 제안했다.

“건물 내에 작업실로 쓸 만한 곳이 있는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아버지가 차에서 미술 도구를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나는 종이를 잘 깔아서 주변이 얼룩지지 않도록 준비했다.

숀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나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여기, 가져왔어.”

아버지가 붓과 물감들을 건넸다.

전생부터 여태까지 골백번도 넘게 활용했던 색깔들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무슨 색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선 보여드린 다음에 설명할게요.”

나는 숀에게 신제품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물감들을 종이 모퉁이에 하나씩 묻혀 파인더로 확인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색상이었지만, 카메라에 잘 받는 색을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세 가지 색상을 골랐다.

색 조합을 굉장히 자세히 했기 때문에 제대로 명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니쉬 블루와 코발트 옐로, 두 가지 색을 정했다.

그리고 물감을 종이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오오!”

숀은 종이에 물들기 시작하는 물감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곤 재빨리 자신의 카메라를 들어 나의 모습을 녹화했다.

색채 그 자체를 담아내기 위한 일이라면 굳이 형상을 그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색채 배치가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계속 물감을 뿌렸다.

‘이 정도면 됐다.’

붓을 놓고 카메라를 들었다.

테스트해봤을 때처럼 역시 카메라로 보았을 때 빛나는 색들이었다.

나는 우선 작품을 찍은 뒤 반전 기능을 켰다.

그리니쉬 블루와 코발트 옐로는 각각 판톤 레드와 퀴나크리돈 바이올렛과 가까운 색으로 반전되었다.

그들도 카메라에 담겼을 때 빛을 내는 색이었다.

카메라 안에서 검게 반전된 종이는 그 빨간색과 보라색의 깊이를 더했다.

“와서 봐주시겠어요?”

숀과 아버지가 다가와서 디지털 파인더를 확인했다.

“반전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반전했을 때의 색이 어떻게 될지도 파악해야겠죠.”

나는 처음 찍은 사진과 반전된 사진을 모두 보여주었다.

“와…… 이 그림만 봐도 색깔 배치가 굉장히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에서는 색감이 극대화되는군요.”

“카메라가 색의 매력을 잘 살리네요.”

숀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반전된 사진도 굉장히 좋아요. 원래 뿌린 색상들은 하얀 바탕과 대비되면서도 잘 녹아들었는데, 이…… 빨간색과 보라색은 또 반전된 검은색과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아까 물감을 하나씩 찍으면서 카메라로 보시던데. 이걸 확인하신 겁니까?”

어머니의 카메라와 신제품 카메라는 확실히 색감이 달랐다.

그건 아무래도 기종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자신의 카메라로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색이 무엇인지는 사용자가 찾아야겠죠. 그런 면에서 사진 예술가와 카메라의 유대감이 중요한 것 같은데. 정말 매력적인 장르예요.”

“그렇네요.”

나는 사진 예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숀은 광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흔한 재능이 아니에요…… 하긴, 그 작품을 그린 분이시니. 저는 이대로 광고가 수정돼도 좋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요.”

“광고에서는 이 종이 말고 다른 종이를 써야 할 거예요. 반전되었을 때 완벽한 검정이 나오도록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숀은 계속 일반 사진과 반전 사진을 번갈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카메라 앞에서도 똑같이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메라 앞에서는 더 잘해야죠.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는 광고가 될 테니까요.”

바티뇰 거리를 찾아온 드로잉 퍼포먼스 예술가는 최종 감상자뿐만 아니라 좌중마저도 압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감은 더욱 역동적으로 뿌려야 했고, 결과물도 지금보다 뛰어나야 했다.

“광고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얼마나 나가나요?”

“길면 6개월까지도 갑니다.”

6개월이라면 필립의 영화 상영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제가 미술하는 모습과 얼굴이 많이 알려지겠네요.”

“몰라보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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