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59화 (59/241)

60화. 반전 (2)

늦은 밤이었다.

니시다 시게루의 휴대폰이 침대 위에서도 요란하게 진동했다.

잠에 들기 직전이었던 시게루는 손을 뻗어 착신자를 확인했다.

-고지마 교수님

게이오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해 모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고지마 야스오였다.

시게루가 재학하는 동안 내내 담당 지도교수로 있던 인물이었다.

‘좀 봐달라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시계는 벌써 오전 1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전 지도교수라고는 해도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전 지도교수일 뿐만 아니라 일본 사진 예술계에서는 최고 권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네, 여보세요.”

-그래 시게루 군. 공모전 참가자 명단을 보니까 아직 작품 출품을 안 한 것 같은데. 잘돼가고 있는 거 맞겠지?

야스오가 제안한 ‘케니 공모전’ 이야기였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준비 잘돼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웹으로 제출하면 되는 거였다.

마감 직전에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건데 새벽같이 전화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기간이야 많이 남았지. 하지만 이번 공모전은 어느 때보다도 더 신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혹시나 일이 틀어져서 작품 퀄리티가 낮아지거나 마감을 못 지키면 어떡하나?

마감이야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못 지킬 리 없고,

작품 퀄리티를 아무리 못 뽑아도 이번 ‘케니 공모전’에서만큼은 1등 할 수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선정 작업만 남아 있는 상태니까요.”

-역시. 내 최고의 제자답군. 하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고. 혹시나 실수를 해버리면 내가 자네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겠나?

시게루가 1등을 한다면 그건 야스오의 덕분이었다.

아니, 시게루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시게루는 대학 시절부터 야스오 수업에 대해서는 A+를 놓친 적이 없다.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더라도 말이다.

아마 이번 공모전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었다.

시게루의 아버지는 야스오와 절친한 사이이자 현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덕에 이번에도 1등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뭐, 됐나. 나야 출세만 하면 되니까.’

“네. 하시는 일에 지장 없도록 웬만한 놈으로 제출할 테니 이만 주무시는 편이……?”

-그래. 새벽 늦게 실례했군. 그럼.

야스오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지겹다, 지겨워.’

야스오의 닦달엔 이제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다.

시게루는 공모전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냥 지금 당장 처리해버려야겠어.’

제출 후보작들 파일을 하나씩 살피며 검토했다.

미적인 시도라면 자유로운 편집이 허용이라고 했는데, 그마저도 시게루는 이미 다 해놓은 상태였다.

‘사실 제출하기로 마음먹은 작품도 따로 있지.’

시게루는 해당 작품을 열어 조용히 확인했다.

제출 기한이 남았으면 시간을 두고 끝까지 고민하는 건 학부생 시절에 생긴 그만의 버릇이었다.

‘여전히 완벽해. 더 이상 손댈 데가 없다. 작품성으로도, 그리고 주제의 숨은 의도로도.’

야스오는 이 공모전을 시게루에게 제안하며 1등하기 위한 요령을 언질해주었다.

곧 출품될 케니 카메라에는 ‘반전’ 기능이 탑재될 예정인데, 작품 편집 과정에서 그 효과를 사용하면 광고 목적과도 부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거야 광고 담당자가 고민할 몫이고. 교수님은 그냥 내 작품을 편하게 밀어주고 싶을 뿐인 거지.’

하지만 이미 그 정보를 알게 된 이상 굳이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교수님 몫이에요.’

시게루는 파일을 메일에 첨부해 공모전 측으로 전송했다.

제대로 첨부했는지, 메일 주소에 오탈자는 없는지 꼼꼼히 검토한 끝에 말이다.

‘광고 모델이라…… 지금부터 피부 관리 좀 해야겠는걸?’

시게루는 냉장고에서 팩을 꺼내 붙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

‘역시. 하면 되는 놈이잖아?’

최종 작품 심사에 들어가기 전 야스오는 미리 시게루의 작품을 받아보았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이 작품을 어떻게 포장할지 고민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흠잡을 곳은 없었지만 너무나도 일반적인 작품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내가 심사위원장이니까.’

이번 신제품 컨셉과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작품이었다.

야스오는 머릿속으로 스크립트를 짜 몇 번 되뇌어본 뒤 심사장으로 향했다.

유명한 사진작가들과 명문 예술대학 교수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럼,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미리부터 대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놓는 게 좋았다.

심사위원들은 스크린에 작품을 하나씩 띄워놓고 평했다.

생각보다 면밀한 평가였다.

야스오는 일부러 호평과 혹평을 적절히 섞으며 목소리를 키워나갔다.

그렇게 시게루의 작품이 등장했다.

“아름다워!”

감탄하는 야스오를 돌아보며 심사위원들이 물었다.

“위원장님,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먼저 묻고 싶군요. 위원님들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위원들은 작품을 보더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썩 괜찮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사진 전체에 반전 효과를 적용한 것 같은데 잘 녹아든 편이고…… 무엇보다 카메라를 활용하는 기본적인 능력이 뛰어나요.”

야스오와 비슷한 교수직에 있는 심사위원이 그렇게 말했다.

야스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았다.

“바로 그렇습니다. 여태까지 본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작품이라면 1등 후보에서 배제할 순 없겠죠?”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수상은 3등까지 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야스오는 바로 다음 작품으로 슬라이드를 넘겼다.

‘음……?’

다음 작품이 표시되자마자 심사장엔 정적이 흘렀다.

다양한 빛깔들이 마치 물결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빛은 그 자체로도 반짝였다.

빛이란 실체가 없는 법이었지만, 마치 실물에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았다.

야스오는 그 색채들이 전달하고 있는 오묘한 감각에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럴 수가…… 이 작품은 도대체.”

심사위원 한 명이 작품으로 다가가 그림을 가까이서 살폈다.

그러는 바람에 작품이 조금 가려졌는데도, 야스오와 다른 심사위원들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작품에 완전히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이 보석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는데, 뭐죠? 프리즘인가.”

“프리즘이라면 일체의 난반사도 없이 왜곡 투사만을 일으키겠죠…… 저건 프리즘이 아닙니다. 무슨 보석 같은데…… 잘 확인되지 않는군요.”

“고체는 맞습니까? 마치 저 모양으로 뭉쳐진 액체를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 같은데. 빛의 자세한 색채와 저 신비로운 사물까지. 이거 작품명이 뭡니까?”

작품명도 작품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공정한 심사를 위해 출품자 이름과 작품명을 모두 가린 뒤 심사하게 되어 있었다.

“우선 저 빛을 연출하기 위해 포함시킨 소품은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빛이 미묘하게 역전되고 있고, 그 반전의 순간에 담긴 아득한 감각까지 표현되어 있어요.”

“믿을 수가 없군요. 빛이 저렇게 역전되는 순간을 포착했다는 게 말도 안 돼요. 애초에 빛이 저렇게까지 구불거리는 모습일 수가 있나? 혹시 3D 그래픽 아닙니까?”

“그렇…… 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픽은 아니었다.

야스오가 보기에도 그랬다.

작품은 분명히 사진이었다.

‘대체 뭐야……’

하지만 저런 포착이 가능한 작가는 전 세계적으로 본 적이 없었다.

반전이 주제라면 누구나 서사적인 구성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사진 효과와 주로 프레임을 이용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주제에 대하여 기교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빛의 역전 순간을 잡아냈다.

아이디어도 아이디어였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재능이 대단한 것이었다.

“1등 작품은 이미 나온 것 같군요.”

한 심사위원이 말했다.

“잠시만요. 1등 작품이라면, 아까 그 시게…… 아니. 반전 효과를 쓴 작품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야스오가 묻자 심사위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이 작품이 안 보이십니까? 당연히 이 작품이 1등이죠. 아까 그 작품은 다음 출품작을 확인하면서 2등이든 3등이든 탈락이든 시킬 겁니다.”

“안 됩니다.”

야스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저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앞선 작품과 쉽게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앞으로 나올 케니 신제품을 생각하면 말이 달라지죠. 상은 ‘반전’ 기능을 가장 잘 활용한 앞선 작품에 주어져야 해요.”

“회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이라고는 하지만 저희는 광고 담당자가 아니잖습니까?”

“그럼 말씀해보시지요. 지금 저 작품은 ‘반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심사위원들이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예술 작품은 논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야스오의 억지에 화가 난 심사위원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서 컴퓨터를 만졌다.

그리고 야스오가 지지하고 있는 작품의 파일명을 확인했다.

[<냉정>_니시다 시게루]

니시다 시게루의 이름을 발음해보던 심사위원은 질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 지금 장난하십니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무례한 짓입니까!”

궁지에 몰린 야스오는 버럭 화를 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합심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설 뿐이었다.

“그렇게 본인 제자 밀어주기 하실 거면 혼자 하시지요. 들러리는 빠져드릴 테니.”

그렇게 야스오는 심사장에 혼자 남겨졌다.

그러자 조금 침착해질 수 있었다.

‘나라고 눈까지 가리고 있는 건 아니다.’

그도 다른 심사위원들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작품이 가장 뛰어났다는 건 야스오에게도 똑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야스오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버린 심사장에서 걸어나가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장대한 파장>_윤예준]

파장이라……

‘실로 장대한 파장(罷場)이구나……’

야스오는 텅 빈 심사장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실력 차이가 고만고만했다면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 윤예준이라는 작가의 사진이 너무 압도적이었던 탓이었다.

피사체를 정하는 안목부터 시작해 포착 능력까지 뒤지는 데가 없었다.

윤예준은 수십 장의 1등감들을 모두 고사하고 이 <장대한 파장>을 얻어냈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잘 무마해보려 했건만……’

이렇게 된 이상 그로서도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심사위원의 권한으로 순위에서 배제하는 등의 더러운 짓을 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분명 온라인 투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었다.

투표자들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와 같은 전문가 집단도 있었으니까.

야스오는 혼자 남겨진 심사장에서 계속 시게루를 우승시킬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하지만 윤예준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볼 때마다 그런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었다.

‘완벽한 패배다.’

시게루에게도, 야스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심사위원들이 심사장을 나가는 순간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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