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반전
작업실에서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한편에는 어머니의 설계도와 인화된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내가 <예술가들>을 작업하기 전에 이미 어머니가 작업실을 길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프랑스에서 남겨온 아쿠아마린과 어머니의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인터넷에 사진예술 작품들을 하나씩 검색해서 경향을 확인했다.
‘포착 능력이 요구되는 건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야. 카메라로 하는 예술도 그 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
막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나 연못의 물결을 찍은 것들을 제외하면 시대적인 메시지가 표현된 것들이 대다수였다.
또, 이번 공모전의 작품 주제는 ‘반전’이었다.
‘상상이야 다양하게 해볼 수 있지만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얼마나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겠군.’
MMS 학원에서부터 경험해봤듯이, 작품의 주제 적합성보다 더욱 중요한 건 작가의 월등한 창작 능력이었다.
‘반전’이라는 주제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었다.
‘심사위원 평가와 온라인 투표 점수를 합산해 수상작을 결정한다라……’
마지막으로 케니 공모전 공식 사이트에 접속해 그간의 수상작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대상의 기이한 배치를 통해 절묘한 구도를 담아내고 있었다.
시각적으로 아름답거나 대비되는 사물 배치가 유의미하거나.
표현 대상들은 모두 달랐지만 그림처럼 하나의 인상을 주제로 해서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따로 작품 장르가 정해진 건 없었지만, 수상작들은 모두 사진 작품이었다.
혹시나 싶어 이전 회차의 공모전 포스터까지 꼼꼼히 확인했지만, 출품작 제한에 ‘사진’은 없었다.
설마하니 모든 사람이 사진만 출품할 리는 없었고, 상금을 생각하면 화가들이 지원하지 않을 리도 없었다.
‘사진 작품에만 차별 대우를 해주는 건가?’
그러고 보면 카메라 회사에서 광고와 병행하는 공모전이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진행하는 공모전에 홍보 효과가 없는 다른 작품에 상을 줄 이유는 없었던 것이었다.
조사해보니 공모전 지원 주체들 중에는 한국 회화미술협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전등 불빛에 비추어 아쿠아마린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빛은 아쿠아마린을 통과하면서 푸르게 조각났다.
게리의 <1만 가지의 색채>를 떠올려보았다.
색은 셀 수 없지만 게리의 작품 제목은 <1만 가지의 색채>였다.
색을 계속 쪼개고 쪼개면 1만 개보다 훨씬 많을 텐데도 말이다.
‘색은 조합과 반전을 거듭하며 무한하게 나타난다. 색채가 1만 가지나 있다면, 또 그것들이 이만큼이나 아름다운 보석이라면 그 작품의 색채는 무한이지.’
지금은 백열등 빛을 받아 파랗게 통과하고 나섰지만, 광선의 종류에 따라 아쿠아마린이 반사하고 통과시키는 빛깔은 천차만별일 터였다.
이 아쿠아마린 하나에만 1만 가지 이상의 색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 아직 출품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우선 관찰하자.’
다음 날 나는 정원에 앉아 일출 무렵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아쿠아마린 보석을 관찰했다.
어머니는 내가 사진을 편히 찍을 수 있도록 삼각대와 리모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들, 어떻게 쓰는 건지 가르쳐주세요.”
“그럴까?”
내가 부탁하자 어머니는 카메라 부품을 하나씩 지목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삼각대와 리모컨은 셔터를 누르는 동안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라고 했다.
아쿠아마린을 찍을 생각이라고 했더니 접사렌즈를 가져다주었다.
접사렌즈는 가까운 작은 물체를 찍을 쌔 사용하는 렌즈였다.
어머니의 설명대로 몇 번 사진을 찍어보니 금방 요령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기대대로 아쿠아마린은 햇빛을 받았을 때 더욱 다양한 색채를 뿜어냈다.
이대로 찍는다면 ‘반전’이라는 주제에는 제법 부합할 수 있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아직은 아쿠아마린을 활용한 보람이 없어.’
아쿠아마린.
나는 아쿠아마린에 대해 들어보았던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아쿠아마린은 바다의 색을 한 보석으로, 그 때문에 물속에 담겼을 때 유독 되찾기가 어려웠다.
대신 물 바깥에 있을 때보다는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빛을 냈다.
옛날 사람들은 바다의 힘이 아쿠아마린을 빛나게 했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곧 물을 받아와 아쿠아마린을 담가보았다.
어느새 다가와 나의 작업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디지털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곤 감탄했다.
“와! 지금 찍으면 되겠다.”
수조에 담은 아쿠아마린과 삼각대에 고정한 카메라까지.
배치는 이미 끝나 있었다.
셔터만 누르면 됐다.
뷰파인더 속 아쿠아마린의 모습은 온갖 빛으로 덮여서 원래의 색채가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게리의 <1만 가지의 색채>에 있는 모든 빛이,
지금의 뷰파인더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니었다.
“셔터를 누르는 데에 0.1초는 걸릴까요?”
“버튼을 누르는 데에는 그렇겠지만, 셔터가 깜빡이는 데에는 빠르면 4000분의 1초 정도밖에 안 걸리는 카메라도 있지.”
“그럼 하루 중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순간은 몇백만 순간쯤은 되겠네요. 왜 하필 그 순간에 셔터를 눌렀느냐. 그 이유가 없다면 아직 준비된 상태가 아닌 거예요.”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순간은 분명했다.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고, 달빛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역전의 그 순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누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찍은 아쿠아마린 사진들을 컴퓨터로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나는 캔버스에 빛을 옮겨 그리며 일몰을 기다렸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색깔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푸른 아쿠아마린에 부딪혀 부서지는 붉은 광선들이 아무래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차지하게 될 듯했다.
오레올린의 연노랑 빛에서 카드뮴 레드딥까지.
아쿠아마린 본연의 색상이 태양빛의 각도와 강도에 따라 위치를 변경하면서 색채의 자리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확신이 든다. 갈수록 붉은 빛이 더욱 잘게 부서지면서 힘을 잃고 있어. 해가 지기 시작하면 너무 진한 것은 중화되고 너무 연한 것은 깊어질 거야.’
거기 창백한 달빛이 완전히 스며들기 시작하면 그때가 셔터 타이밍이었다.
“예준아, 잠시만 이리로 와볼래?”
광선에 달빛이 섞였을 때의 빛깔을 어림해보면서 그림을 그려보던 중 어머니가 불렀다.
어머니가 보고 있던 컴퓨터 화면에는 복잡한 프로그램들이 표시돼 있었다.
“이게 뭐예요?”
“사진 편집 툴들이야. 포토샵이랑 라이트룸이라는 프로그램인데, 사진을 30분에 한 컷씩 찍으면서 색채 변화를 확인해보고 있어.”
어머니는 몇 장의 아쿠아마린 사진을 찍어 하나씩 보여주었다.
“빨간색이 가장 진한 부분을 컬러 샘플 툴로 일일이 추출해서 색을 비교하고 있었어. 일몰이 18시 50분이니까 이 변화폭이 유지된다면……”
전직 화가이기도 했던 어머니가 색채 값을 조정해서 해 질 녘 광선을 계산해냈다.
그렇게 만들어낸 색채들을 스포이트 툴로 찍어 원래의 위치에 일일이 대입하면 음영이 유지된 채 자연스럽게 편집되었다.
“와. 그럼 해 질 땐 이렇게 된다는 거죠?”
“계산은 최소한일 뿐이고, 해가 붉어지는 정도는 내가 어림해서 바꾼 거야. 각도 변화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래서 형태는 조금 다르겠지만 참고 정도는 될 거야.”
편집의 한계 때문인지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보였지만 색채는 대충 내가 생각하던 것과 엇비슷했다.
하지만 색채만큼 빛의 각도에 따른 배치도 중요했다.
이 일대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빛이 섞여들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일몰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달이 뜨기 시작할 시간이면 일대가 많이 어두울 텐데. 카메라에 담길까요?”
중요한 문제였다.
카메라에 대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해가 저물어가면서 파인더에서 확인되는 화면의 밝기가 굉장히 어두워졌다.
심지어 햇빛보다 달빛이 더 밝아지는 순간이라면……
거의 밤이나 다름없는 시간일 터였다.
내 말을 들은 어머니가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설정을 바꿨다.
“무슨 설정을 바꾸신 거예요?”
“셔터스피드와 감도를 낮춰서 노출 시간을 높였어. 이젠 사진이 찍히는 순간이 5초로 길어졌을 거야.”
어머니는 셔터를 누를 타이밍을 적어도 3초 전부터는 확신해야 한다고 했다.
빛의 미묘한 변화는 계속 일어났지만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늘은 계속 어두워져 갔다.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며 조금씩 일그러졌다.
대신 달은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해진 붉은 빛은 아쿠아마린이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대신 그 안에 숨어 있던 형형색색의 빛깔들을 골라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셔터를 눌렀다.
지금으로부터 3초 뒤엔 아쿠아마린의 표면에 맺힌 빛들이 완전한 균형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게리가 <1만 가지의 색채>에 조작해냈던 배치를 자연 속에서 얻어내는 것이었다.
“잡았다.”
나는 카메라가 연결된 어머니의 컴퓨터로 돌아가 결과물을 확인했다.
정확히 내가 예상했던 빛깔의 색채들이 뒤섞여 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원했던 대로 밝게 찍힐 줄은 몰랐는데, 어머니가 설정을 맞춰주신 덕분이었다.
‘이렇게 빛과 색채를 쉽게 조절해서 예술을 할 수 있는 기계라니. 좋은 도구네.’
나와 어머니는 사진에 있는 보석이 아쿠아마린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진만 봐서는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빛들이 모두 뒤엉켜 본연의 푸른 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빛 그 자체를 포착해낸 듯 신비롭고 화려했다.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색채의 세부적인 배치는 충분히 사실적이었다.
색이 부서지고 뒤섞이다 달빛에 색을 바꿔나가는 모습은 1만 가지의 색채와 1만 가지의 반전을 동시에 보여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과장된 인상표현을 넘어선 새로운 시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카메라를 사용해 인상을 포착해보았다는 데에만 의의를 두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형상은 인상을 담는 그릇이었다.
낮의 마지막 붉은빛은 지금의 형태보다는 조금 더 불안정하게 구불거리는 게 더 어울렸다.
아쿠아마린의 푸른 빛은 빛에 반사되어 띠는 색인지 그 본연의 색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태까지의 것 이상의 시도를 해보아야 했다.
‘진짜 반전을 선물해주마.’
나는 전송을 취소하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캔버스와 붓을 가져왔다.
남은 기간은 사흘.
사흘이면 혼신을 쏟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진 작품의 한계는 극복하고 장점은 극대화했다.
이 공모전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광고모델이었지만, 발상을 전환한 뒤부터는 시상식장에서 벌어질 일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작업을 마치고 어머니를 불렀다.
이미 12시가 지난 상태였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이제 제출하려고?”
“네.”
“아까 그게 완성본이 아니었나 본데, 어디 한 번 엄마도 구경해볼까?”
나와 어머니는 함께 작업실로 향했다.
어머니는 컴퓨터를 켜기 위해 본체를 눌렀다.
“아. 완성작 거기에 없어요.”
“응? 그럼?”
나는 작업실을 가로질러 건조장 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