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53화 (53/241)

54화. 생(生)과 사(死) (3)

게리 윈스턴의 <1만 가지의 색채>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윈스턴 크리스탈 아트 페어의 마지막 날 현장 경매로 진행하기로 했다.

‘비싼 화가’ 게리 윈스턴의 작품인 만큼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전 세계적인 큰손들이었다.

이곳에 비한다면 서울옥션의 규모는 지방 소도시의 소규모 벼룩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에잉. 제아무리 좀 벌었기로서니…… 젊은것들이 바쁘지도 않은가?’

며칠 전 윈스턴 사장의 부친상으로 인해 페어를 방문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백 마담에게야 조용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뿐이었지만, 게리로서는 곤란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윤예준의 작품이 출품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리틀마네 윤예준, 이번엔 윈스턴으로 간다. 전례 없는 중도 합류.

-윈스턴 크리스탈 페어에 출품된 윤예준의 작품. 공개는 언제쯤?

기사에서 떠드는 대로 윈스턴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페어는 회사 상품의 판매 수익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철저히 기획되어 진행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예준 덕분에 사람은 다시 붐벼 이렇게 많은 인파를 이루게 되었다.

‘지갑이 두꺼운 양반들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사업을 위한 사교 모임이라고들 떠드는 말들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윈스턴이 기획하는 건 어엿한 예술 작품 전시회였다.

예술 작품 전시, 그것도 큰손들의 메이저 경매라면 백 마담도 빠지기 섭했다.

<1만 가지의 색채>는 그녀에게도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일주일 전에 미리 와서 본 바로는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은 수작이었다.

‘무거운 재료들을 활용하면서도 그 파격에 삼켜지지 않았지. 표현에 그 정도로 숙달된 사람은 흔치 않은 법.’

오늘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전시장 안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작품은 여전히 바랜 곳 없이 빛났다.

‘볼 때마다 온 신경이 저려오는구나.’

백 마담이 미술작품을 좋아하는 건 가장 절절한 감상자였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수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위대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백 마담을 쉽게 감동시켰다.

명작 감별사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시끄러운걸. 아니.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사람들은 <1만 가지의 색채>를 두고 다른 작품 앞에 모여들어 있었다.

전시장 더 깊은 곳의 한구석이었다.

백 마담이 기억하기로 그곳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저긴가?’

오늘이 마지막 전시회였다.

당장 어제까지도 윤예준의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그 작품이 걸려 있을 터였다.

‘놓쳐도 놓쳐도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게 마치 부메랑 같구나.’

백 마담은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 섰다.

“이 그림은 도대체 뭐지? 이게 그 리틀마네의 작품이라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히든 상품으로 준비했을망정 이런 명작을 그렇게나 오래 감춰놓다니!”

“역시 리틀마네가 대단하긴 하네요.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름값 하나만으로 이만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으다니.”

“대단하기로는 윈스턴 씨도 마찬가지죠. 안 좋은 일로 많이 힘드실 텐데 이런 어마어마한 작품도 놓치지 않다니.”

그들은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모를 윈스턴을 의식하며 박수를 쳤다.

백 마담은 그들의 공치사와 아부 경쟁에 별 관심 없었다.

박수를 치는 데에 여념이 없는 그들 사이를 더욱 비집고 들어가 작품을 마주했다.

“아아……!”

<3월의 탄생>이라는 작품이었다.

아트페어에 전시된 작품들 중 가장 어두웠다.

하지만 가장 화려한 빛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어둠 속의 빛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어둠 속의 빛? 아니. 어둠 그 자체의 빛이다.’

모두에게 심미안이 있다는 말이 있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좋은 작품은 누구든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백 마담은 누구보다도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렇게나 그려진 졸렬한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 번씩은 의심해보기도 했다.

어쩌면 백 마담 본인의 안목은 유별나게 타고난 것이며, 그걸 얻기 위해서는 모두 공부라는 걸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3월의 탄생>이라는 작품은 세상 어느 바보 팔푼이라도 찬사를 보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원초적인 명작이었다.

“아, 백 마담도 오셨군요.”

작품을 감상하던 이들은 백 마담이 등장하자 곧 조용해졌다.

그녀가 뭐라고 평하는지에 따라서 그들의 소유욕이 다시 바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백 마담은 작품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예술 작품에서 활용되는 감각이란 응당 감정과도 연결되어야 했다.

감정은 감각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가장 좋은 작품이었다.

백 마담이 지금까지 봐왔던 명작들 모두 백 마담의 감정을 십분 이끌어 내는 명작들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녀를 황홀하게 했고, 어떤 작품은 그녀를 애절하게 했다.

‘이 작품은…… 갑자기 또 무어란 말인가?’

삶이란 얼마나 무감하던가.

기뻐야 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해 사람의 속이란 얼마나 말라지고 타들어가던가.

<3월의 탄생>처럼 깊은 슬픔을 표현한 작품은 요근래 본 적이 없었다.

“60대에 접어들면 시간이라는 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아십니까들?”

“글쎄요. 아직 젊은 나이이니…… 40대하고 큰 차이 없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백세시대라는 말도 다 옛말인데.”

누군가의 비즈니스용 답변에 백 마담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도 나이를 먹으면 잘 알게 될 거요. 죽기엔 한참 이른 나이이긴 하지. 하지만 이 60대라는 나이는, 죽음을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나 마찬가지예요. 젊음을 잃고 나면 남는 거라곤 죽음뿐인 법이라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의 종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어떤 위대한 종교의 종말론보다도 응급실 의사의 사망신고가 더 파괴적인 법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아쿠아마린은 죽음이라는 종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것도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을 통해서 말이다.

백 마담은 <블랑쉬 네즈>를 놓쳤던 서울에서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빼앗길 만했군. 그날의 그 여배우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테니.’

물고 놓쳐선 안 될 작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백 마담은 새삼 깨달았다.

그 순간 <3월의 탄생>은 이미 백 마담의 소유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블랑쉬 네즈>는 그 여배우에게 빼앗겼고,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은 프랑스로 가기 위해 여권을 꺼내기도 전에 기증 처리되었다.

미리 SNS로 구매 의사를 관철하는 것으로 점찍어두었는데, 바로 다음 날 기증되었다는 기사를 접한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페어에 있던 작품과 잡화들 중 팔리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비싼 가격에 팔렸지만, 기대가가 가장 높은 건 아무래도 게리 윈스턴의 <1만 가지의 색채>였다.

게리가 주도하는 전시회였고, 이미 가장 비싼 화가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3월의 탄생>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백 마담이 무조건 사겠다고 공언을 해버렸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리 낙찰 경쟁이 심하지 않았다.

상회 입찰자가 나타날 때마다 백 마담이 계속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이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만 가지의 색채>는 한화로 무려 238억 원에 팔렸다.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주는 가격이었다.

게리 치고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가격대였지만 부족함 없는 수작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트 페어의 최고가는 아니었다.

아트 페어의 최고가는 바로 윤예준의 <3월의 탄생>이었다.

[윈스턴 크리스탈 아트 페어 이벤트 작품 <3월의 탄생>, 윈스턴 작품 제치고 낙찰가 1위]

[공개 기간 없이 300억 낙찰 신화 <3월의 탄생>, 작가 누군지 보니 ‘경악’]

[윤예준 작품에 두 번 고배 마신 백마담, 윈스턴 아트 페어에서 300억에 낙찰 쾌거]

백 마담은 50억에서 100억 단위로 몰아치며 응찰자들의 기를 죽였다.

단 세 차례의 호가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300억의 기록적인 낙찰가를 예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독일의 ‘반다이크’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내의 여러 잡지사들, ‘Le monde’, ‘TF1’, 방송사 ‘텔레비지옹’까지.

미리 보도 회의라도 거친 듯 일제히 이 일에 대해 다뤘다.

한국의 ‘미,감’이나 ‘F.C코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예준의 작품이 주었던 마네적인 인상을 탈피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리틀마네로서 유독 마네의 작품과 엮여온 예준이었다.

그런 예준으로서는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 되었다.

‘영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지.’

게리는 바티뇰 거리의 일이 있은 후 예준의 작품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았다.

예준이 한국에서 그린 그림뿐만 아니라 최근에 화제가 된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까지 말이다.

크리스탈 아트 페어에 한 번 방문해봤을 뿐인데 이전의 화풍을 바로 벗어낼 만큼 모든 표현에 능한 것이었다.

게리는 백 마담과의 낙찰 거래를 끝낸 후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준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며 경매 현장에 나오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라고 했는데, 일부러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예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기사도 나오기 전이었다.

“좋은 소식과 슬픈 소식이 하나씩 있는데, 무엇부터 들으시겠습니까?”

-...... 매 먼저 맞을까요? 슬픈 소식부터 이야기해주시죠.

“슬픈 소식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입니다.”

게리의 말을 들은 예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웃었다.

-기쁜 소식은, 그게 저라는 것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백 마담께서 한화로 300억에 낙찰받으셨습니다.”

게리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화가’가 된 이후로 그 타이틀이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림으로 돈을 벌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이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면 그는 어떤 기분일 것인가?

후련할 것인가?

아니면 열등감에 치를 떨 것인가?

이번 아트 페어 결과를 통해 게리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심 안심했다.

자신이 그런 속물적인 욕망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게리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예준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좀 바쁘시군요?”

-아, 아니에요.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서 짐을 좀 싸는 중입니다.

“친구와의 약속이라는 그 일 관련해서 가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친구는 옛 명성을 버리고 언제나 자신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던 화가죠. 그게 쉽게 버리기엔 너무 큰 명성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예준은 자신의 오랜 고민에 대해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게리는 예준의 말에 ‘리틀마네’라는 별명을 버리게 되었다는 인터넷 기사들의 평을 떠올리게 되었다.

-여태까지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죠. 저도 그와 같아요. 계속 나의 것을 의심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 거침이 없을 생각이에요.

“제게 하는 충고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예준은 미술의 어떤 분야에서든 대가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화가였다.

하지만 동양화계에서도, 바티뇰의 길거리 화가 공동체에서도, 그리고 이번 크리스탈 아트 페어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내가 오랫동안 ‘가장 비싼 화가’였던 것과는 반대되는 행보야.’

게리는 예준에게 그 타이틀을 나눠주게 된 이번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술가는 타이틀이 없을 때 가장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동양화 거장, 리틀마네, 가장 비싼 화가처럼 찬란한 명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포토 페인팅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안 계신 동안 법인은…… 뭐, 담당 회계사가 테레즈니 확실하게 관리하겠군요. 아무튼 이번에 여러모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원하신다면 화가님의 다음 전시회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전시회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정확했다.

“이번에 윤 화가님께선 ‘퓌트니 비엔날레’라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자격을 얻게 되셨습니다. 새롭게 얻게 된 자격인 만큼 그곳에 출품했을 때에 가장 많은 조명을 받게 되시겠죠. 안 그래도 곧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는데. 귀국하는 김에 한번 알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출품만 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하답니까? 그리고 이제서야 얻게 된 자격이라면 자격 조건이 굉장히 깐깐한가 보네요.

“작품을 1000만 달러 이상의 금액에 팔아본 화가들만 출품할 수 있는 곳입니다. 화려한 만큼 영향력도 큰 곳이니 한번 고려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1000만 달러는 한화로 100억 원 정도 하는 금액이었다.

자격 조건 자체는 예준이 별로 좋아할 만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출품 사실만 알려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시회였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게 된 이상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작품을 내게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소식 계속 찾아보며 응원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