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생(生)과 사(死) (2)
게리가 받은 전화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평소 건강했던 게리의 아버지였다.
잔병치레야 같은 나이대의 노인들과 비슷한 정도였고, 건강상 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혈압이 상승하더니 급성 심근경색을 맞이했다.
요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계속했지만 결국 심박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게리는 크게 절망했다.
페어는 잘 유지되었지만, 사교 모임의 호스트 역할을 했던 게리가 얼마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사람들은 큰 불만을 느꼈다.
“누구나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부친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워서야. 충격이 크시겠더구나.”
민제가 말했다.
때 이른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비극적인지, 내가 스스로 죽었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그 죽음은 죽은 본인에게보다 그 주변 사람들에게 더 날카로운 법이었다.
우선 게리를 위로할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크리스탈 페어는 계속 비난받고 있나요?”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 사교 장소도 아니고, 일단은 전시회잖아. 그리고 윈스턴 님께서 장사(葬事)를 치른 즉시 다시 나오고 계시거든. 아직 마음을 다 추스르지 못하셨을 텐데, 많이 힘들어 보이더구나. 암튼 그사이에 일정이 어그러진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거야.”
크리스탈 페어에 그림을 공개하겠다고 말했을 때 게리가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약속은 약속이었고, 크리스탈 페어에 그림을 공개하는 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일단 정해졌군.’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게리가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면 그 수밖엔 없었다.
페어에 제출할 그림을 당장 그리기로 했다.
“그림 그리게?”
물감을 풀기 시작하는 내게 아버지가 물었다.
“네. 크리스탈 페어에 작품을 출품하기로 했어요.”
페어는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게리의 제안이 있었으니 늦게나마 출품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작품을 낸다는 나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수긍했다.
로돌프와 함께 한 곳이긴 했어도 나 또한 그의 작품을 받아준 적이 있었으니까.
우선 모란을 그렸다.
<환생>을 그릴 때 활용했던 꽃이었다.
여전히 잘 그려졌다.
하지만 완성시키고 보니 산 채로 멈춰 있었다.
‘게리는 여전히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곱씹고 있겠지.’
표현에는 왜곡이 없어야 했다.
감정이 왜곡 없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때 슬픔은 위로받게 되는 법이었다.
나는 검은 물감을 붓에 묻혀 모란이 마저 시들도록 도왔다.
붙잡을 수 없다면 놓아줄 수밖엔 없었으니.
“아빠. 지금 당장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버지는 군말 없이 필요한 것을 물었다.
“아쿠아마린 보석이 필요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 당장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한번 찾아볼게.”
민제는 조용히 휴대폰을 챙기며 작업실을 나섰다.
‘이 작품만 그릴 순 없지.’
내 작품을 보고 기뻐할 게리를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두운 벤치에 앉아 절망에 빠져있던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이런 선물만으로 해소될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그 슬픔을 어떻게 해소해줄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애도할 뿐이지.’
나는 새 캔버스를 꺼내, 이번엔 카네이션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라색 카네이션이었다.
프랑스에서 보라색 카네이션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상징했다.
캔버스에 묻어나는 보랏빛이 어느 때보다도 슬프고 공허해 보였다.
***
아쿠아마린.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광물이었다.
민제는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아쿠아마린을 얻어왔다.
“장피에르 지인 중에 보석상을 하시는 분이 있어서 도움 좀 받았어.”
장피에르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을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던 예준은 갑자기 보석을 구해다 달라고 했다.
민제는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기에 보석이 필요한 것인지는 당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준이 쓸데없는 부탁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예준으로부터 게리의 부친상을 전해 들었을 때 민제도 크게 당황했다.
윈스턴 관련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둔 게리였다.
그래도 크리스탈 페어에 작품을 낸다니.
아쿠아마린 값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비싼 값에 팔릴 게 뻔했다.
‘그나저나 사업가인 윈스턴 선생으로서는 특히나 힘든 시간이겠어.’
누군들 가족의 죽음을 겪었을 때 슬픔에 잠기고 싶지 않을 것인가.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했다.
다만 사업가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을 뿐이었다.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게리와 크리스탈 페어였다.
예준의 작품 정도면 평가를 반등시킬 좋은 무기가 될 것이었다.
“보석은 어때? 이 정도면 되겠지?”
예준은 말없이 아쿠아마린 보석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예준이 마주 보고 앉은 캔버스에는 죽어서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모란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환생>에 활용된 공허함이 한층 더 발전돼 있어.’
예준은 아쿠아마린을 하나 집어 조심히 화폭으로 옮겼다.
우선 접착제를 바른 다음 예준은 모란 꽃잎마다 아쿠아마린을 섬세하게 붙여나갔다.
‘아아……’
시든 모란의 원래 색감은 <환생>의 어두운 울트라마린과 비슷했다.
그러나 온통 검게만 보이던 꽃잎이 아쿠아마린을 붙일 때마다 조금씩 파란 빛깔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결국 모든 꽃잎에 보석을 붙이고 난 뒤에 빛을 쏘이자 모란에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민제는 감탄했다.
예준이 게리의 상황에 얼마나 공감해주고 있는지 그림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준이가 어떻게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알지?’
회화를 주로 했던 예준이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민제로서 의외였다.
또 회화를 활용한 조형 미술인 만큼, 조형물과 그림 사이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절묘해야 했다.
그런데 예준의 그림은 완벽히 그러했다.
주로 그림을 마네식으로 그리던 예준의 습관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영락없는 현대미술이었다.
“이 그림은 윈스턴 씨에게 주려는 거야?”
“아니요. 선물할 그림은 따로 있어요. 이건 윈스턴 크리스탈 페어에 출품하기로 약속한 거구요.”
민제는 깨달았다. 괜히 보석을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빛나는 모란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
며칠 뒤 예준이 게리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수많은 운송 인력들과 함께 말이다.
“아, 오셨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게리는 며칠 사이 굉장히 말라 있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실 게리의 아버지는 그리 일찍 돌아가신 편이 아니었다.
충분히 더 살 수도 있었지만,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른 편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구나.’
이런 일을 누구나 겪는다니.
삶이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 것이었다.
“장례식 때 한 번 뵙고 겨를이 없으실 것 같아서 그간 연락을 못 드렸는데. 걱정돼서 찾아와봤어요.”
“아, 하하하…… 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위로가 됩니다.”
게리가 감사 인사를 하자 예준이 가져온 물건을 열기 시작했다.
“뭘 가져오신 겁니까?”
“하나는 윈스턴 선생님에게 드리는 선물이고, 나머지 하나는 약속했던 물건이에요.”
게리는 선물이라고 한 물건부터 확인했다.
<헌화>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보라색 카네이션.
아버지의 죽음이 재차 실감 나 마음이 아려오면서도, 게리는 그 아름다움에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장례식 이후로 두 번째 헌화군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예준은 그 뒤 다른 물건을 개봉했다.
마찬가지로 그림이었고, 제목은 <3월의 탄생>이었다.
“이건……!”
게리는 예준과 <1만 가지의 색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술적 교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을까.
예준은 게리를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 속 예술가처럼 대화의 장에 끌어 올려주는 인물이었다.
누군가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욕하는 게리의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봐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부고 전화를 받느라고 그 대화가 일찍 끊겨버렸는데, 이 <3월의 탄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못다 나눈 예술적 교류를 마저 나누는 기분이었다.
게리의 예술세계를 근본적으로 이해받는 것도 같았다.
예준이 게리의 크리스탈 페어에 출품해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그건 게리의 작품에 수천억 대의 가격을 붙여 사주는 것보다도 더 감사한 선물이었다.
‘물감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을 보석으로 완전히 채워 넣었어.’
단순히 보석을 활용한 미술을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었다.
게리의 <1만 가지의 색채>는 색채를 가장 비싸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과 더불어 감상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더욱 부추기기 위해서였다.
보석은 빛을 쬐지 않으면 빛나지도 않는 물건이 아니던가.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쬐면 그 감정은 보석에 비쳐 더욱 강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슬픈 사람은 더 슬프게. 기쁜 사람은 더 기쁘게. 대신 더욱 아름다운 형태로.
그게 게리 작품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게리보다 색채 사용에 더욱 뛰어나야만이 할 수 있는 시도였다.
‘굉장히 공허하고…… 허망하다. 이 바닥 없는 슬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나의 슬픔인가?’
아니었다.
예준도 이러한 슬픔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봤을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표현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 작품은 크리스탈 페어를 위한 그림이겠군요.”
“네. 요즘 사람들 반응이 뜸해졌다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려봤어요.”
윤예준이라는 화가를 절대 과소평가해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로 사려 깊은 감정이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11살짜리 아이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문드러지는 감정을 겪는 걸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긴. 그렇기에 큰 주목을 받는 어린 예술가겠지. 고만고만했다면 처음부터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체면치레를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 적은 없지만, 상업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적으로 게리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항상 자신의 실력이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장르에 대해서도 오만해져선 안 되는 법이구나.’
리틀 마네로 유명했던 예준은 이 작품을 계기로 그 타이틀을 완전히 벗게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수많은 갑부들이 큰돈을 들고 모이는 곳이 바로 윈스턴 크리스탈 페어였다.
‘그들 중 슬픔을 겪어본 이가 하나라도 있다면, 이 작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달을 거야.’
<헌화>는 이미 예준에게 선물 받았다.
하지만 게리의 욕심은 <3월의 탄생>에까지 뻗쳤다.
얼마를 주고서라도 <3월의 탄생>을 구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주최하는 페어였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그림을 걸어야겠습니다.”
하지만 예준의 작품이 자신의 페어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림이 있어야 할 장소를, 게리는 알았다.
“이 작품이 마르는 즉시 바로 크리스탈 페어로 보내겠습니다. 적당한 자리를 알고 있거든요.”
크리스탈 페어가 끝나기 전에 그림은 분명 다 마를 것이었다.
적어도 마지막 일정에는 맞출 수 있겠지.
“적당한 자리라니. 그게 어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