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46화 (46/241)

시간을 거스르는 자(2)

무대인사는 배급사측 질문지에 맞춰서 진행되었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만을 다뤘다.

촬영중 에피소드나 흥행 예감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들이었다.

“아, 이걸 안 챙기셨더군요.”

무대인사가 진행중일 때 옆에 앉은 샬롯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예요?”

두 개의 안경이었다.

하나는 아버지에게 건네고 안경의 쓰임을 살피기 시작했다.

쓴 채 스크린 앞에 모여 앉아 있는 필립과 배우들을 내다보았다.

오히려 어두워보일 뿐이었다.

안경의 기능을 하는 물건 같지는 않았다.

“3D 안경입니다. 2D는 물론이고 3D, 4D까지 상영한다는 것 알고 계셨죠?”

더욱 실감나는 상영을 위해 3D 작업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촬영 장비를 두 배로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 외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숫자가 높아질수록 더 생생하다던데.

화질의 차이인가?

설명이야 백 번도 넘게 들었지만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아예 모르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네. 그렇기는 한데. 이 안경은 왜 써야 하는 거예요?”

“음······ 이따가 영화가 시작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일반 안경 치고도 무거운 편이었다.

예고편 상영회 때엔 이런 장치가 없었는데.

한편 로즈의 짧은 설명에 아버지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자, 그럼. 저희 영화. 모두가 혼신을 다했습니다. 즐겁게 시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와 아버지, 로즈도 따라 쳤다.

필립과 배우들이 나가자 상영관 불이 모두 꺼졌다.

사람들이 주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상영관은 나도 몇 번 와봤지. 어두워지면 곧 영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안경을 착용했다.

어두운 와중에 어두운 안경까지 쓰니 온통 칠흑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며 의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든 관객들의 의자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반응들은 덤덤했다.

‘이런 영화관도 있는 건가?’

의자는 조금 움직이다가 멈췄다.

편안하게 눕듯이 앉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화면도 누워서 편히 볼 수 있을 만큼 기울어졌다.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뒤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투자사 광고 끝에 ‘필립영화사’라는 로고가 나타났다.

그 로고는 허공에 뜬 채 회전했다.

마치 로고가 만져질 것만 같아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천장에서 소리없이 회전하던 로고는 갑자기 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머리를 감싸려는 그 순간.

로고는 내 얼굴에 닿기 직전에 사라졌다.

아직 채 상황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가 시작되었다.

위작 감별 장치가 나를 대상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내가 감별 대상 위작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감별기는 내 눈을 찌를 듯이 위협적으로 좌우를 왕복했다.

첫 장면이었다.

‘이게 진짜일 리는 없어. 안경 때문인가?’

안경을 벗어보았다.

상영관 내 허공에 떠서 움직이던 감별 장치는 사라지고 스크린 속의 뿌연 상만 남았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안경을 통한 착시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보였다.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진짜 같을 수가 있지?’

착시미술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런 기술은 내게 놀라움 그 자체였다.

자세히보면 그림속에 구현해낼 수도 있을 것도 같아 다시 안경을 끼고 영화에 집중했다.

어느새 스토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위작 판별 이후 위작 화가와 드잡이를 하는 남자 주인공.

그를 시작으로 인물 간 관계가 차근차근 드러났다.

‘배우란 훌륭하구나. 저 영상 안에서만큼은 영락없는 화가이자 복원가다.’

영화 속 샬롯은 굉장했다.

괜히 세계적인 배우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눈빛을 흉내냈다고 했지.’

그림을 그릴 때의 내 눈빛이 어떤지는 나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마네’이니,

내 눈빛을 흉내냈다면 이번 연기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개봉 1일차가 지난 뒤 영화사 직원들은 모두 기쁨에 젖었다.

영화관마다 모두 매진이었던데다 1일차 관람객들의 평가도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영화 흥행 지표 중에서도 단연 탑이었다.

“첫날 수익만 4억 달러 정도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필립에게 보고하는 샬롯의 목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전작의 무려 5배였다.

“오······”

필립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얼굴을 감쌌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이상······ 영화사에 한 획을 긋게 되겠군.”

“개봉 직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게 바로 관람객 평가이지 않습니까? 그게 가장 결정적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오늘 이미 나왔습니다. 시사회에서도 평론가들은 호평 일색이었고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샬롯이 영화 리뷰 페이지를 표시한 태블릿을 필립에게 건넸다.

-감독도 천재, 샬롯도 천재, 윤예준도 천재. 영화관에서 천재가 아닌 건 4D안경 끼고 침 흘리는 나뿐이었다.

-4D로 보신 분들 2D로 다시 보세요. <식물원에서> 나오는 장면은 2D가 진국입니다.

-영화 아무리 봐도 모작 표식 같은 건 없던데? 내 시력이 안 좋은 건가?

-시력보다 지능을 먼저 의심하셔야 할 듯.

이미 영화에 대한 예술적인 평가는 평론가들에게 다 받아놓은 상태였다.

[현대와 고전의 문제작들을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대가의 역작.]

[고전의 현대화. 판타지의 후경화, 철학의 서사화. 누가 예술의 상업화를 욕했는가.]

예술영화를 원하는 이들도, 상업영화를 즐기는 이들도 필립의 영화를 고평가하고 있었다.

예준 덕분이었다.

필립은 샬롯에게 전화를 걸었다.

샬롯은 금방 받았다.

“오. 스케줄이 없나? 금방 받는군.”

-웬만한 영화 같았으면 홍보하겠답시고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방송사 오갔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잘 나가는 놈한테 고양이 손 빌려주겠다고 나서는 꼴이죠. 며칠간은 쉬려구요.

샬롯에 대해서는 두 번째 인생 캐릭터가 생겼다는 영광스러운 관람객 평가도 있었다.

완전히 예술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화 롱런이 확정되는 시점까지 신비주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림은 마지막 붓질이 있기 전까지는 똑같이 미완성이지.”

-맞아요.

이번 영화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였다.

“나도 혼신을 쏟았고, 자네 연기도 마찬가지였어. 고증을 위해 소품팀도 최선을 다했다. 모두 자신의 역량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것만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은 아마 없었을 거야.”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졌을 때부터 해왔던 생각이었다.

필립은 프랑스 영화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장이자 명인이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벗어난 지금으로서는 기존의 명성을 그대로 등에 업을 수 없었다.

<미드나잇 파리스> 시리즈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아직 자리를 잡은 수준은 아니었다.

필립을 재평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평론가들이 아직 많았으니 말이다.

“모두가 혼신을 쏟은 이 영화에 대한 마지막 붓질은······ 바로 윤예준을 소개한 자네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아.”

여차하면 기존의 모작 작품들 중 하나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계속 샬롯을 바보 취급하고 한국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전 시리즈의 흥행이 무색해질 만큼의 큰 적자를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필립은 샬롯과의 전화를 끊은 뒤 예준의 번호를 입력했다.

-네, 감독님! 무슨 일이세요?

주변이 시끄러웠다.

언론에서 말하는 대로 르콩슐라라는 곳에 가 있는 듯했다.

“영화 개봉하고 지금 하루가 끝났는데,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화가님 덕분입니다.”

-에이. 감사도 죄송도 서로 할 필요 없죠. 서로 잘 된 일이잖아요.

“네, 그럼······ 영화 내릴 때까지 계속 힘내보죠. 지금 아트 전시회장 공사도 완전히 마무리된 상태이니. 거기서 또 뵙게 되겠군요.”

*

영화가 개봉된 지 벌써 일주일차였다.

바티뇰 거리 관련 방송 인터뷰와 더불어 영화 흥행까지.

제법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영화에서 받은 영감을 그리느라 호텔방 안에서만 지내서 유명세를 피부로 느낄 틈이 없었다.

그래서 아트 전시회에 방문했을 때는 예상치 못한 관심들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 윤예준씨 맞으시죠?”

일반적인 미술관보다는 분위기가 소란스러운 편이었다.

한 관람객이 내게 다가오며 묻자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를 보고 아트 전시회까지 왔다면 나를 필시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었다.

“진짜네! 싸인 좀 해주세요!”

그림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내게 종이를 건네며 싸인을 요구했다.

텔레비전을 보면 굉장히 유명한 연예인들이 이런 일들을 겪던데.

나도 꽤 유명 연예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사람들이 내 손에 싸인펜을 쥐어주었다.

나의 그림 우하단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싸인을 해주자 사람들은 그림과 비교하며 더욱 좋아했다.

‘한글 서체는 아직 서툴러서 어색할 텐데. 좋아해주니 기쁘군.’

모두 한글을 모르는 프랑스인들이기는 했다.

아트 전시회는 영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기 좋은 곳이었다.

영화의 스토리보드, 극본, 여러 시안의 포스터도 전시되었다.

영화 세트장을 축소시켜 놓은 모형이나 극중 캐릭터의 고스튬까지.

선물가게는 전시장 출구쪽에 있다는데, 이미 전시장 상품만 해도 온갖 가지였다.

영화 스틸컷 사진집에서는 사복차림의 배우들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차량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내 그림이 포스터 디자인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배우 관련 상품들에 좀 더 힘을 주었다고 했다.

전시회장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나의 그림 세 점이 한눈에 보였다.

세트장에서 그린 그림에는 <세트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작품 소개란에 적혀 있는 일화를 본 관람객들은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왔다.

“이게 메인 포스터라서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 그림이 가장 많이 나오잖아요. <시간을 거스르는 자>라는 단어를 들어도 다들 이 이미지 먼저 생각할 걸요?”

관람객 중 한 명이 내 그림의 가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기 <식물원에서> 작품 설명 보면 ‘윤예준만의 모작 표식을 찾아보세요.’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 맞죠?”

그는 영 엉뚱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오답에 반발한 다른 관람객들은 이제 <식물원에서> 모작으로 달려들어 표식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관람객들의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장소를 옮기려고 할 때였다.

“윤화가님.”

나를 발견한 로즈가 조용히 불렀다.

그녀는 내부 트레일러 상영회때 스케치했던 <식물원에서> 발전작 앞에 서 있었다.

“그 그림 어떠세요? 아직 아무한테도 평을 못들었는데.”

로즈는 팔짱을 끼며 작품을 유심히 보았다.

“저는 감상 자체는 되도록 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전시회의 기획자이기도 하니까요. 관람객들의 감상이 제일 중요하죠.”

로즈는 무뚝뚝한 척했지만 작품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

“관람객들 반응은 어떤 것 같으신데요?”

“저 두 작품들은 그들을 만족시키고 있고, 이 작품은 그들을 흥분시키고 있어요. 모든 그림들을 확인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건 오로지 이 작품 덕분이죠.”

그제야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에 있는 그림들이랑 분위기가 영 딴판인 게 의외다.”

“의외긴? 바티뇰 예술가들 싹 불러모은 사람인데. 한 장르만 할 리가 없잖아?”

로즈는 그들이 작품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한 걸음 물러섰다.

구도와 인물, 배경을 유지하고 최대한 현대적인 것들을 활용한 그림이었다.

그에 대해 참고할 만한 감상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참인데, 이번 기회에 들어볼 수 있어 잘 된 일이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사전예매율은 현장 예매로 모두 채워지고 있어요. 그 덕에 일주일만에 수익 14억 달러······ 전시회가 성행하고 있는 걸 보면 쉽게 꺾일 기록 같지는 않습니다.”

로즈는 그림 보랴 돈 생각하랴 매우 바빠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로즈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네? 왜요?”

“그걸 깜빡할 뻔했네요. 따라오시죠.”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