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스르는 자
두 번째 영화사 방문은 영화가 완성된 뒤였다.
이번엔 메인 트레일러 상영이었다.
상영실엔 나와 필립, 로즈뿐만 아니라 투자자와 배급사 직원까지 모여 있었다.
영화사 직원들만 있었던 지난번 상영회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였다.
여러 버전의 예고편을 하나씩 감상했다.
첫 상영회 때 느꼈던 감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미 영화를 한 편 다 본 것만 같았다.
영상이 끝나고 조명이 켜졌을 땐 투자자들이 필립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정도면 모든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어요!”
“역시 필립 감독이십니다.”
찬사를 들은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로즈는 상영관을 오가며 완성된 영화 포스터를 나눠주었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대로 나의 세트장 그림이 삽입되어 있었다.
“서사 진행의 주축이 되는 건 바로 여자 주인공의 모작 작품이었습니다. 방금 나눠드린 포스터에 있는 그림부터 영화 본편에서 등장하는 <식물원에서> 모작을 그린 윤예준 화가님의 공이 큽니다.”
투자자들은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로즈에 의하면 모작에 표식을 했다는 감독 인터뷰 직후 엄청난 관심이 쏠렸다고 했다.
그때 투자자들이 직접 영화사에 찾아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배급사에서도 힘을 받아 상영관을 늘렸고 더욱 저돌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그 그림 덕분에 지금 사전예매율이 굉장히 기록적입니다. 역시 예술 작품은 혼신을 기울여야 관객들도 알아주는 법이라니까요?”
“맞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윤예준 화가!”
그들이 더 큰 박수를 보내왔다.
그 동안 필립은 상영관 앞으로 나서서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전에 말씀드린 바 있던 콘셉트 아트 원화 전시회 일정을 조금 조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작품 자체에 굉장히 자신감이 있는 상태이고, 실제로 언론의 관심이 뜨겁기 때문에 영화와 아트 전시회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원래는 영화 예매율이 저물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상영 한 달 차부터 전시회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는 그 일정을 개봉 직후 일주일로 과감하게 앞당겼다.
물론 영화가 흥행한 뒤에야 전시회를 제안하는 형식이었지만, 흥행이 기정 사실화 되어 있는 지금 시점에서 미리 준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 굉장히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윤예준 화가의 작품을 메인으로 해서 전시회를 진행할 겁니다. 우선 그 그림들에 대한 저작권으로 원작자에게 5만 달러를 정산하고 전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시회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미술품 복원’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미술품 복원가인 만큼 전시회에서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말이었다.
“전시장에 복원실이 있는 거예요?”
내가 묻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예준 화가님의 <식물원에서>를 감정했던 CEEA엔 복원가들도 많습니다. 그들이 기술적 자문과 복원 장비, 그리고 전문 복원가들을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복원실처럼 꾸미면 관람객들은 복원 현장을 통유리 너머로 볼 수 있습니다.”
“그거 정말 유익하겠군요. 그런데 조금 대중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그냥 CEEA의 체험관처럼 느껴지면 어떡합니까?”
배급사에서 묻자 필립은 또 나를 보았다.
“지금 유럽 예술계에서 가장 핫한 스타가 바로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싸인을 받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리곤 스크린 앞의 단상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윤예준 화가님. 한 번만 더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무슨 요청을 해올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할 수 있었다.
“영화가 잘 되기 위한 일이라면야. 뭐든 해야죠.”
내가 유럽에 처음 이름을 알린 건 <블랑쉬 네즈>를 통해서였다.
그 후부터 필립의 섭외를 받을 당시까지는 유럽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긴 했지만 아직 미지의 인물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예술의 거리 부흥 전시회를 통해 필립의 말처럼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었다.
“전시회에서 기대해봐도 될까요?”
필립은 어느때보다도 정중하게 물었다.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촬영 일정을 무리하게 미루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이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 일환일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복원작업은 해본 적 없었지만 <시간을 거스르는 자> 속 복원가 주인공은 빈 캔버스에 복원을 완료했다.
나도 <식물원에서>를 100%로 다시 그려낼 수 있으니 복원도 가능할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관람객을 직접 만날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
예준과 민제가 프랑스로 떠나고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연희와 현재가 매일같이 현장에 나와 관리한 끝에 공사는 완료되었다.
최종 설비 검토에 나선 현재는 배수로와 근처 전선 케이블까지 꼼꼼히 살폈다.
아예 유령마을까지는 아니라고 하나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곳이었다.
한번은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아 전력공사에까지 연락을 취해야 하기도 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내부 디자인이야 직접 하셨지만요.”
현재는 집을 둘러보는 연희에게 물었다.
현재 자신도 시공사에게 공사를 떠넘기고 나몰라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발견되지 않은 설계상의 하자는 없는지, 설계대로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지를 매일같이 와서 확인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완벽한 집이에요.”
감격한 연희의 목울대가 경련했다.
울음을 참는 목소리였다.
“분수라니. 사는 데에도 분수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잖아요. 구성원 수가 같아도 누구는 대저택, 누구는 15평 빌라······”
집이 다 지어진 뒤 만족해 하는 고객들을 보는 것이 현재의 최고 즐거움이었다.
좋은 집을 가지고 싶다는 꿈은 누구에게나 간절했지만, 쉽게 넘보지 않는 꿈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연희처럼 감격에 젖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분수라······ 어쩌면 내 일도 모든 이를 위한 건축은 아니었겠군.’
현재의 집은 가격이 비쌌다.
뒤늦게 반성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원래 섭외되어 있던 실내 디자이너가 있었습니다.”
“네? 없었던 거 아니에요?”
있었다.
이미 디자이너에게 연락까지 마쳐 놓은 상태였고, 연희에게 참여 의사를 들은 이후에도 오래 유예해두고 있었다.
조금 해보다가 어려움을 느끼고 그녀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업실을 구상하는 연희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결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작업실을 임의로 세 구역으로 남아 각각의 포인트를 살려 디자인했다.
그림을 그릴 때 남편과 아들이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봐두었다가 디자인에 반영한 것이었다.
이 집의 실내 디자인에 참여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희였다.
“디자이너야 있었죠. 있었는데 허연희님으로 바꾼 겁니다. 이 집안의 어디든 허연희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모든 게 허연희님의 머릿속에서, 감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분수에 맞지 않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연희가 작업하는 모습은 단지 디자이너를 결정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 아니었다.
현재 본인의 건축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이만큼 사려깊은 디자인을 해왔다고 스스로 평가하기엔 양심이 조금 찔린다.’
감각건축이라는 철학 하나로 이 일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현재가 생각한 감각의 주체는 ‘사람’이었다.
연희처럼 특수한 ‘개인’의 감각에 집중해본 적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삽화와 벽화를 주로 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의 재능은 그뿐만이 아니야.’
현재는 물을 틀어보고 있는 연희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장애인 공공 시설 프로젝트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에도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저야 뭐, 좋죠. 삽화를 시도하실 생각인가봐요?”
연희는 일전에 장애인 관련 삽화도 맡아본 적이 있다고 어필했다.
“아니요. 이번에 실내 디자이너로 참여하신 것 아닙니까? 저희 건축사에서 아예 설계작업부터 함께해주실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네······?”
연희는 환히 웃었다.
“너무 좋죠! 그거 언제부터인가요?”
*
그렇게 <시간을 거스르는 자>의 첫 개봉일을 맞았다.
필립과 배우들의 무대 인사 일정이 잡혀 있어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상영관이라고 했다.
필립은 우리에게 영화표를 두 장 보내주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무대인사가 진행된다고 했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에 맞춰 영화관으로 출발했다.
“첫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네. 저 사람들 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 보러 온 거겠지?”
아버지가 영화관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예매 발권을 위한 줄이었다.
우리는 이미 필립에게 영화표를 받았기 때문에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시사회를 제외하면 오늘이 첫 공개일이었다.
사람들은 오늘 필립과 나의 성과물을 처음 알게 되는 것이었다.
미리 완성된 작품을 감상한 영화인들이 추천사를 장황하게 써주었기 때문에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 있었다.
“오, 예준!”
난데없이 들려오는 샬롯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한 SUV 차량에서 필립과 샬롯을 포함한 배우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발권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예고편에서 봤던 배우들도 몇몇 보였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 그들도 충분히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이런. 우선 들어가야겠네. 화가님, 윤민제님, 따라오시죠.”
필립은 사람들의 반응에 친절하게 호응해주며 영화관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영관만 들어차 있을 줄 알았던 영화관에는 관계자 대기실이 넓직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어리둥절했지만 필립 일행은 몇 번 와본 듯 굴었다.
대기실로 들어온 즉시 샬롯은 내게 비쥬를 해왔다.
“최근에 촬영 일정이 아주 살인적이라서 바빴어요. 그래도 화가님이 더 바쁜 것 같던데요? 언론사마다 온통 화가님 이야기만 하고 있죠.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나보다도 더 언급이 잦으니 원······ 잘 지내셨어요?”
샬롯의 말에 필립이 헛기침을 했다.
필립의 반응쯤은 별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네, 즐겁게 지내고 있죠. 어차피 뭐 그리는 게 제 일인데요. 아, 그러고 보니까 <블랑쉬 네즈>는 잘 있나요?”
“당연하죠! <블랑쉬 네즈>에 어울리게 집 인테리어도 완전히 바꾸고 있어요. 힘든 일정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오직 그 그림만 보면서 힐링하는걸요. 화재 대책부터 도난 대책까지 완벽하게 설계하고 있죠.”
“하하하. 사라지면 제가 똑같이 그려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안절부절하지는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샬롯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그려준 그림도 똑같이 훌륭하겠지만, 전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좋아요. 서울옥션에서 그 순간 만나게 된 바로 그 <블랑쉬 네즈>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걸요.”
내 그림을 샬롯만큼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작품이 그녀에게 팔린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샬롯의 관람객이 될 차례였다.
“저야 연기는 잘 모르지만 예고편이 엄청 느낌 있더라구요. 좋게 봤어요.”
“화가님의 눈빛을 생각하면서 흉내냈어요. 좋게 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내가 눈빛을 보여준 적이 있던지를 돌이켜보았다.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든 봤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블랑쉬 네즈>가 낙찰되던 순간 자신의 눈빛을 내가 봤다는 걸 그녀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자. 일단 들어가죠. 이러다 늦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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