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43화 (43/241)

가장 비싼 화가

*

전시회의 여파 덕분인지 예술가들은 여전히 바티뇰 거리에 모여 자신들만의 예술 활동을 계속했다.

센느 강변처럼 거리 화방도 몇 군데 생겼다.

이 거리 전체를 되살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의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을 보러 사람들이 무리하게 모여드는 일은 줄었다.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은 이제 거리에서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쌍의 중년 남녀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였다.

둘 다 잘 다듬어진 금발이 눈을 사로잡는 이들이었다.

‘뭐지? 유명한 사람인가?’

그들은 카운터를 들르지 않고 바로 나의 그림 앞으로 사서 섰다.

그리고 말없이 오랫동안 그림을 감상했다.

전에는 그러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정말······ 정말 대단하군······”

남자는 붉어진 눈으로 카페를 두리번거리다 다급히 카운터로 다가왔다.

“아, 주문을 해야겠군. 홍차를 좀 주시겠습니까? 다즐링으로 두 잔.”

그리고 그들은 홍차를 기다리는 동안 목로 앞에 앉아 계속 그림만 보았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던 아버지가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저 남자 엄청 유명한 사람이야, 예준아.”

“네? 누군데요?”

‘윈스턴(Winston)’이라는 명품 브랜드의 회장 ‘게리 윈스턴’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만드는 액세서리들도 초고가를 자랑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도 굉장히 비싸게 거래되었다.

“그러니까 디자이너 겸 화가인 거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저 사람만큼 그림을 비싸게 파는 사람도 없을 거다.”

아버지는 어떤 그림이든 ‘게리 윈스턴’이라는 서명만 있으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질 것이라고 과장했다.

‘가장 그림을 비싸게 파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현대 예술계의 제일 거장이 아닌가?

그는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꼭 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마침 그가 로돌프가 나를 가리켰고, 게리가 돌아보아 눈을 마주쳤다.

둘이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오······! 뉴스에서 뵙던 그 분이군. 반갑습니다. 저는 게리 윈스턴, 이쪽은 저의 회계사 테레즈입니다.”

남자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 테레즈가 아는 척을 해왔다.

“윤예준입니다. 아까 제 그림을 유심히 보시는 걸 봤어요.”

“예. 소문에 과장이 단 하나도 없더군요. 보는 것만도 조심스러워지는 명작입니다. 존경합니다.”

게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림을 보았다.

“참······ 쓸쓸한 그림입니다.”

쓸쓸하다는 감평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저렇게나 많은 사람이 붐비는 현장이었다.

설마하니 교류하던 화가들로부터 140년이나 건너뛰어온 나의 심정을 이해하는 건 아닐 테고.

‘미술은 산문이 아니니. 사람마다 감상이 다를 수밖에.’

앞서 눈시울을 붉힌 이유가 궁금했지만 무례하게 질문할 수가 없어 우선 넘어가기로 했다.

“테레즈. 여기 화가님께 그림을 좀 전달해주게.”

테레즈는 게리의 말에 간결하게 대답한 뒤 카페를 나섰다.

그리곤 잠시 후 작은 그림 한 점을 들고 들어왔다.

아직 액자에 들어가지 않은 캔버스 통째로 말이다.

“이게 뭡니까?”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혹시나 화가님을 뵙게 되면 보여드리고 싶어 챙겨놨는데, 이렇게 바로 기회가 찾아왔네요.”

모서리 길이가 50cm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그림이었다.

내가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게리의 그림은 추상미술이었다.

노란 색채가 불규칙하게 캔버스를 덮고 있었다.

그것이 채우지 않은 빈 공간에서 연한 초록빛이 조금씩 확인되었다.

우선 녹색으로 캔버스를 채운 다음 노란 물감을 사용한 것이었다.

착각이겠지만 노란 빛은 볼수록 약해졌고, 초록빛은 볼수록 세를 떨쳤다.

“이라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대의 표현이든 인상주의 작품이든 직관적으로 감상할 필요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추상 미술처럼 특별한 상(像)이 없는 그림들은 더욱더 그랬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노란 감각은 알게모르게 자신의 공백을 응시하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 녹색 빛의 공백을 말이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뭐지?’

살아남는다는 의미의 제목.

그러면서도 계속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게리.

정지한 채로도 계속 작아져야만 하는 그의 삶.

나는 게리의 눈을 마주보았다.

‘전시회에서 처음 봤던 이일섭의 눈빛과 비슷하다.’

그건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예술가의 눈이었다.

적어도 그가 벌어들이는 돈이 예술가로서의 본인을 기쁘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윈스턴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시군요.”

형상이 사라지고 감각만이 남은 추상주의였다.

어쩌면 추상 미술의 구체적인 상은 화가 본인에게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림이라는 건 화가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거잖아요.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훌륭하고 선생님 본인도 더욱 빛나게 하네요.”

게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례적인 감사 인사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본 감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 일을 정작 본인께선 별로 즐기지 못하고 계시군요.”

“예? 그래 보입니까?”

“이 퍼머넌트 옐로우가 뭉친 부분은 동일한 톤의 갈색빛을 띠고 있어요. 마치 녹슨 철판처럼 말입니다. 그림의 첫인상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그 갈색빛이 시선을 잡아끈 뒤부터는 외려 섬뜩하기도 해요.”

노랑과 초록이 겹친 부분에는 아예 붉은 빛이 감돌고 있기도 했다.

“작품에 비싼 가격표를 달고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으신가 봅니다.”

‘가장 비싼 화가’라는 타이틀과 게리의 눈빛.

자신이 팔고 있는 고급 쥬얼리와 어울리지 않는 단출한 그의 인상.

그는 분명히 돈 말고 예술 자체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듣던 게리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기 직전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체면을 지켰다.

“화가님이 지금 짐작하고 계신 바가 모두 맞습니다.”

그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

“저는 원래 포토 페인팅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였습니다.”

포토 페인팅이란 우선 사진을 찍은 후 그 위에 색채를 덧칠하는 기법의 그림이라고 했다.

우선 사진으로 대상을 포착해 캔버스에 옮긴 뒤 거기 물감을 칠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 화가의 눈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과거 게리의 카메라였다.

“그것과 관련성이 밀접한 추상화도 종종 그렸는데, 추상화 치고도 화풍이 색다르다며 굉장히 높은 가격에 팔리더군요. 물론 포토 페인터로서 이름을 먼저 알린 것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작품을 그리 비싸게 팔지 못했습니다.”

게리가 추측하는 성공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추상화가 유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윈스턴을 창업한 이후로는 작품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자신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기 시작하면 한편으로 부담감을 느낀다고 하던데, 제겐 그런 게 없었지요. 처음엔 그 사실이 제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가장 작품 활동이 활발했을 정도니까요.”

처음 하고 싶었던 그림이 추상화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큰 인정을 받게 되면 원래의 화풍은 쉽게 시도할 수 없어지는 법이었다.

나는 게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사업가 하나가 제 작품을 상당히 비싸게 사간 일이 있었습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이었죠. 그림 속에 담은 의미를 모두 파악해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 그에게 물었죠. 무엇을 느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게리가 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그저 ‘윈스턴’이라는 사인만 보고 산 것이었습니다. 그림의 의미나 가치, 화가인 저의 예술적 고민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더군요. 어떤 그림을 그리든 싸인만 하면 그저 비싸게 팔리게 되었으니 혹자는 좋을 법도 했지만······ 저는 사업이 아니라 예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제야 나의 예술이 사업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게리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을 힐끗 보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당시의 게리는 금전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진정한 미술을 해볼 셈이었다.

‘작품의 노란빛이 갈수록 초라해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군.’

상업 미술의 속물성으로부터 살아남고 싶었지만 아무리 덧그려도 흔적을 지울 수 없는 녹색 결핍.

스스로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자신만의 예술적 빈곤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 작품이 저의 마지막 추상화입니다. 혼신을 다한 작품이지만······ 이후부터는 다시 포토 페인팅을 하며 초심을 찾을 생각입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낙선되었을 때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비너스가 아닌 나체의 여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외설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의도한 것이 포르노그래피였다면 기뻐할 일이었을 것이었다.

게리가 오직 팔기 위해 그렸다면, 그는 그 미국인 사업가에 오히려 고마워했을 것이었다.

화가의 의도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림이 의도와는 정반대로 향유되는 걸 지켜보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던가.

“당신을 이해합니다, 윈스턴 선생님.”

게리를 안고 다독여줬다.

그는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이 장소 참으로 묘하군요. 이게 몇십 년만에 흘려보는 눈물인지.”

“여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이 그림도 기증을 하러 온 것이지요?”

게리는 다시 포토 페인팅을 시도해보던 중 예준과 길거리 전시회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그는 전시회에도 방문했고, 거리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나의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무명 화가들이 거리를 장식하는 모습을 보며 큰 용기를 얻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제 추상화를 믿어주시는 겁니까?”

“이곳은 그림에 값을 매기는 곳이 아니에요. 화가 본인만 믿으신다면 누가 감히 거부하겠습니까? 기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문득 떠올라 덧붙였다.

“그리고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은 북적한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저기 결핍 없는 화가는 한 명도 없고, 사장님도 충분히 들어가실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쓸쓸해하십니까?”

나의 그림을 다시 본 게리는 황홀한 듯 웃었다.

처음 그림 기증 의사를 밝혔던 무명 화가의 눈물이 떠올랐다.

유명세와 재력은 화가를 바꾸지 못하는 법이었다.

“기증작들은······ 어디에 보관하고 계십니까?”

“근처 상인들의 창고를 빌리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보관 장소를 꾸리는 게 급선무이기는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로돌프가 묻자 게리는 벌떡 일어났다.

“작품들을 그렇게 보관해선 안 되죠. 보관 장소 마련부터 예술의 거리 부흥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원하겠습니다.”

테레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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