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2)
*
잠시 점심 휴식 시간을 맞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장피에르는 뜻밖의 영상을 발견했다.
“뭐야, 이거! 예준이 아니야?”
영상은 한 카페 앞 노상에서 흑발의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체구로 보나 머리색으로 보나 예준이 확실해보였다.
무엇보다도 빠른 붓놀림.
그것은 일전에 센느강에서 보았던 예준의 움직임과 똑같았다.
이윽고 SNS 게시글에 정확히 리틀마네라는 별명이 언급되어 있다는 걸 확인했다.
[몽마르뜨 화가 작업 수준]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에 댓글이 수천, 수만 개씩은 달려 있었다.
-마네 그림 그린 윤예준? 몽마르뜨 놀러 갔다가 홀린 듯이 찍음······
-몽마르뜨 어딘데? 저기 어디임?
-거기 보면 르 콩슐라라는 카페가 있는데, 저 그림은 지금 거기 걸려 있음
-집 근처라서 바로 가봤는데 줄 서서 겨우 봤다. 힘들다.
영상 속 분위기는 거의 콘서트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준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는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다가가 그림을 가리키며 저들끼리 수많은 의견들을 나눴다.
그들이 그림을 가리킬 때마다 장피에르는 심장이 몇 번은 주저앉는 것 같았다.
‘저거 저러다가 망가지겠는데!’
다른 게시물의 사진에서는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그림을 가게 내부에 걸어두며 손님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윤예준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는 것 같았다.
장피에르는 바로 차키를 챙겨 몽마르뜨로 출발했다.
‘그림마다 대박이었다. 아무리 잘 그린다고는 해도, 다음에 다시 그릴 수 있다고는 해도 저렇게 방치해두면 안 되지.’
최근에 예준은 그림을 팔아 한국 돈으로 30억을 받았다고 했다.
필립의 영화도 말만 예술영화지 온갖 영화관에서 상영될 것이었다.
그런 예준이 그린 그림이었다.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그림을 훼손할 수도 있었고, 도둑맞을 확률도 컸다.
‘파리에서 오래 일한 내가 도와야 해.’
그 참에 실물을 보고 싶다는 사심도 있기는 했다.
몽마르뜨에 도착하자마자 장피에르는 숨이 막힐 정도의 인파를 맞닥뜨렸다.
‘뭐야. 여기 몽마르뜨 맞아?’
풍경은 여전했지만 사람이 붐볐다.
종종 와볼 때마다 나이대가 있는 사람들이 주류였지만 지금은 젊은이들도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었다.
르콩슐라 방향으로 달리다가 마치 집회를 하듯 카페를 마주보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거 뭡니까? 음료수 대기 줄이에요?”
“음료수를 마실 거면 ‘알렉스 커피’로 가쇼.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을 보러 오신 거면 르콩슐라 쪽을 보시고.”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
SNS상에서 이야기하기로는 그것이 예준의 그림에 붙은 제목이었다.
그 행인이 충고한대로 카페 쪽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림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분명한 위치도 알기 어려웠다.
마침내 몸을 밀어넣으며 카페에 접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 걸음을 옮기는 데에도 체력이 상당히 소모되었다.
그렇게 발코니 앞까지 도착한 뒤에야 예준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SNS 사진으로 한 번 보고 오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 떠들썩한 분위기만 넘겨 들어오거나 사진이 지나치게 흔들려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예준의 그림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벽의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살롱전의 마네의 그림이 딱 저랬겠군.’
그 의미는 달랐겠지만, 리틀마네라는 별명과 어울려 참 기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었다.
낯익은 19세기 거장 화가들이 비좁은 곳에서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았을 법도 한데, 그림의 느낌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거리 화가 신분이었던 이들의 공동체와 성장이 표현되어 있는 듯했다.
‘그래······ 내가 깜빡 했군.’
예준은 똑똑한 아이였다.
그림을 비싸게 팔아보았고, 미술계를 놀라게 할 모작을 만들어내는 경험도 했다.
그런 아이가 이곳에 그림을 걸어놨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과 이곳 르콩슐라의 풍경을 보면 참 잘된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한 걱정으로 유난을 떨었군.’
<카페 게르부아의 일상>을 전시하기에
르콩슐라만한 미술관은 또 없을 듯했다.
*
항상 술잔을 기울이며 예술에 대해 논하던 이들이 지금은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고개만 푹 숙인 채 말이다.
“이야······ 여기 표시되는 이 숫자만큼 사람들이 봤다는 뜻이라고?”
“그래. 600만이라고 적혀 있지? 그럼 600만명이 봤다는 거야.”
“그럼 파리 사람의 절반이 봤다는 거네?”
바로 예준이 그림을 그릴 때 당시에 예술가들이 찍어 올린 영상들 때문이었다.
“사람 참 답답하긴. 이 영상은 600만. 그 아래는 350만. 또 그 아래랑 아래까지. 이 정도면 파리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다 봤다는 뜻이지. 눈 안 달린 사람은 소문이라도 들어본 정도라고.”
카페로 몰려든 사람만 해도 그랬다.
어릴적 68혁명 때에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 싶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든 사람들은 오직 예준의 그림이 걸려 있는 한 지점만 쳐다보았다.
한 번 들어오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 뒷문이라도 뚫어놔야 할 판이었다.
“이렇게 단골집을 빼앗기는 건가?”
“자네들은 단골집인가? 나한테는 몇 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업인데.”
“성행하고 좋지.”
어차피 음료를 팔기 위해 운영하는 카페는 아니기 때문에 우스갯소리였지만, 인파에 못 이겨 테이블까지 빼야 했던 건 조금 큰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로돌프로서도 손님들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도 예준이 완성한 그림을 처음 봤을 땐 감격의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몽마르뜨의 옛 풍경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손님들이나 로돌프나 마찬가지였다.
없는 풍경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만큼 예준의 실력이 뛰어난 것이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손님들은 조금씩 자리를 떴다.
“이제야 술 마실 여유가 생겼군. 리틀마네 선생은 아직 화방에 숨어계신가?”
로돌프가 화방 문을 두드리자 예준이 걸어나왔다.
“와. 역시 이 안에서 그리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그리는 게 훨씬 좋네요.”
며칠째 이런 식이었다.
다행인 건 모두가 르콩슐라만의 질서를 잘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이 훼손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남은 손님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예준에게는 이번에도 차를 하나 우려서 가져다주었다.
“아이고야. 이쯤 되니 사람이 좀 뜸해지는구나. 여기 장사 언제까지 해요?”
한 젊은이가 카페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 오래하겠구나.”
로돌프가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젊은이는 테이블마다 놓인 술잔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메고 있는 가방이 여행용 가방은 아니었다.
무언가 직업적인 사유로 이곳에 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오. 화제의 인물 윤예준 화가님도 여기 계시군요. 역시.”
젊은이는 예준의 근처에 다가가 앉았다.
그림을 보며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한 젊은이에게 결국 무슨 일로 찾아오셨느냐고 물었다.
“솔직히 기자예요. SNS 보고 찾아왔죠. 그래도 기자들은 별로 안 왔을 텐데. 좀 얘기 나눠봐도 되죠?”
로돌프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준이 결정할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좋아요.”
예준은 기자들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예준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한국에서도 유명해 사진마다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데.
웬만큼 정신력이 강한 아이가 아니라면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었다.
“다들 장피에르 웹 사설 보셨어요?”
장피에르라면 유명 경매사였다.
그 이름을 들은 예준이 놀라 물었다.
“피에르 아저씨를 아세요?”
“네? 아아, 저 미술품 경매 잡지 기자예요. 보통 사람들은 장피에르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죠. 유럽에서 활동하는 화가들한테도 유명한 사람인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저 작품을 보고 가셨는지 굉장히 극찬을 했다는 거예요.”
장피에르가 아니라 프랑스 대통령이 왔어도 못알아볼 현장이었다.
“여태 직접 취급한 회화 작품만 수천 점이 넘을 텐데, 그 사람이 보통 안목이겠어요? 그리고 이거.”
기자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목로 위에 올려두자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에서 샬롯한테 예준 화가님 작품 빼앗겼던 백마담 있죠? 그 사람 SNS 계정인데, 자. 보세요.”
[가장 밝고 탐스러운 별은 높이, 멀리 뜬다. 두 번씩이나 놓칠쏘냐. 머나먼 몽마르뜨로 가자.]
“이게 뭐라고 적힌 거요?”
손님들은 한국어 문장을 해석하지 못했다.
“쉽게 말해 지금 백마담이 한국에 있는데 예준 화가의 그림이 너무너무 가지고 싶으니 슬슬 여권을 챙겨야겠다는 뜻이에요. 이 사람도 미술품 경매에 있어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이 게시글 하나만으로 저 작품의 값이 8배는 뛰었을 걸요?”
로돌프는 사실 예준의 그림이 이곳에 걸려 있어서 몹시 흡족했다.
손님이 많이 찾아와서가 아니었다.
저런 감각적인 작품들이 가게를 꾸미고 있다면 자다가도 걸어나와 감상하고 싶은 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값이 비싸진다면 가질 수 없을 터였다.
섭섭한 일이었지만 공짜로 건네받을 수는 없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얼마 정도 될 것 같은데요?”
“전문 경매사들이 전망하는 예상가는 500만 유로예요. 한화로 하면······ 한 67억 정도 되겠네요.”
“와!”
손님들은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예준도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건 오로지 손님들의 축하에 대한 반응으로 보였다.
아직 예준은 기자에게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
“그런데 예준 화가님. 첫 작품을 안 팔았잖아요. 사연은 모르겠지만 최근 특별전에서도 작품 판매 한 건을 고사했고요. 제가 궁금한 건 딱 하나예요. 저 그림은 팔 거예요, 안 팔 거예요?”
프랑스 유명 잡지사 기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67억이면 생각보다 큰 돈이었다.
그림 7점을 30억에 팔아본 것에 비하면 도대체 작품 당 몇 배인가.
‘당시에도 파격적인 가격이었는데.’
하지만 생각은 이미 굳힌 상태였다.
“안 팔 거예요.”
로돌프와 손님들이 크게 놀랐다.
놀라지 않고 수긍하는 건 기자뿐이었다.
백마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번 그림은 팔 수 없었다.
이번에 SNS의 파급력을 접하면서 유명세를 얻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을 비싸게 파는 것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관심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처음 몇 번뿐이겠지, 계속 비싸게 팔면 내 유명세에 큰 도움이 됐던 기자들도 모두 떠나게 될 것이다.
‘돈이 당장 부족한 것도 아니다.’
부족하다면 한 점 그려다 팔면 되었다.
어제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잘 그려낸 그림이니.
대충 계산해보면 러닝 개런티를 계약한 건만으로도 지갑은 채우고도 넘치지 않을까.
‘반짝 스타로서의 유명세는 일회적인 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성공을 이뤄내기 이전부터 인상주의를 태동시켰다.
새로운 사조를 위한 움직임을 지금부터 이뤄내기 위해선 이 그림이 계속 거리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이유가 뭐냐?”
로돌프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직선으로 흐르는 강을 보신 적 있으세요?”
“인공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면 대부분 굽이쳐 흐르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진다는 제 성질대로만 흘렀다면 강은 굽이쳐 흐르지 않았겠죠. 강을 만드는 건 주변적 지형지물이잖아요.”
환생한 뒤 나를 흥분시켰던 이들을 떠올렸다.
센느 강의 거리화가들.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이일섭. 그리고 몽마르뜨의 무명 예술가들.
그 비주류 예술가들이야말로 전통의 부식을 막는 지형지물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가 새로운 사조의 씨앗이 되었다.
“저는 이곳 화가들처럼 굽이쳐 흐를 거예요.”
손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해주었다.
이러한 단합이 내 발길을 계속 게르부아로 이끌었던 것이었다.
내 말을 받아적으려던 기자가 물었다.
“...... 굽이쳐 흐르기 위해 작품을 팔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풀어서 설명해줄 수 있어요? 기사를 써야 하는데······”
죽은 도시의 부활.
어머니의 일이자 출국 전 잠시 맛보았던 예술적 시도였다.
또한 내게 몽마르뜨의 쇠락은 미술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다시 모여들어 떠들썩한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옛풍경이 되살아날 것이었다.
내가 죽어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벨 에포크가 말이다.
“할아버지. 아직 예술가들의 모임이 있다고 하셨죠? 그게 언제죠?”
“매주 목요일. 내일이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가게 문을 폐쇄해놓을 생각이야. 사람이 붐벼 모임을 진행하지 못하면 큰 낭패니까.”
잘 된 일이었다.
“그럼 기사 걱정은 할 필요 없으시겠네요. 내일 모임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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